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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시를 핥으세요, 공작님! (73)화 (73/144)

73화

“제가 오늘 왜 사촌을 불렀는지 궁금하시겠지요.”

필리파가 말했다. 에른스트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흑단 같은 머리칼을 몸 앞으로 넘기면서 머리를 살짝 기울였다.

“선왕께서 돌아가신 후, 저는 국정을 안정시키고자 가장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간 왕실에 달라붙어 국민들의 고혈을 빨아먹고, 뒤로는 야비한 음모나 꾸미고 있던 자들을 거의 다 몰아냈지요.”

“…….”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점이 있습니다.”

“부족한 점이라면…….”

“사촌께서도 아시다시피 내게는 뒷배라 할 만한 세력이 없지요.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후, 내 어머니를 지지하던 세력들은 왕의 분노를 두려워하여 모두들 나를 떠나갔으니까요.”

필리파가 왕궁에서 그토록 고립될 수밖에 없던 이유 중 하나였다. 든든한 친정이나 가문을 뒷배로 가진 후궁들은 자신의 자식을 더 돋보이게 하기 위해 밀어낼 수 있는 것들은 모조리 밀어내었다. 어머니가 죽어 버린 필리파가 아무런 관심을 받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새로이 나를 지지할 세력을 규합할 수 있지만…… 그건 시간이 걸리는 일이지요. 어떤 사람이 왕실을 위해 충성을 바칠 수 있을지 지켜보아야 하니까요.”

필리파는 ‘왕실을 위해’라고 말했지만, 에른스트는 그 속에 ‘나를 위해’라는 뜻이 숨겨져 있음을 예민하게 알아차렸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이전에도 저는 사촌에게 많이 의지했죠. 아무래도 저보다 발이 넓으시고, 보고 들을 수 있는 것도 많으실 테니까. 그래서…… 생각해 본 것입니다만.”

말을 이어 나가던 필리파가 잠시 침묵했다. 에른스트가 필리파를 바라보았다.

“저와 결혼하지 않으시겠어요?”

느닷없이 튀어나온 필리파의 말에, 에른스트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필리파가 말을 이었다.

“왕실에서 사촌 간의 혼인이 금지되어 있던 것도 아니고…… 오히려 먼 옛날에는 혈통을 지키기 위해 권장되었던 일이기도 하지요. 걱정하지 마세요. 저와 다정한 부부가 되어 달라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그저 충실한 가신이자, 남들에게 내보일 동반자가 필요한 것뿐이니까요.”

“폐하, 그 말씀은…….”

“내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즉위식에도 나와 함께 있어야 하겠지요. 왕의 남편으로서 말이에요. 이 얘기를 하려고 불렀습니다.”

당황스러운 이야기였다. 에른스트는 두 번 생각해 볼 것도 없이 단호한 태도로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어렵겠습니다. 부디 말씀을 거두소서.”

“왜죠? 아직 약혼한 여성은 없는 걸로 아는데.”

“저는 폐하의 남편이라는 버거운 자리를 감당할 만한 그릇이 되지 못합니다.”

“그걸 정하는 건 내가 할 일이지요.”

“그리고…… 약혼은 하지 않았지만, 저는 이미 다른 아가씨를 마음에 품고 있습니다. 그러니 폐하의 남편이 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에른스트의 말에 필리파는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떤 아가씨죠? 란츠호프 후작가의 릴리엇인가요?”

에른스트가 고개를 저었다.

“릴리엇은 여동생 같은 아이입니다. 그 아이가 아닙니다.”

“설마 시드레 백작은 아닐 테고.”

“물론, 시드레 백작도 아닙니다. 그녀와 저는 영원히 함께하지 않을 것입니다.”

필리파는 아체리아에게 있었던 일을 몰랐지만, 에른스트의 단호한 어조로 미루어 볼 때 시드레와 그 사이에 무슨 심각한 일이 있었음을 짐작했다. 그것은 한 가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선왕이 그토록 에른스트와 시드레를 엮어 주려 했지만, 두 사람 사이가 그리 가깝지 않다는 건 필리파도 알고는 있었다.

그러나 남녀 관계란 눈을 뗄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언제, 어느 때에 서로의 욕망이 맞아 들어갈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따라서 에른스트가 시드레를 저토록 강경하게 밀어내는 것은 필리파에게 있어 썩 흡족하다 할 만한 일이었다. 대표적인 보수파인 시드레 백작이 대공비가 된다면, 그녀와 에른스트를 구심점으로 삼아 귀찮은 놈들이 세력을 규합하려 할 테니까 말이다.

순간, 필리파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한 가지 생각이 있었다. 그녀는 조금 전까지의 심각한 표정을 지우고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혹시.”

“…….”

“아체리아 클링 양인가요?”

에른스트는 입을 꾹 다문 채 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 침묵이야말로 대단한 긍정이었다.

“이거 참 놀라운 일이네요.”

필리파가 말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 나라의 대공인 사촌이 마음에 품었다는 아가씨가 바로 그 아가씨일 줄이야.”

“오래전부터 간직했던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놀랍고요. 세상에…….”

필리파는 정말로 예상치도 못했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에른스트는 내심 머쓱한 생각이 들었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은 채 시선을 약간 내렸다.

“그러니 폐하, 부디 말씀을 거두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 아가씨를 대공비로 만들 생각인 건가요?”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에른스트는 마치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필리파의 시선을 잠시 피했다가, 약간 붉어진 귓가를 만지작거리며 겨우 대답했다.

“제 욕심으로는 그렇습니다.”

“반발들이 만만치 않을 텐데요?”

“혹은 제가 그녀를 위해 대공의 자리를 포기할 수도 있지요.”

“대공의 자리를 포기하다뇨? 그건 안 됩니다.”

