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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시를 핥으세요, 공작님! (74)화 (74/144)

74화

“오해이십니다, 공작님. 그 문제는…….”

“오해라면 설명해 봐.”

클라우스는 여전히 미간을 찡그린 채 아체리아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뭘,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어디서부터, 무엇을? 아체리아는 답답한 듯 머리를 쓸어 넘기면서 한숨을 쉬었다.

“그날, 연회에서 무슨 일이 있었지?”

아체리아는 조용히 그날의 일을 떠올려 보았다. 에른스트의 얼굴, 자신의 발치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청혼하던 에른스트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가 곧 사라졌다.

“대공 전하께서…….”

“…….”

“제게 청혼을 하셨습니다.”

클라우스는 순간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아체리아는 아무도 없는 주위를 둘러본 뒤 그의 오른쪽에 있는 의자를 끌어당겨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에른스트가 네게 청혼을?”

“그렇습니다.”

“그래서, 넌 받아들였고?”

“그럴 리가 있나요?”

“그럼 거절했나?”

둘 다 아니다. 그날, 그 당시에는 당황해서 차마 무슨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에른스트는 대답을 기다리겠다고 했다. 그리고 아체리아는 그 후로 한 번도 에른스트를 만나지 않았다.

“대답을 기다리시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넌, 뭐라고 대답할 생각인데.”

클라우스가 작게 이를 갈며 추궁하듯 물었다. 아체리아는 잠시 입술을 깨문 채 눈썹을 찌푸리고 있다가, 마치 쓴 것을 토해 내듯 괴로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연히…… 거절할 생각입니다.”

클라우스의 숨소리가 일순 정지했다.

“왜지?”

“왜냐뇨?”

“대공과 결혼하는 건 네게도 좋은 기회가 될 거라 생각해서 망설이고 있던 게 아니었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그런 생각은 한 적 없습니다! 전 다만…….”

“다만, 뭐?”

“……다만, 제 거절이 에른스트 님께 상처가 될 것 같아서 곧장 대답하지 못했던 것뿐이에요.”

며칠 내내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고민한 결과는 그것이었다. 아체리아는 아무래도 에른스트의 청혼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가 아무리 대공의 자리를 내어놓고 자신만을 원한다고 하더라도, 그런 일을 에른스트에게 강요할 수도 없었을뿐더러 무엇보다 자신의 마음이 그를 열렬하게 원하지 않았다.

에른스트가 자신을 사랑하고 아껴 주는 것은 안다. 어린 시절, 만약 결혼을 한다면 어떤 사람이 좋을지 막연하게 생각해 보던 이상형과 에른스트는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그럼에도 아체리아는 에른스트를 선택할 수 없었다. 에른스트를 좋아하지만, 사랑하지는 않기 때문에.

클라우스는 아체리아의 대답에 속내를 잘 알 수 없는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럼 에른스트의 문제는 그렇다고 하고.”

“…….”

“나와 같이 식사를 하지 않겠다는 건 무슨 이유야?”

“그건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고용인의 신분으로…….”

“그건 핑계야. 그것도 아주 말도 안 되는 핑계. 그 말을 내가 믿을 것 같아?”

냉담한 어조였지만 목소리 자체는 그리 차갑게 들리지 않았다. 아체리아는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테이블 아래로 내린 손을 쥐락펴락하며 시선을 돌렸다.

자신은 클라우스를 신경 쓰고 있었다. 사랑하는 마음까지는 아닐지언정 그가 싫지는 않았다. 에른스트에게 청혼을 받는 그 순간에도 클라우스를 생각하고 있었을 만큼.

그러나 막상 이런 일이 닥치자 클라우스에게 자신의 마음을 내보이는 것이 두려워졌다. 클라우스가 자신에게 애정을 주었다는 걸 알면서도, 그의 감정을 알면서도 아체리아는 섣불리 ‘당신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만약 자신이 클라우스와 연인 관계가 된다면? 스캔들은 삽시간에 여러 사람에게로 퍼져 나갈 것이다. 자신이 그걸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아체리아는 아직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설령 그것을 감당한다 하더라도 훗날 클라우스의 마음이 변한다면 그때는 어떡할 것인가. 그때 가서 그에게 배신했다고 소리 지르고 화를 낼 수 있을까? 그럴 수 없을 것 같았다.

