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왕궁 안에서는 정말로 아체리아가 할 일이 단 하나도 없었다.
필리파의 시중을 드는 것이야 타티아나가 할 일이었고, 원래 공작저에서도 하녀로 일한 건 아니었으니 아체리아의 일이라고는 주방에서 하는 것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주방을 나오고 나니, 정말이지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있는 것밖에는 도무지 할 게 없었다.
“답답해……!”
필리파가 사용하는 내실과는 다른, 그나마 ‘왕녀의 객실’이라고 할 만큼은 꾸며진 방을 구경하는 것도 두 바퀴째에 벌써 싫증이 났다.
청소를 좀 해 볼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지만 가구며 집기들은 먼지 한 톨, 얼룩 하나 없이 깨끗했다.
문득 맞은편 방에 있는 클라우스는 대체 뭘 하고 있을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긴, 그는 저택에 있을 때도 거의 하루 종일 방에만 틀어박혀 있으니 이런 상황이 전혀 지겹지 않을지도 모른다.
‘혼자 봉랍이라도 찍고 있는지 모르지.’
아체리아는 하품을 참으며 싱겁게 입맛을 다셨다.
왕궁에 들어온 지 이제 만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이대로 며칠을 대체 어떻게 버틴담? 만찬 준비를 하기도 전에 돌아 버리지나 않으면 다행일 것 같은데.
아체리아가 방을 뛰쳐나가려던 찰나, 다행히 타티아나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는 상관인 필리파만큼이나 엄숙하면서도 딱딱한 얼굴로 시선을 살짝 내렸다가 들면서 말했다.
“왕녀님께서 클링 양을 찾으십니다.”
“……저를요? 공작님도 함께요?”
“아니요. 클링 양만 불러오라 하셨습니다.”
이렇게 갑자기 왕녀와의 독대라니.
아체리아는 타티아나를 따라 나가면서 굳게 닫힌 클라우스의 방문을 힐끔 노려보았다. 이럴 때 모르는 척 좀 나와 주면 어디가 덧나나. 혹시 속 편하게 잠이라도 자고 있는 거 아니야?
“앉으렴.”
필리파는 처음 아체리아를 만났던 그 테이블 앞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읽고 있는 것이 악보가 아니라 뭔가 어려워 보이는, 두꺼운 책이라는 것만이 달랐다.
“저를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일단 앉으렴. 타티아나, 클링 양에게 차를 한 잔 준비해 줘.”
“네, 왕녀님.”
타티아나는 공손하게 허리를 숙인 뒤 물러났다. 잠시 후 다른 궁인이 차와 간단한 다과를 가지고 다시 들어왔다. 아체리아는 갑자기 허기를 느꼈다.
“생각해 보니 식사를 제대로 했을지 걱정이 되더구나.”
“……살펴 주셔서 감사합니다, 왕녀님.”
“저녁 전까지 간단히 요기할 것을 마련하도록 이야기하마.”
“저, 주방을 쓸 수 있게 해 주신다면 제가 만들 수도 있습니다.”
아체리아의 말에 필리파는 눈을 조금 크게 떴다가, 이내 재미있다는 듯이 입꼬리를 비스듬히 끌어올렸다.
“넌 요리에 아주 자신이 있는 모양인데, 언제부터 요리를 하게 되었지?”
“아주 어렸을 때였습니다, 왕녀님. 열 살도 되기 전의 일이죠.”
“가족들은? 어쩌다가 공작저에서 일을 하게 되었고?”
“그게…….”
자신의 불행한 과거사를 왕녀 앞에서 구구절절 털어놔도 괜찮은 걸까? 듣기 싫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고 벌이라도 받는 거 아냐?
“괜찮으니 말해 보렴.”
아체리아의 고민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필리파가 좀 더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어렸을 때 당한 불행한 사고에서부터 가족을 모두 잃기까지, 이대로 굶어 죽나 싶었던 곳에서 공작 부인의 눈에 띄어 공작저로 들어오기까지…….
“얀 헨릭이 저를 주방으로 데려갔습니다. 제가 맛을 잘 알아챈다고 하면서요.”
“말하자면 네게는 요리의 재능이 있었던 거로구나. 타고난 센스였군.”