필리파의 입에서 말이 떨어진 순간 에른스트는 움찔하며 그녀를 보았다. 필리파는 이 문제에서만큼은 물러서지 않겠다는 기색이었다. 정략결혼을 제안하던 나른하고 무심한 태도와는 딴판이었다.

“사촌이 저와 결혼하지 않겠다는 것은 좋습니다. 아체리아 클링 양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도 좋아요. 그러나 대공의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폐하.”

“난 같은 말을 두 번 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에른스트는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필리파는 지금 무엇보다도 그녀의 뒤를 받쳐 줄 막강한 세력을 간절하게 원하고 있는 때였다. 그리고 현재 필리파를 떠받치고 있는 세력 중 한 축은 자신이다.

‘이렇게 멍청한 실수를 하다니…….’

“만약 그 아가씨의 신분이 문제라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거라면 해결책이 하나 있죠.”

“해결책……이라니요?”

“그 아가씨에게 작위를 내려 내 시녀로 들인 후, 몇 달 시중을 들게 하다가 사촌과 결혼하도록 하는 겁니다.”

“폐하, 시녀가 될 사람에게 작위를 내리는 법은 없었습니다. 그러니…….”

“침대 시중을 드는 정부들에게 그 많은 작위를 내린 선대왕에게는 그런 말을 했던가요?”

억지나 다름없이 들리는 말이었지만 아주 틀린 소리도 아니어서 에른스트는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필리파는 매끄럽게 빗질한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내리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왕의 시녀라. 백작 정도면 나쁘지 않겠군요. 만약 그 아가씨가 정말 사촌과 결혼하고 싶어 한다면 내가 도와주도록 하죠. 그러니 대공의 자리에서 물러난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는 두 번 다시 입에 담지 않도록 하세요.”

“……감사합니다, 폐하.”

“이만 가 보도록 해요. 난 좀 쉬어야 하겠어요.”

에른스트는 별수 없이 필리파 앞에서 물러났다. 왕궁을 걸어 나오는 와중에도 자신이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몰라 꿈속을 헤매는 기분이었다.

백작이 된다? 아체리아가?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환영할 만한 일이기는 했다. 공작저의 요리사를 대공비로 맞아들이는 것보다, 왕의 시녀였던 백작을 대공비로 맞아들이는 것을 사람들은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아체리아가 과연 그런 것을 원할까?

에른스트는 입술을 깨물고 침묵한 채 왕궁을 벗어났다.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을 디딜 때, 그는 자신의 몸이 깊고 먼 어딘가로 고꾸라져 추락하는 느낌을 받았다. 끝을 알 수 없는 불안한 예감 같은 것이 올무가 되어 목에 걸린 기분이었다.

* * *

나라의 왕이 바뀌었지만 아체리아의 일상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비단 아체리아뿐만이 아니라, 클라우스를 제외한 공작저의 모든 고용인들이 다 그랬다. 왕위 다툼이나 귀족들 간의 세력 싸움 같은 것은 그들만의 이야기일 뿐, 그 아래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활에는 별달리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아체리아는 여전히 클라우스의 식사를 정성껏 만들면서도 그와 식사를 함께하지는 않았다. 그를 향한 마음도 정리가 되지 않았고,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라는 기분 속에서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소스 라비고트를 곁들인 송아지 요리와 송로버섯 수프입니다. 갓 삶은 감자와 고기에 소스를 곁들여 드시면 됩니다.”

아체리아의 설명을 들으면서도 클라우스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단지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접시를 빤히 노려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공작님?”

“수프는 치워.”

“영양 분배를 생각하면 수프도 함께 드시는 것이 맞습니다.”

“내 말 못 들었나?”

뒤에 서 있던 시종이 안절부절못하며 테이블을 향해 가까이 다가오려 했다. 그러나 아체리아는 손을 들어 시종의 움직임을 막은 뒤 클라우스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왜 그러시는 거예요?”

“뭘 왜 그러냐는 거지?”

“왜 도로 예전처럼…….”

“그걸 몰라서 물어?”

그때, 둘 사이의 분위기가 심상찮게 돌아가고 있음을 직감한 호즈만이 클라우스 곁으로 다가왔다.

“공작님, 무슨 문제라도…….”

“됐으니까 전부 나가라!”

신경질적인 외침이 식당을 쩌렁쩌렁하게 울리자, 호즈만은 기겁을 하며 다른 시종들을 데리고 도망치듯이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아체리아만은 제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서 있었다.

“나가란 말 못 들었어?”

“저 빼고 나가라고 하신 거잖아요. 자, 이제 사람도 없으니 솔직하게 말씀하십시오. 왜 또 이러시는 건지. ‘몰라서 묻냐’는 말은 대체 무슨 뜻이신가요?”

클라우스가 짜증스런 얼굴을 들어 아체리아를 쳐다보았다.

“너야말로 왜 이러는 거야?”

“제가 도대체 뭘, 어쩐다고…….”

“내가 마음에 안 들면 안 든다고 말을 하면 될 것 아니야. 기분이 나쁜 일이 있었으면 나쁘다고 말을 하라고.”

“공작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저는…….”

“시치미 떼지 마.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고 있잖아.”

그가 며칠 전 저녁에 있었던 일을 추궁하고 있는 거라는 걸 깨달은 아체리아의 표정에 비로소 변화가 생겼다.

“왜 갑자기 나와 함께 식사를 하지 않겠다는 거지? 며칠 전에 있었던 그 태도는 또 뭐야? 답잖게 축 처져서, 어딜 봐도 할 말이 있는 표정을 하고서는 아무 할 말도 없다고 우겨 대기나 하고. 내가 그걸 모를 거라 생각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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