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비스몽트 공작께서는 그간 왕궁 출입을 거의 하지 않으셨는데, 필리파 왕녀님을 만나시러 가신다니 의외네요.”
시드레가 말했다. 클라우스는 대체 그녀가 왜 자신에게 계속해서 말을 거는지 이해하지 못해 슬슬 짜증이 나려 하는 상태였다.
“지금까지 하지 않았다고 해서 앞으로도 하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소?”
“어머, 그럼 앞으로도 더욱 자주 뵐 수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말하며, 시드레가 공작의 팔을 살짝 건드렸다.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아체리아는 세상에서 제일 황당한 장면을 본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 이 백작…… 이름이 뭐랬더라? 아무튼 일전에 후원에서 보았던 이 사람이 클라우스에게…… 그러니까…….
‘애교를 부리고 있는 게 맞나?’
클라우스는 난감함과 불쾌함이 반쯤 섞인 몸짓으로 시드레의 손을 정중하게 떼어 내었다.
“그럴지, 그렇지 않을지는 두고 봐야 아는 일이지. 갈 길이 바빠 이만 실례하겠소.”
“그러시지요. 아참…… 그런데, 이 아가씨는 요리사라고 하지 않았나요? 어머, 이렇게 차려입으니 알아보지 못하겠네요. 꼭 귀족 가문의 여식 같아요.”
시드레가 아체리아를 말끄러미 보며 의뭉 떠는 웃음을 지었다. 그 미소의 속뜻을 알아채지 못할 아체리아가 아니었지만, 상대가 상대이다 보니 모르는 척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러나 클라우스는 달랐다.
“그런 말투는 불쾌하군.”
클라우스가 차갑게 일갈하자 시드레의 표정이 까끄름하게 변했다.
“비스몽트 공작님, 제가 무슨 말실수라도……?”
“클링 양에게 그런 말투를 쓰는 게 불쾌하다는 거요.”
“……클링 양이라고요?”
이번에는 시드레만이 아니라 아체리아마저도 놀랐다. 고용인을 이름으로 부르는 것도 아니고 성으로, 그것도 ‘양’이라는 경칭까지 붙여 부르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가지.”
클라우스는 어안이 벙벙해진 채 말문이 막힌 시드레를 내버려 둔 채 서둘러 아체리아를 에스코트하여 필리파가 있는 내실의 문 안으로 들어갔다.
혼자 남겨진 시드레는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을 터뜨렸다가, 이윽고 제 분에 못 이겨 발을 탕, 굴렀다. 뾰족한 눈으로 클라우스와 아체리아가 사라진 곳을 쏘아보던 시드레는 콧대를 치켜든 채 복도를 벗어났다.
아체리아는 필리파의 내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 화사하고 으리으리하던 복도와는 달리, 필리파의 내실은 전체적으로 고요한 수도원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물론 아체리아가 고급스러운 가구를 알아볼 만한 안목이 있었다면, 그 정적인 분위기를 구사하고 있는 몇몇의 가구나 장식품들이 하나같이 입이 딱 벌어질 만큼 호사스러운 것들뿐임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을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비스몽트 공작님. 그리고 아체리아 클링 양.”
타티아나였다. 클라우스는 고개만 까딱여 묵례를 한 뒤 아체리아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어정쩡하게 서 있던 아체리아가 따라서 묵례를 하자, 타티아나의 표정이 약간 묘하게 바뀌었다.
“왕녀님을 뵐 때는 절을 하셔야 합니다, 클링 양.”
“……아, 네. 죄송합니다.”
“제게는 죄송하실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왕녀님 앞에서는 그러시면 안 됩니다. 이름이 불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왕녀님께서 들어오라 허락하시면 앞으로 나와 절을 하세요. 이렇게.”
그리고 타티아나는 시범이라도 보이듯 치맛자락을 나붓이 펼치며 우아한 궁정식 절을 해 보였다. 아체리아는 그녀의 의도를 얼른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가시죠.”
타티아나가 앞장을 섰다. 아체리아는 얼굴에 드러난 긴장을 숨기지 못한 채 더욱 깊이 숨겨진 방 안으로 이끌리듯이 들어갔다.
필리파는 볕이 잘 드는 창가에 앉아 악보를 보고 있었다. 클라우스와 아체리아가 들어왔음을 뻔히 알면서도 일부러 고개를 들지 않았다.
“왕녀님, 비스몽트 공작과 아체리아 클링 양이 알현을 청합니다.”
그제야 필리파의 고개가 천천히 위로 올라왔다. 눈을 마주친 순간, 아체리아는 그녀가 클라우스보다 훨씬 대하기 어려운 상대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아체리아 클링이라고 합니다.”
