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접시를 핥으세요, 공작님! (41)화 (41/144)

41화

요리사들의 저녁 식사는 뒤쪽에 있는 식당에서 이루어졌다. 아체리아는 다른 요리사들과 더불어 남은 빵이며 삼겹살 구이, 호박 스튜 같은 것으로 배를 채우고 행복한 기분이 되어 방으로 올라갔다.

남는 음식이라고 해도 공작저에서 사용하는 재료들은 호화로운 것들뿐이었다. 그런 것이 아체리아의 손을 거치면 더욱더 맛있는 요리가 되었다.

요즘은 수석 요리장인지라 아체리아가 직접 요리사들이 먹을 식사를 만드는 경우는 드물었지만, 요리사들이 만든 새로운 요리를 시식하고 같이 의견을 나누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었다.

“아체리아, 잠깐만.”

계단을 오르려던 예시카가 아체리아를 불렀다.

“왜 그래요, 예시카?”

“공작님께 차를 가져다 드리려고 하는데, 뭐 때문인지 기분이 별로 좋지 않으신 모양이야. 네가 좀 가져다 드리도록 해.”

예시카가 쟁반을 내밀자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 든 아체리아는 픽,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기분 안 좋은 게 하루 이틀 일이에요?”

“그렇긴 하지만, 요즘은 네가 공작님을 아주 솜씨 좋게 잘 다루잖아.”

“공작님이 무슨 식칼도 아니고 다루긴 내가 뭘 다뤄요?”

“잔말 말고 얼른 가 봐. 차 식으면 또 노발대발할라.”

“에이, 참…….”

“얘는, ‘에이, 참’ 같은 소리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니래도. 자, 자! 얼른! 부탁한다?”

예시카가 잔소리를 하자 아체리아는 별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쟁반을 들고 그의 침실로 올라갔다.

방 안에는 그와 호즈만 집사장이 같이 있었다. 분위기가 그다지 좋지만은 않은 것으로 보아, 불똥이 튀기 전에 빨리 나가는 것이 상책일 성싶었다.

아체리아가 슬그머니 쟁반을 내려놓고 나가려 하는 순간, 클라우스의 고개가 뒤로 휙 돌아갔다.

“기다려.”

그러면 그렇지.

아체리아는 돌아선 채 한숨을 폭 쉬고는 표정을 고치며 얼른 공손한 태도를 꾸며 냈다.

“부르셨습니까?”

“왜 네가 차를 가져와?”

“하녀장님께서 갑자기 배탈이 나신 것 같아서요.”

아체리아의 대답에 클라우스의 눈썹이 삐딱하게 올라갔다. 그가 손짓을 하자, 호즈만은 그의 책상 옆에 놓여 있던 편지 한 장을 손에 쥐고 방 밖으로 나갔다.

졸지에 침실 안에 그와 둘만 남게 된 아체리아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슬그머니 문을 가리켰다.

“하실 말씀이 없으시다면 저도 이만…….”

“앉아.”

정말 사람 귀찮게 하는 데에 뭐가 있다니까.

아체리아는 속으로 툴툴거리면서 등받이 없는 스툴 하나를 끌어다 앉았다.

“방금 호즈만이 가지고 나간 편지가 누가 보낸 건 줄 알아?”

클라우스의 질문에 아체리아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저야 모르지요.”

“에른스트의 편지야. 정확히는 필리파 왕녀로부터 온 거라고 해야 하겠군.”

“필리파 왕녀라면…… 두 분이 같이 만나러 가셨던 그 왕녀님 말씀이신가요? 그런데…….”

왜 그런 얘길 나한테 하지? 아체리아의 표정이 더욱더 의혹 속으로 빠져들었다.

“필리파 왕녀가 너를 좀 빌리고 싶다는군.”

“……네?”

“저녁 모임을 가질 예정인데, 거기에서 네가 요리를 해 줬으면 좋겠다고 한다는 말이야. 이해가 됐나?”

“아니, 잠깐…… 잠깐만요. 왕궁에 그렇게 많은 요리사들이 있는데, 하필이면 저를요? 대체 왜요?”

“그건 왕녀한테 가서 직접 물어봐.”

클라우스는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연신 툴툴대는 듯한 어조였다.

사실, 그는 필리파 왕녀가 아체리아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 자체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심지어 누가 오는지도 모르는 저녁 모임에 자신까지 초대를 하다니! 벌써부터 골치 아픈 일이 눈앞에 산적한 풍경이 보이는 듯했다.

“대체 언제요?”

“나흘 뒤에.”

“나흘 뒤요? 너무 이르잖아요! 저녁 모임이라면 만찬인데, 그럼 메뉴도 생각해야 하고, 누가 오는지도 알아야 하고…….”

“그것도 왕녀에게 물어봐야 하겠지. 아무튼, 내일 당장 왕궁으로 가야 할 테니까 그렇게 알아.”

“내일 당장?!”

아니, 대체 무슨 일을 이렇게 번갯불에 콩 볶듯이 하는 거람?

그보다 왕녀를 만나러 갈 때는 뭘 입어야 하는 거지? 머리는 풀어야 하나, 묶어야 하나? 신발은? 다 해진 가죽신 같은 걸 신고 가도 되는 건가? 아가씨들이 신는 구두 같은 게 나한테 있을 리 없잖아!

아체리아가 속으로 머리를 싸매고 있는 동안, 클라우스는 그 속을 빤히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말했다.

“왕궁에 가기 전에 네 옷과 신발부터 어떻게 해야겠군. 머리도 좀 만져야 할 테고.”

