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아체리아는 어두운 복도를 따라 주방으로 내려갔다. 저녁 시간의 온기가 전부 빠진 주방은 어둡고, 썰렁한 냉기로 가득했다.
벽에 걸려 있던 작은 냄비를 내린 아체리아는 요리사들이 하나씩 집어 먹으려 숨겨 둔 초콜릿을 찾아내어 약간의 물과 함께 녹였다. 거기에 데운 우유를 조금씩 더해 가며 따뜻한 초콜릿을 만들었을 때, 피곤한 표정의 호즈만이 주방으로 내려왔다.
“집사장님?”
“아체리아, 잠은 안 자고 여기서 뭐 하는 거냐?”
“그러는 집사장님은 안 주무시고 왜 여기 내려오신 거예요?”
“공작님께서 아직 깨어 계신다. 따뜻한 레몬차를 드시고 싶어 하시던데…….”
아체리아는 초콜릿이 든 잔을 호즈만에게 밀어 주며 말했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레몬차를 드시면 위가 상하실 거예요. 제가 꿀과 생강을 넣은 우유를 가져다 드릴 테니, 집사장님은 이 초콜릿이라도 좀 드세요. 세상에, 당장 쓰러지실 것 같다고요.”
“그래 주겠느냐?”
아체리아는 호즈만에게 초콜릿이 든 잔을 건네주고는 곧장 남은 우유를 데우고, 설탕에 재워 두었던 생강과 꿀을 꺼내어 달콤쌉쌀한 차를 만들었다. 그리고 저녁에 먹고 남은 베리 수플레에 새로 소스를 끼얹어 클라우스의 방으로 가져갔다.
“들어와.”
노크를 하자, 안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온 아체리아와 눈이 마주친 순간, 클라우스의 표정이 전에 없이 부드럽게 누그러졌다.
“왜 네가 와?”
비록 목소리는 퉁명스러웠지만, 아체리아는 생전 처음 보는 클라우스의 표정에 가슴 한켠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다.
“호즈만은?”
아체리아가 대답이 없자 클라우스가 한 번 더 물었다. 잠시 방황하는 사람처럼 서성거리던 아체리아는 목 안으로 작게 헛기침 소리를 내면서 그의 책상 위에 쟁반을 내려놓았다.
“호즈만 집사장님께서 너무 피곤해 보이시기에 제가 왔습니다.”
“너는 왜 아직까지 안 자고 있었는데?”
“잠이 안 와서요.”
클라우스는 더 이상 묻지 않고 고개만 끄덕이고는, 앉으라는 듯이 옆에 있는 의자를 턱짓했다. 아체리아가 자리에 앉자, 김이 폴폴 피어오르는 잔을 든 클라우스가 미간을 찡그리며 안에 있는 내용물을 들여다보았다.
“내가 마시고 싶다고 한 건 레몬차였는데.”
“이 시간에 레몬차 같은 걸 드시면 위가 상하실 것 같아서요. 꿀과 생강을 넣은 따뜻한 우유입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편안하게 주무실 수 있도록 도울 거예요.”
그가 우유를 마시는 동안, 아체리아는 무엇인가 초조한 사람처럼 무릎 위에 손을 모은 채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고 있었다.
입 안에 번지는 꿀과 생강의 맛을 음미하고 있던 클라우스가 눈을 깜빡이며 아체리아를 바라보았다.
“왜 그래?”
“네?”
“왜 그렇게 불안해하냐고.”
‘눈치 빠르긴.’
아체리아는 무릎 위에서 손가락을 부산하게 움직이다가 다시 한번 헛기침을 하며 클라우스를 힐끔 바라보았다.
어둠 때문일까? 그의 얼굴은 음영이 분명하게 드리워 있어 복도에 늘어선 흉상 조각의 일부처럼 보였다.
하얀 얼굴 위에서 노을빛 불길이 물결처럼 일렁인다. 아체리아는 가만히 그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가 머쓱한 표정으로 제 머리카락을 훑어 만지면서 시선을 비스듬히 돌렸다.
“……아까는 죄송했습니다.”