필리파가 감탄하듯이 말했다. 잠시 당연하다는 듯이 가만히 듣고 있던 아체리아는 다음 순간 아차, 하는 표정을 지으며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과찬이십니다.”
“난 네가 마음에 든다.”
아체리아의 표정이 어리둥절해졌다.
“……제가 마음에 드신다고요?”
“그래. 꾸밀 줄 모르는 솔직한 면이나, 너 자신에 대한 당당함, 네 재능에 대한 믿음…… 그런 것들은 지금 내게 필요한 것들이거든. 네가 귀족이 아니어서 아쉽구나. 귀족이었다면 비스몽트 공작 대신 너를 내 오른팔로 삼았을 텐데.”
클라우스를 오른팔로 삼아?
저 까다롭고, 편식 심하고, 툭하면 쓰러지는 양반을?
‘왕족들의 생각은 알 수가 없네.’
솔직하게, 아체리아는 그런 평밖에 내릴 수가 없었다. 대관절 클라우스를 오른팔로 삼아 필리파가 뭘 하려는 건지도 알 수가 없었다. 얼마나 황당했던지, ‘네가 귀족이었다면 대신 너를 오른팔로 삼았을 것이다’라는 놀라운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하지만 귀족이 아니더라도 나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은 얼마든지 있지.”
“무엇이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런 말을 할 때는 조심해야 한단다. 내가 무엇을 시킬 줄 알고 ‘무엇이든’이라는 말을 쉽게 하는 거지?”
“……요리 말고 다른 걸 시키실 생각이셨나요?”
필리파는 대답 없이 어깨만 작게 으쓱였다. 그럴 수도 있지 않느냐는 표정이었다.
“……죄송합니다, 왕녀님. 말을 번복하는 건 죽을죄라는 건 알지만, ‘요리에 관한 한’ 무엇이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넌 정말 재미있는 애로구나. 내가 무섭진 않은 거니?”
“왕녀님께서는 아름다우시죠. 무서운 분은 아니십니다.”
“어쩌면 넌 세상에 무서울 게 없는 애라는 생각도 드는구나.”
필리파가 그런 말을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아무리 귀족이나 왕족의 생리에 대해 모른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진짜 왕족을 눈앞에 둔 사람들은 자신의 신분이 무엇이건 간에 납작 엎드려 고개부터 조아리기 마련이었다.
그 상대가 하물며 필리파처럼 위압감을 주는 사람이라면 말할 나위도 없다. 뒤에서는 뭐라고 떠들든, 앞에서는 마치 죽으라면 죽는시늉도 할 것처럼 벌벌 기는 것이 사람의 원초적인 본능이라고 필리파는 생각했다. 자신보다 강한 상대 앞에서 엎드리게 되는 것.
그러나 아체리아는 달랐다. 분명 상대방이 마음을 먹으면 자신을 죽일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는데도 전혀 주눅 들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즉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있거나 성격이 매우 강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리고 이 애는 아마 둘 다인 것 같고.’
“자…… 그렇다면.”
“…….”
“만찬에 무슨 요리를 내놓으면 사람들이 감탄할까? 네 생각을 좀 들어 보고 싶구나.”
감탄할 만한 요리라. 아체리아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잠시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만찬에 내놓을 요리를 전혀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일단 한 번 연회 요리라는 것을 경험해 보았고, 재료를 준비하고 다듬고, 메뉴를 결정하는 데에 있어 프레드나 도미닉 같은 경험 많은 사람들의 조언을 얻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사람들이 감탄할 만한’ 요리라니. 그건 너무 추상적이었다.
“감탄할 만한 거라고 하시면, 맛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맛뿐만이 아니야. 담음새나 모양도 사람들을 놀래켜야 하지. 한 가지…… 내가 생각해 둔 게 있는데, 네가 비스몽트 공작저에서 연회 때 내놓았던 그 요리 말이야. 채소와 고기 같은 것들을 한꺼번에 올려서 구워 냈던 납작한 파이 같은 거. 그건 꼭 올라가면 좋겠구나.”
“그건…… 그날 사고가 생기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만들었던 요리인데,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과정이야 어쨌든 그 요리가 아주 호평이었지 않니? 사람들에게 신선하다는 느낌도 주었고. 내 만찬에도 그게 올라왔으면 좋겠어. 어렵니?”
