80화
시드레는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릴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잠시 골똘한 표정을 짓고 있던 닐스는 어느 순간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입을 딱 벌렸다.
“설마…… 그 요리사가 클라우스의 정부라도 된다는 거요?”
“글쎄요. 진실은 누구도 모르는 법이죠. 약간의 심증이 있을 뿐.”
“혼인도 하지 않은 녀석이 정부를 먼저 들이다니! 그것도…… 그것도 요리사를? 그게 말이나 되는 일이오?”
닐스는 마치 아체리아가 클라우스의 정부라는 것이 기정사실이라도 되는 양 흥분했다. 버젓이 살아 있는 조카를 밀어낼 흉계는 꾸미면서도, 다분히 귀족적이라 할 수 있는 결벽함은 남아 있는 자였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당장 그 요리사를 쫓아내라고 해야겠소.”
“과연 비스몽트 공작이 후작님의 말을 들어줄까요? 제 생각에는 절대로 그러지 않을 것 같은데요.”
“집안의 어른으로서 하는 말을 감히 무시한단 말이오?”
“어른이시라고는 하지만, 후작님.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셔야지요. 상대는 비스몽트 공작이에요. 그리고 후작님께서는…… 안타깝게도 후작에 불과하시죠.”
“…….”
“물론, ‘아직까지는’ 말이에요.”
이 순간 닐스는 시드레가 자신의 목에 줄을 감아 풀었다 당겼다 하는 난감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젊은 여자라 은근슬쩍 무시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는데, 자신을 대하는 시드레의 모습에서는 서툰 태도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클라우스에 대한 원망 때문일까? 무엇이 이 여자를 이토록 노회하고 교활한 사람으로 변하게 만들었는지 모를 일이다. 닐스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시드레를 바라보다 골치가 아프다는 듯이 이마를 짚었다.
시드레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렇죠. 후작님의 말씀대로 이것은 귀족으로서 수치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비스몽트 공작은 아직 미혼…… 들어오는 혼담도 족족 물리치던 그분이 고작 요리사 따위를 정부로 두고 있다면, 그리고 그걸 다른 사람들이 안다면…….”
시드레가 의미심장하게 눈썹을 까딱였다. 닐스는 곧 그녀가 무엇을 의도하고 있는지를 알아차리고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클라우스의 사생활은 철저하게 베일 속에 감추어져 있었다. 아무도 그가 공작저 안에서 어떤 생활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이전에는 그의 몸이 너무 약해서, 곧 죽을병에 걸려서 그런다고들 했지만 요즘에는 조금 다른 여론이 형성되어 있었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신비한 느낌마저 주는 공작. 저택에 초대받는 사람들이라고는 대공이나 란츠호프 후작가의 딸과 같은 친한 사람들 몇몇뿐. 사람들은 모습을 자주 보이지 않는 그에 대해 상상력을 부풀리기 시작했고, 새로이 왕이 된 필리파의 오른팔이 되었다는 것이 그러한 상상에 박차를 가했다.
일종의 동경이 형성된 것이다. 이제 사교계에서 클라우스가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소리를 함부로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에 대해 긍정적인 여론이 퍼져 있는 이때에, 부리는 요리사를 정부로 두고 있다는 스캔들이 퍼진다면…….
“시드레 백작, 그대가 오늘 나를 부른 이유를 이제야 좀 알겠군.”
“감이 좋으신 분을 만나게 되어 다행스럽군요.”
시드레는 소파 등받이에 나른한 태도로 몸을 기대며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창밖을 쳐다보았다.
“나쁜 소문이건 좋은 소문이건, 소문의 가장 좋은 점은 누구 입에서 나왔는지 찾기가 힘들다는 거죠. 한 바퀴 돌고 나면 알아서 부풀려져 있다는 점도 말이에요.”
* * *
아체리아는 여전히―그리고 당연하게도― 클라우스와 함께 식사를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옆에서 지켜볼 수조차 없었다.
닐스 엥글턴이 왜 그렇게 아체리아를 질색하고 싫어하는지 다들 영문을 몰랐다. 그는 아체리아가 눈에 띄기만 해도 기분 나쁜 것을 보았다는 듯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왜 그러시는 걸까요, 그분은?”