“제가 불편합니다.”

“뭐가 불편한데?”

“공작님의 마음이요.”

클라우스가 대답 없이 아체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제 고개를 들고 그를 똑바로 마주 보고 있었다. 그러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내 마음이 불편하다?”

“네, 그렇습니다. 공작님께서는 저를 좋아하신다고 말씀해 주셨지만, 그 마음에만 기대어 의지하기에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들이 너무 많죠.”

“예를 들자면?”

“예를 들자면, 제가 설령 공작님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한들…… 그리고 제가 공작님을 사랑한다고 한들, 제가 공작님 곁에서 평생을 함께할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이겠죠.”

“왜 그럴 수 없는데?”

“공작님이야말로 몰라서 물으시는 건가요? 공작님과 평생을 함께할 사람은 공작 부인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제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세요?”

클라우스는 아체리아의 손을 당겨 꽉 잡았다. 아체리아는 그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어쩐 일인지 오늘은 클라우스의 힘이 그녀를 압도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날 시험하지 마.”

클라우스가 말했다. 아체리아의 입술이 의아함으로 약간 벌어졌다.

“난 네가 내 옆에서 곤란을 겪고 있는 걸 두고 보기만 할 사람이 아니야.”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공작님의 마음이 불편하다는 거예요.”

아체리아는 클라우스의 손을 부드럽게 뿌리친 뒤 그에게서 멀어지려는 것처럼 몸을 일으켰다.

“저는 아직 공작님에 대한 제 마음을 확신할 수 없어요. 공작님께서 원하시는 걸 제가 영영 드리지 못할지도 모르죠. 그러면서 공작님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만 받고 있을 만큼 제가 뻔뻔하지는 않거든요.”

“내가 주고 싶다고 하더라도?”

“네, 공작님께서 주고 싶다 하셔도요.”

클라우스의 눈빛에 일순간 지나간 건 실망스러움이었을까? 아니면 안도감이었을까.

어느 쪽이든, 지금의 아체리아는 그의 감정을 전부 감당해 줄 수 없었다. 그래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만을 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식사 정도는 같이 할 수 있습니다. 혼자 식사하면 재미없는 건 사실이니까요.”

차분한 목소리와 태도였다. 그사이 혼란하게 부유하던 감정을 갈무리한 아체리아는 더 이상 클라우스의 말에 날카롭게 반응하지 않았다.

그것은 클라우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사람처럼 입을 다물고 있다가 말없이 식사를 시작했다. 아체리아는 그릇에 식기가 부딪치는 가벼운 소리를 들으며 그의 옆에 서 있었다.

“네게 시간을 주는 건 어렵지 않아.”

클라우스가 말했다.

“다만 나를 피하지 마.”

‘그 정도는 약속할 수 있겠지?’라는 듯한 눈으로 클라우스가 아체리아를 올려다보았다. 아체리아는 다만 눈을 깜빡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 * *

포석이 깔린 반듯한 길을 마차 한 대가 달리고 있었다.

마부까지 딸린 번듯한 이륜마차인 것치고는 외양이 다소 독특했다. 보통 귀족들이 타고 다니는 이런 마차에는 그 가문을 상징하는 문양이 있게 마련인데, 이 마차에는 어떠한 문양도, 표식도 없었다.

그런 한편 마차의 장식은 매우 화려해서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바퀴 축에까지 자잘한 보석을 박아 놓았는지, 바퀴가 구를 때마다 반짝거리는 오색의 빛깔이 길가에 점점이 무늬를 그렸다.

번화가를 지나 귀족들의 저택이 모인 구역으로 한참이나 들어간 마차가 마침내 멈춘 곳은 다름 아닌 시드레 백작저의 정문이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문을 지키던 하인의 말에 마차의 창문이 덜컥 열렸다. 좁은 틈새로 고개를 내민 남자의 얼굴은 마치 심술궂은 독수리처럼 보였다. 마흔은 훌쩍 넘겼을까? 살짝 벗겨지기 시작한 이마에, 까다롭게 치켜뜬 눈, 굴곡이 눈에 띄는 매부리코가 강퍅해 보이는 사내였다.