아체리아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어렵지 않습니다.”
“좋아. 나머지는?”
“나머지는…….”
머리를 재빨리 굴려야 했다. 필리파가 내놓고 싶어 하는 요리를 감안한다면, 평범한 만찬처럼 순서대로 나오는 것은 아마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그럼 파티처럼 집어먹을 수 있는 형태로 만든다면……? 아냐, 그건 너무 간단한 것들밖에 만들지 못할 위험이 있고…….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왕녀님?”
필리파가 말해 보라는 듯 아체리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애피타이저 같은 간단한 요리들은 자유롭게 집어먹을 수 있도록 핑거푸드 형태로 준비하겠습니다. 그런 다음, 정찬에 나올 메뉴들은 요리사들 몇 명이 그 자리에서 조리하여 원하는 사람에게 줄 수 있도록 하는 거지요.”
“네 말은, 그럼 자리에 앉을 필요가 없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자리에 앉아 순서를 기다리거나 지루한 대화를 나눌 것 없이, 악사들을 불러 음악을 연주하게 한다면 원하는 사람들은 간단하게 춤을 출 수도 있을 겁니다. 그리고 먹고 싶은 음식을 골라 마음껏 먹을 수 있도록 하는 거죠.”
“재미있는 방법이구나. 그 자리에서 조리를 해서 먹을 수 있도록 하는 건 독특한데.”
“왕궁에서는 독특한 방법일지 모르지만, 평민들이 모이는 번화가 같은 곳에 가면 꽤 많이 볼 수 있는 방법이랍니다. 마렌 같은 것을 그렇게 먹을 수 있지요.”
“마렌? 그게 뭐지?”
과연, 왕녀라 그런지 아랫사람들이 먹는 요리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는 것 같았다. 아체리아가 마렌이 무엇인지 설명해 주자, 처음으로 인간다운 표정이랄 것이 필리파의 얼굴에 떠올랐다. 바로 호기심이었다.
“재미있겠구나. 맛도 좋을 것 같고. 그것도 연회에 내놓으면 좋겠군.”
“마렌을요? 그것도 나쁘지 않지요. 아마 대다수의 귀족들이 한 번도 먹어 보지 못한 것일 테니까요.”
“정찬을 그 자리에서 요리해 주는 것도 아마 아무도 겪어 보지 못한 것이겠지. 그러니까…… 눈앞에서 말이야.”
“거위 구이 같은 것들도 아예 여러 마리를 통째로 내어놓고, 안에는 다양한 속을 채워서 먹고 싶은 만큼 덜어 먹을 수 있도록 하면 좋을 것 같아요.”
아체리아가 말했다. 필리파는 머릿속으로 그 기묘하고도 새로운 만찬의 현장을 떠올려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리 그 정도로 소란스러워 주는 것이 자신에게는 딱 맞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만찬을 여는 이유를 생각해 본다면 더더욱이나 그랬다.
“좋아. 네 말대로 하자꾸나. 주방에 일러둘 테니 준비해 보도록 하렴. 널 도와줄 요리사들은 타티아나가 보내 줄 거야. 믿을 만한 자들이니 안심하고.”
“알겠습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서두르렴. 필요한 것이 있으면 뭐든 내 이름을 대고 주문해. 알겠니?”
“그것도, 잘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참, 왕녀님.”
“왜 그러니?”
“본격적으로 만찬회를 시작하기 전에, 제가 이 궁의 주방을…… 좀 사용해도 괜찮을까요? 구조도 익히고, 사람들과 안면도 틀 겸…….”
“그야 어렵지 않지. 주방에 네 이야기를 전해 두겠다.”
“그리고 만찬회에 어떤 분들이 오시는지도 알고 싶습니다.”
“그건 타티아나가 목록으로 정리해서 알려 줄 거야. 다른 건 궁금한 게 없니?”
아체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필리파가 가 봐도 좋다는 손짓을 하자, 그녀는 신이 나서 방을 나갔다.
왕궁을 구경할 때보다 더 즐거워 보이는 듯한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필리파는 피식 흘러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