이윽고 고개를 든 클라우스의 표정은 묘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되묻는 것 같기도 했고, 당연히 들어야 할 말을 들었다는 듯이 당당한 것 같기도 했다.
“뭐가 죄송하다는 거지?”
“대공 전하와…… 공작님의 관계에 대해서 함부로 얘기해서요. 그리고 공작님께, 음…… 주제넘은 말을 한 것도요.”
“틀렸어.”
틀렸다니? 아체리아는 의아한 눈으로 클라우스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씀이죠?”
“사과하는 방향이 틀렸다는 말이야.”
“그러니까 어떻게…….”
클라우스의 얼굴이 갑자기 가까워졌다. 놀란 아체리아가 어깨를 움찔거리자, 클라우스는 손을 올려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쥐었다.
‘이게 무슨 분위기야, 지금!’
아체리아의 눈동자가 분주하게 움직였다. 코앞까지 다가온 클라우스의 속눈썹에서부터 코끝, 그리고 입술에 이르기까지 시선이 이동하는 동안 얼굴로 점점 열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조금만 움직여도 그대로 입술이 닿을 것 같아 눈 둘 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
“저기…… 공작님?”
“넌 항상 나보다는 에른스트의 편을 들어.”
“……네? 그럴 리가…….”
“아니, 넌 그래.”
클라우스는 무척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아체리아의 얼굴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내가 마음에 안 드는 건 바로 그거야.”
말을 마친 클라우스는 아체리아의 입술을 힐끔 내려다보았다가, 오른쪽 뺨 위에 닿기만 하는 가벼운 키스를 하고는 가까워졌던 몸을 천천히 뒤로 물렸다.
“그러니까 앞으로 사과를 하려면 그런 점을 잘 생각해 보도록 해.”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클라우스는 크게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입술을 대었다 뗀 순간, 아체리아의 얼굴에 떠오른 당황한 표정이 오히려 조금 우스웠다.
아체리아는 클라우스가 키스한 자리를 손끝으로 매만지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래, 그러도록 해. 그리고 연회에 가기 전에 준비할 게 많으니, 내일은 다른 곳에 가지 말고 여기 있도록 해.”
머릿속으로 많은 생각이 휘몰아치고 있었지만 아체리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그의 방을 나섰다.
복도에 길게 뻗은 어둠은 숨을 죽인 채 아체리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방 안에서 벌어진 일을 그들이 모두 훔쳐보기라도 한 것처럼. 클라우스가 입을 맞춘 순간, 아체리아의 마음속에서 불쑥 튀어나왔던 어떤 감정을 알아채기라도 한 것처럼.
‘미치겠네, 정말…….’
아체리아는 여전히 불에 덴 듯 홧홧한 뺨을 만지작거리며 멍하니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공작저의 풍경이 오늘 밤만은 다르게 보이는 것이 클라우스 때문인지, 아니면 그에게 마주 입을 맞출 뻔한 자신 때문인지 알기 힘들었다.
* * *
필리파가 주최한 왕성에서의 연회는 지난번 만찬보다 좀 더 성대한 규모로 열렸다. 특히, 왕성에서 유명을 떨치고 있는 진보파의 귀족들이 대거 참여한 자리였다.
아체리아는 결국 클라우스와 함께 연회장에 들어가게 되었다.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자마자 집중되는 시선들이 부담스러웠지만, 옆에서 팔짱을 끼고 있던 클라우스가 ‘내 옆에만 있으면 된다’고 말해 준 덕분에 겨우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삼삼오오 모여 서 있던 사람들이 긴 테이블에 앉자 식사가 시작되었다. 필리파가 가장 상석에 앉았고, 그 양옆으로 클라우스와 에른스트가 앉았다. 그리고 클라우스의 옆에는 아체리아가 앉아 있었다.
애피타이저가 지나가고 다음 순서를 기다리는 잠시의 시간 동안, 필리파가 자신의 잔을 스푼으로 가볍게 두드려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하는 바입니다.”