아체리아가 드레스 자락을 펼치며 절을 했다. 필리파는 여전히 무감동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가, 마치 졸음이 오는 고양이처럼 께느른하게 턱을 괴었다.
“빨간 머리군?”
“예…… 네?”
“빨간 머리 아가씨는 폭풍도 잠재울 수 있다고들 하지.”
묘한 말이었다. 아체리아는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이야기였다. 무슨 동화 이야기 같기도 한데?
“왕국의 옛날이야기 중, 빨간 머리의 아가씨들은 성격이 강하다는 속설이 있습니다. 왕녀님께서는 그 이야기를 하고 계신 겁니다.”
타티아나가 덧붙여 설명했다. 아체리아는 그제야 아, 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어떻지? 성격이 강한가?”
대답해도 되는 건가? 아체리아는 눈치를 보듯 클라우스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아체리아는 머뭇거리면서 필리파를 바라보았다.
“강한…… 편인 것 같기는 합니다.”
“다행이군. 난 그런 사람을 좋아하거든. 네가 오늘 왜 여기에 오게 되었는지는 설명을 들었나?”
“……대강은 들었습니다. 왕녀님께서 만찬회를 여시는데…… 거기에 요리를 낼 요리사가 필요하시다고요.”
“그래. 공작저의 연회에 갔을 때 네 요리가 재미있다고 생각했지. 부담은 가질 것 없고, 네가 하던 대로 하면 된다. 낯선 곳이라 어려울 수 있겠지만 날 위해 수고 좀 해 줬으면 좋겠군.”
“저…….”
“궁금한 게 있나?”
아체리아는 긴장한 표정으로 필리파와 클라우스의 얼굴을 번갈아 보고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네. 저……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말해 보렴.”
“저…… 왕성에는 저 같은 것보다도 훨씬 더 솜씨가 좋은 요리사들이 많이 있을 줄로 압니다. 그런데 어째서…….”
“어째서 너를 택했느냐고?”
필리파가 말을 가로채듯 되묻자, 아체리아는 잠시 멍하니 입을 벌렸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게 궁금합니다.”
“별 이유는 없다.”
“……네?”
“말하지 않았니? 너의 요리가 재미있었다고. 물론 내로라하는, 네가 이름도 알지 못하는 귀족들이 줄줄이 참석하겠지. 충분히 긴장되는 자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넌 이미 공작저에서의 연회를 잘 해냈어. 그러니 널 믿고 일을 맡기는 거다.”
물론 그것만이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다. 필리파는 비스몽트 공작과 자신의 친분을 사람들 앞에 과시할 필요가 있었다. 비스몽트 공작이 왕가에도 줄을 댈 수 있는 인물이라는 걸 먼저 보여 줘야 하기 때문이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필리파는 그녀의 대답에 만족했는지 은은한 미소를 띠면서 나가 보라는 손짓을 했다.
타티아나는 아체리아와 클라우스를 내실 옆에 딸린 다른 방으로 안내했다. 한가운데는 응접실 겸 서재로 쓸 수 있는 공간이 있고, 그곳을 중심으로 양옆에 각각 방이 하나씩 딸려 있었다.
“이곳은 왕녀님의 손님들께서 머무시는 방입니다. 클링 양은 왕궁에 계시는 동안 여기 머무르시게 될 것입니다.”
방은 공작의 침실보다도 더 넓어 보였다. 아체리아가 부담스러움에 사양하려 하자, 기색을 눈치챈 클라우스가 그녀의 등을 또 꾹, 찌르며 그만두라는 신호를 보냈다.
“클링 양은 어디까지나 필리파 왕녀님의 부름을 받아 오신 분이므로, 당연히 궁인들이나 시녀들이 할 만한 일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지만 왕녀님께서 말벗이 필요하실 수도 있겠지요. 모쪼록 방을 너무 오래 비우시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또한,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이 줄을 당겨 궁인들을 부르시면 됩니다.”
“알…… 알겠습니다.”
“비스몽트 공작님께서도 왕궁에 머무르실 예정이신지요?”
“그럴까 싶네만.”
타티아나는 별로 놀라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면 공작님께서는 맞은편의 방을 사용하시지요.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네.”
사이에 끼어 기분이 미묘해진 것은 아체리아였다. 거실 하나만 건너면 클라우스가 자고 있는 방이 있다니?
공작저에서는 늘 고용인 침실에만 머물렀으므로, 그와 같은 급의 방을 사용한다는 것이 영 이상했던 것이다.