클라우스의 야식을 만드는 아체리아를 돕던 요아킴이 불만스럽다는 듯이 투덜거렸다.
“요리장님이 뭘 잘못하신 것도 아닌데 말이에요.”
“글쎄, 나한테 미움 사는 재주가 좀 있는지도 모르지.”
“말도 안 돼요, 그럴 리가 없어요.”
농담으로 한 말이었는데 요아킴은 정색을 하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나마 요리장님이라도 계셔서 다행이에요. 공작님이 야식이라도 드실 수 있잖아요. 오늘도 저녁을 거의 못 드셨어요.”
오늘의 야식은 삶아서 으깬 감자와 양파 퓌레, 그리고 수란이었다. 접시에 깔끔하게 담은 요리 위에 치즈를 뿌려 끼얹은 아체리아는 요아킴에게 따로 구운 감자와 베이컨을 건네주었다.
“자, 이건 가져가서 너도 먹어. 한창 클 나이인데 배고프잖아.”
“어, 정말 제가 먹어도 돼요?”
“그럼. 대신 입은 다물어야 해, 알겠지?”
“그거야 당연하죠.”
아체리아를 따르게 된 뒤로, 요아킴은 비로소 그 나이대 소년다운 모습을 되찾았다. 락케 패거리에게 질질 끌려다니며 원치도 않는 아부를 하고, 늘 구석에 몰리기만 하며 이리저리 눈치만 보던 때와는 딴판이었다.
아체리아는 귀엽다는 듯이 요아킴의 머리를 쓱 쓸어 주고는 접시를 들고 조심스럽게 클라우스의 방으로 올라갔다. 닐스가 온 뒤로, 요즘은 매일같이 일상이 되다시피 한 일이었다.
호즈만은 아체리아의 모습을 보고 눈치 빠르게 자리를 비켜 주었다. 테이블 위에 접시를 내려놓은 아체리아가 평소처럼 종알종알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죄짓는 것도 아닌데 뭐 때문에 이렇게 살금살금 다녀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도둑고양이처럼.”
“들키면 속 시끄러운 일만 생길 테니까.”
“대체 공작님의 외숙부님은 언제 영지로 돌아가시는 거예요?”
클라우스는 치즈를 뿌린 따뜻한 수란을 한 입 떠 입에 넣으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그거야 외숙부님 마음이지.”
“집주인은 공작님이시잖아요.”
“그렇다고 들어온 손님을 내쫓을 수는 없어. 예의가 아니니까.”
“예의 차리려다가 사람이 말라죽을 것 같으니까 드리는 말씀입니다.”
사실 닐스가 빨리 사라져 주기를 누구보다 원하는 사람은 클라우스였다. 그는 공작저에 머물면서도 대관절 무엇을 하고 돌아다니는 것인지, 낮 시간 동안에는 대부분 저택에 붙어 있지 않았다.
소문에는 그가 보수파 귀족들 몇몇을 찾아다니면서 안면을 트고 있다고도 하는데, 필리파 즉위 이후 이미 날개 꺾인 새 신세가 된 그들을 찾아다니며 무엇을 하려는지 짐작 가는 바가 없었다.
그러다가 저녁 시간이 다 되면 틀림없이 공작저로 돌아오는 것이 또한 불쾌한 일 중 하나였다. 클라우스는 되도록 닐스와 식사를 함께 하고 싶지 않았지만, 밖에서 감시라도 하는 것인지 닐스는 식사 때를 정확하게 맞추어 돌아오곤 했다.
그리고 테이블에서는 반드시 클라우스를 까 내리는 말을 몇 마디 얹고는 했다. 마치 그 과정이 없으면 음식이 목으로 넘어가지 않는다는 듯이.
‘한때는 네가 어떻게 되는 줄로만 알았는데, 이렇게 살아는 있으니 다행인 일 아니겠느냐? 그런데, 그렇게 살아난 것치고 네가 공작으로서의 사명감을 제대로 가지고 있는지는 의문이로구나.’