왕녀의 짧은 연설이 시작되자 사람들은 잔을 들어 그녀에게 경의를 표했다. 오늘 필리파는 평소와 달리 꽤 화려하게 치장을 하고 있어, 그녀의 담백하고 단정한 모습만을 알았던 사람들은 조금 뜻밖이라는 표정들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러분 중에는 오늘의 이 연회가 무엇을 위한 연회인지 잘 모르시는 분들도 계시겠지요.”
에른스트의 표정에 약간 긴장한 빛이 지나갔다. 그와 필리파의 시선이 잠시 마주친 순간, 필리파는 고지식하게 보일 정도로 얇은 입술을 매끄럽게 끌어당기면서 미소를 띠었다.
“여러분도 소식을 들으셨으리라 믿지만…….”
필리파의 말끝이 희미하게 늘어진 순간, 사람들 사이로 긴장감이 흘렀다.
“폐하께서 아직 건재하신 이때에, 참람하게도 왕좌를 노리고 발칙한 짓을 서슴지 않은 자들이 있었지요.”
3왕자와 5왕자는 태가 다르긴 해도 필리파의 오빠들이었지만, 담담하게 말을 이어 나가는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추방된 혈육들에 대한 어떤 걱정이나 염려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현명하고 공명정대하신 폐하께서는 분수에 넘치는 짓을 저지른 자들을 강하게 제지하시어 민간에 피해가 없도록 돌보셨으며, 혈육 간의 정을 생각하시어 자비로우시게도 극형은 면할 수 있도록 조치하셨습니다.”
필리파가 잔을 들었다. 서로 눈치만 보고 있던 귀족들이 그녀를 따라 잔을 들어 올리자, 필리파가 말했다.
“하여, 오늘 이 자리는 폐하를 대신하여 이 나라의 새로운 안녕과 익숙한 평화를 축하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입니다. 여러분께서는 부디 잔을 들어 베르데사를 위해 건배해 주시지요.”
“베르데사의 안녕을 위하여!”
“폐하의 만수무강과 필리파 왕녀님을 위하여.”
연설은 끝이 났다. 필리파는 선 채로 잔 속에 든 술을 들이켜며 에른스트를 똑바로 내려다보았다. 검은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본 순간, 에른스트는 필리파가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를 분명하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름답게 다듬어진 그녀의 손톱이 샹들리에 불빛을 받아 매끄럽게 빛나고 있었다. 그 손톱이 다음으로 파고들 목줄기는 과연 누구의 것이 될 것인가. 에른스트는 착잡한 심정으로 술을 들이켰다.
아체리아는 정치 이야기가 오가는 테이블 사이에 끼어 한마디 말도 없이 식사만 계속하고 있었다. 긴장을 한 탓인지, 화려하게 차려진 음식의 맛도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그나마 옆에 앉은 릴리엇이 아체리아를 위해 여러 번 말을 걸어 주었다.
“요즘 클라우스하고는 어떠니?”
불쑥 들어온 릴리엇의 질문에 아체리아는 그만 입속에 머금었던 포도주를 뱉을 뻔했다.
“어머, 괜찮아?”
“……네, 괜찮…… 괜찮습니다. 죄송해요, 아가씨.”
“그렇게 부르지 않아도 돼. 릴리엇이라고 불러.”
“그래도 어떻게…….”
“괜찮다니까. 자, 해 봐. 릴리엇.”
아체리아는 어색한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거렸다.
“릴리엇.”
“그래, 그렇게 부르면 돼.”
릴리엇은 마치 소녀처럼 해맑게 웃으며 아체리아의 어깨를 격려하듯 두드렸다.
“클라우스가 요즘 건강해진 건 다 네 덕분이야, 아체리아.”
릴리엇이 말했다.
“이런 자리에도 참석하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식사도 하고. 예전 같았으면 상상이나 했을 일이니? 안 그래?”
“그야…… 그렇지요.”
그런 의미로 물은 것이었구나. 별안간 며칠 전 일이 떠올라 오른쪽 뺨이 다시 화끈하게 달아올랐던 아체리아는 겨우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릴리엇은 아직 클라우스가 자신에게 어떤 감정을 갖고 있는지 모르는 게 틀림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