‘아니. 그보다도, 집을 놔두고 왜 여기 머물겠다는 거람?’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왕녀님께서는 잠시 오수에 드실 예정이니, 공작님과 클링 양께서는 자유로이 쉬셔도 됩니다. 단, 왕녀님께서 손님들과 저녁 식사를 함께하고 싶다 하셨으니 저녁 시간까지는 돌아오시지요.”
“알겠네.”
클라우스가 대신 대답을 해 주었다. 타티아나가 나가고 난 뒤, 아체리아는 당황한 표정으로 클라우스를 쳐다보았다.
“왜 공작님까지 여기 머무시는 건가요?”
“뭐가 마음에 안 드나 보지?”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저택으로 돌아가셔도 되잖습니까.”
“내가 없는 동안 네가 무슨 실수를 저지를지 알고 돌아가?”
“절 감시하시겠다는 거예요?”
“대충 그렇지.”
대충 그렇다니. 그럼 정확히 말하면 뭔데!
“내가 여기 머문다고 해서 뭐 문제 되는 것도 아니잖아?”
“아니, 그거야 그렇지만…… 저택을 그렇게 오래 비우셔도 괜찮을지 모르겠는데요. 아무리 며칠이라도요.”
“호즈만이 알아서 할 텐데 무슨 상관이야.”
그렇게 말한 클라우스는 피곤하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침대에 몸을 누였다.
“공작님.”
“왜.”
“그거 제 침대예요.”
* * *
“아체리아가 왕성에 가요?”
릴리엇이 깜짝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도 필리파 왕녀님의 만찬을 준비하러 갔다고요? 세상에, 에른스트. 그게 정말이에요?”
“그럼 내가 널 붙잡고 거짓말이라도 하겠어?”
“맙소사.”
카드를 쥐고 있던 릴리엇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페터는 클로버가 그려진 4 카드를 하나 내면서 재미있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웃었다.
“공작저의 수석 요리장에서 이제는 왕녀의 요리사라. 클링 양의 몸값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뛰는 소리가 들리는군.”
“아체리아가 공작저를 떠나는 일은 없을걸.”
에른스트가 말하자 릴리엇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왜 그렇게 단언해요? 아체리아가 공작저에서 계속 일할 만한 재밌는 이유라도 있어요?”
“릴리엇, 네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데.”
“어머나, 숙녀에게 그런 말을 하다니. 실례예요.”
“빤히 보이는 걸 어떡해? 아체리아가 클라우스를 좋아해서 그런 거 아니냐, 지금 그걸 물어보려는 거 아니야?”
에른스트가 혀를 차며 웃자 릴리엇은 토라진 시늉을 하며 카드 패 하나를 뒤집었다.
“사람이 궁금할 수도 있는 거지.”
“아체리아가 진짜로 클라우스를 좋아하는 거라면 대사건인데. 릴리엇의 라이벌이 되는 건가?”
“페터 드라인!”
얼굴이 새빨개진 릴리엇이 탕, 소리가 나도록 테이블을 내리쳤다. 그럼에도 페터는 아랑곳하지 않고 낄낄거리며 웃어 댔다.
“왜, 맞잖아? 넌 클라우스를 좋아하니까.”
“옛날 얘기를 대체 언제까지 꺼낼 생각이야? 그게 도대체 언제 적 이야긴데!”
“그럼 지금은 아니라는 건가?”
에른스트까지 페터를 거들자 릴리엇은 정말로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고 말았다.
어릴 적, 그녀는 분명히 클라우스를 좋아했었다. 속앓이를 하다 못 참고 들이박듯 고백을 했다가 뻥 차였지만 말이다.
“클라우스랑 나는 이제 그냥 친구라고요. 숙녀가 자존심이 있지. 한 번 날 차 버린 남자한테 언제까지고 구질구질 매달릴까 봐?”
“어라, 우리 종달새 아가씨가 세게 나오시는데. 그럼, 클라우스가 너한테 구질구질 매달려도 안 받아 줄 생각이야?”
“흥, 클라우스는 그런 짓 하지 않을걸요. 그 사람이 여자한테 매달리는 걸 상상이나 할 수 있어요?”
릴리엇의 말에 에른스트는 묘한 미소를 띠면서 카드 패를 뒤집었다.
“글쎄, 언젠가는 그런 날도 오겠지.”
“에른스트, 당신 졌어요. 패가 끝났잖아요.”
“어, 이런. 언제 이렇게 됐지?”
에른스트가 아쉬운 소리를 내며 손에 들고 있던 패를 내려놓았다.
“난 꼭 기다리다가 지고 만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