그런 말에는 굳이 대꾸할 필요가 없음을 클라우스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마치 걱정을 하는 것처럼 교묘한 말투로 자신을 깎아내리는 것을 계속 듣기만 하고 있노라면 머릿속이 이상해질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몇 마디 말대꾸를 하면 그때부터 닐스는 더욱더 신이 나서 클라우스를 할퀴고 물어뜯었다. 이제는 더 이상 무력한 어린아이가 아님에도, 클라우스는 그의 얼굴에서 외조부의 매서운 그림자를 발견할 때마다 입을 꾹 다물어 버리곤 했다.
어린 시절의 상처란 그래서 무섭다. 저항할 의지마저 꺾어 버리고 만다.
“저녁 식사를 제대로 하지 않으셔서 제가 속상해요.”
아체리아의 말에 클라우스는 희미한 미소를 띠며 으깬 감자를 떠먹었다.
“그런 사람과 함께 앉아서 억지로 먹느니, 차라리 네가 가져다주는 야식을 기다리는 편이 내겐 훨씬 나아서.”
“하지만 늦은 시간이라 만들어 드릴 수 있는 메뉴가 한정돼 있잖아요. 기름진 걸 드시면 다음 날 탈이 나실지도 모르니까…….”
“커다란 양갈비 같은 걸 뜯어먹지 않아도, 이만하면 충분해.”
“충분하지 않아요! 영양소를 골고루 섭취하셔야 한다고요.”
한밤중에 음식을 만들면 본격적으로 요리를 할 수 없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일단 시끄럽기도 하거니와, 냄새도 많이 풍겼다. 게다가 저녁 시간에 재료를 다 소진해 버리고 나면 남은 것으로는 제대로 된 요리를 만들기가 힘든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도 오늘 저녁 식사에 풋자두가 올라온 건 반갑던데.”
아체리아가 사 온 풋자두는 대부분 절임용으로 소비되었지만, 그중 일부는 메인 메뉴였던 광어구이의 소스로 만들었다. 쌉쌀하면서도 새콤달콤한 소스였다.
“좀 기다리시면 새 절임도 드실 수 있을 거예요.”
“나 때문에 굳이 풋자두 절임을 만든 건가?”
“그럼 누구 때문이겠어요?”
아체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클라우스는 킥, 하고 웃는 소리를 냈다. 닐스 때문에 하루하루 스트레스가 쌓여 가고 있었지만, 한밤중에 아체리아와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은 마음에 들었다.
“내일은 점심때부터 집을 비울 거야.”
“어디 가시나요?”
“폐하께서 연회를 여신다니 참석해야지. 즉위식 이후 처음 여는 연회니까.”
필리파의 즉위식은 화려하면서도 웅장했다. 아체리아는 귀족이 아니었기에 즉위식을 치른 이후 연설을 하는 모습을 보았을 뿐이었지만, 왕관을 쓰고 왕홀을 손에 쥔 필리파의 모습은 왕녀였을 때와는 딴판으로 달라 보였다.
“필리파 왕녀님께서 왕이 되셨다니, 왠지 제 기분이 이상해요.”
“왜? 그럴 분이 아니라고 생각했나?”
“그렇다기보다는…… 왕녀님이실 때는, 뭐라고 해야 할까요? 그때도 물론 어려운 분이셨지만 그나마 좀 가깝게 느껴졌거든요. 그런데 이제 왕으로 즉위하셨으니…… 하늘나라 사람이 되신 것 같다고 할까요?”
하늘나라 사람이라. 클라우스는 가볍게 실소했다. 자신도 왕이 된 필리파를 볼 때마다 아체리아와 비슷한 감상을 느끼곤 했던 것이다. 실제로 그녀는 왕이 되자마자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행보를 보여 주지 않았나.
보수파의 숙청. 그것은 뒤에서 필리파를 지지하던 진보파 귀족들도 예상하지 못한 방향이었다. 숙청을 한다 해도 왕권이 어느 정도 안정된 이후에나 벌어질 일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필리파는 ‘가장 좋은 때’를 기다리지 않았다. 그런 것은 애초에 있지도 않다는 듯한 태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