“시드레 백작을 찾아왔다.”

“누구라고 전해 드릴까요?”

“엥글턴 후작이라고 전해라.”

하인은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마차가 들어올 수 있도록 문을 열어 준 뒤 얼른 저택 안으로 달려갔다. 다시 창문을 닫은 남자는 구두의 끈을 고쳐 맨 뒤, 오만한 얼굴로 마차에서 내렸다.

백작저의 응접실로 안내를 받아 간 그는 일어서서 인사를 건네는 시드레를 향해 시선을 살짝 내렸다.

“어서 오십시오, 엥글턴 후작님.”

“처음 뵙겠소.”

“길이 멀어 오시기 불편하지는 않으셨나요?”

“그래 봐야 내 고향으로 돌아온 것뿐인데 불편할 리가 있겠는가.”

후작의 목소리는 매우 위압적이면서도 거만했지만, 시드레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사근사근한 태도로 그를 안내했다. 이윽고 시종들이 차와 과자를 내어 왔고, 응접실에는 곧 둘만이 남았다.

“선대께서 살아 계실 때 말로만 듣던 분을 직접 뵙게 되다니 영광입니다.”

시드레가 우아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엥글턴 후작. 데릴사위로 들어갔던 부인 가문의 성을 따라 ‘엥글턴’이 되었지만, 그의 원래 이름은 닐스 슈나이츠 비스몽트였다. 그는 클라우스의 외조부였던 17대 비스몽트 공작의 아들이었으며, 18대 비스몽트 공작 부인의 남동생이었다.

“나에 대한 말이라고 해 봐야 쫓겨난 공작가의 후계자, 그런 것이었겠지. 안 그렇소?”

“그렇지 않습니다, 후작님. 제 아버님께서는 후작님을 매우 높이 평가하셨습니다.”

그 말만은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시드레의 아버지였던 선대 백작은 17대 비스몽트 공작을 꼭 닮아 음험한 야망으로 가득 찬 닐스가 비스몽트 공작가를 이어받았더라면 꽤 큰 세력을 규합했을 거라 말한 적이 있었다.

“시드레 백작이 날 찾는다기에 나는 그대의 아버지가 날 부르시는 걸로 생각했소만.”

“부모님께서는 은퇴하신 후 백작령으로 돌아가셨습니다. 현재의 시드레 백작은 저 한 사람뿐입니다.”

“알고 있소. 내가 의문이 드는 지점도 바로 그것이니까. 대관절 그대가 날 찾을 이유가 없잖소. 우리는 일면식도 없는 사이인 마당에.”

“제가 후작님께 면담을 요청한 것은, 후작님께서 중요한 것을 잊고 계시는 듯해 그것을 일깨워 드리고자 하기 위함입니다.”

엥글턴 후작, 즉 닐스의 미간이 미심쩍게 찌푸려졌다.

“내가 잊고 있는 걸 일깨운다? 대체 내가 뭘 잊고 있다는 말이지?”

“후작님께서 원래 계셔야 했던 자리가 어디인지를 말이지요.”

그 순간, 닐스는 얇은 껍질을 뒤집어쓴 것처럼 웃고 있던 시드레 백작의 표정이 간교한 뱀과 같이 변하는 것을 보았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요?”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후작님께서는 열네 살의 나이에 엥글턴 가문의 데릴사위가 되셨다지요? 후작님의 아버님이셨던 17대 비스몽트 공작님과의 불화로, 거의 쫓겨나다시피 치르게 된 혼사라 들었습니다.”

“지금 날 모욕하는 건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는 다만 사실을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성을 느껴서 그런 말씀을 드린 것일 뿐…… 후작님의 감정을 상하게 해 드릴 생각은 추호도 없답니다.”

시드레가 미소를 지은 순간, 닐스는 자신의 마음속에서 어떤 격동 같은 것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오랫동안 감추고 외면해 왔던 분노와 수모의 기억들이 한꺼번에 고개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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