“아, 아니. 하지만…… 대체 어떻게…….”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도록 해. 바빠질 테니까. 그만 나가 봐.”

자기 할 말만 마친 클라우스는 찻잔에 설탕을 약간 넣어 마시면서 아체리아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휘청거리듯 그의 침실을 빠져나온 아체리아는 무슨 정신인지도 모르게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 침대에 풀썩 드러누웠다.

“왕녀의 저녁 모임이라니…….”

문득, 왕궁에서 만났던 라티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실력을 제대로 보지는 않았지만 그도 역시 솜씨 좋은 인물일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득시글거리는 왕궁에 살면서, 굳이 공작저의 요리사를 탐낼 건 뭐람?

“왕족이라면, 귀족보다 입맛이 더 까다로운 거 아닐까?”

클라우스보다 입이 까다로운 사람이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그가 접시를 싹 비우도록 만들기 시작한 것도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인데.

만약 내 음식이 마음에 차지 않으면 감옥에 가둬 버리거나, 뭐 그러는 게 아닐까?

“왜 이렇게 자꾸 귀찮은 일만 생기는지 모르겠네.”

힘없이 중얼거린 아체리아가 베개 위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 * *

그토록 불평을 했으면서도 아체리아는 결국 클라우스의 말대로 아침 일찍 일어났다. 평소보다 한 시간이나 더 빨리 일어난 것이다.

“공작님께서 일찍 일어나셨어요, 얼른얼른 움직여요!”

다른 요리사들도 아체리아가 일어난 소리를 들었는지 평소보다 더 빨리 주방으로 내려왔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것은 역시 락케 패거리뿐이었는데, 아무도 그들에게 신경을 쓰는 사람은 없었다.

“아침 식사는?”

“간단하게 준비하죠. 전분이 많은 감자가 어떤 거더라? 아, 여기 있구나. 이걸 수프에 넣어서 좀 더 걸쭉하게 끓이고, 빵은 살짝 굽죠. 버터는 향이 강한 걸로 준비해요. 아, 아니! 그 수프에 넣으라는 게 아니에요!”

아체리아는 요리사들의 움직임을 주시하는 한편, 자신이 해야 할 일도 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마침내 오늘의 재료들이 들어오기 시작할 무렵, 로널드 락케가 바키와 듀켄과 더불어 드디어 주방에 모습을 드러냈다.

“락케, 좀 더 일찍 나오도록 했어야지. 주방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을 텐데?”

아체리아가 핀잔을 주었다. 락케는 속이 부글부글 끓는 얼굴을 해 보이면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오늘은 소고기가 신선하네요. 음, 이걸로 찜을 만들어도 좋겠어. 그리고 곁들일 것은…….”

“요리장님, 제가 옮길게요.”

요아킴이 톡 튀어나와 아체리아의 일을 거들자 바키와 듀켄이 그를 향해 눈을 흘겼다.

그러나 요아킴은 이제 더 이상 그들의 시선에 주눅 들지 않았다. 다른 요리사들이나 마찬가지로 요아킴이 자신들을 없는 사람 취급하듯 스쳐 지나가자, 듀켄이 툽툽한 입술을 심술궂게 실룩였다.

“오늘 저녁부터는 제가 없을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프레드가 다른 요리사들을 지휘해서 공작님의 식사를 챙기도록 하세요.”

연회 이후, 락케 대신 부주방장으로 승진한 프레드가 의아한 얼굴로 아체리아를 보았다.

“아니, 왜요? 어디 가는 거예요?”

“음, 네. 자리를 비우게 될지 모르겠어요.”

“요리장님, 어디 가시는데요?”

“왕성의 왕녀님이 날 좀 필요로 하신대서.”

“왕녀님이요? 와! 요리장님의 요리 솜씨가 거기까지 소문이 난 거예요?”

요아킴이 해맑게 좋아하자 프레드가 그의 이마를 쥐어박는 시늉을 했다.

“재료에 침 튀기지 말고 가서 버터 세팅이나 해.”

“앗, 헤헤. 네.”

요아킴은 아체리아에게서 동경하는 눈길을 떼지 않은 채 버터를 가지런히 썰기 위해 주방 구석으로 갔다. 그들의 말을 듣고 있던 락케의 입가가 교활한 모양으로 삐딱하게 움직였다.

“왕녀님이라니, 출세했는걸?”

프레드가 슬쩍 농담을 하자 아체리아가 장난스럽게 눈을 흘겼다.

“부러우면 프레드 씨가 대신 가지 그래요?”

“무서운 소리 하지 마. 난 우리 공작님 시중만으로도 충분히 살벌하다 생각하는 새가슴이라고.”

“어머, 그럼 나는 담이 크다는 거예요?”

“네 담이라면 여기 있는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사실 아니었어?”

프레드가 짓궂게 말했다.

클라우스는 그날따라 다소 입맛 없는 표정으로 아침 식사를 마쳤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그가 좋아할 만한 메뉴로 채워져 있었지만, 필리파 왕녀에게 아체리아를 데려가야 한다는 것이 그의 마음을 이상할 정도로 무겁게 만들었다.

그는 정치에 깊이 관여하지는 않지만 왕궁이 얼마나 복잡하고, 또 얼마나 트집을 잡히기 좋은 공간인지 알고 있었다.

설상가상 필리파가 저녁 모임을 주최한다? 그 사실만으로도 아마 석 달 열흘은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릴 것인데, 거기에 요리를 내놓을 메인 요리사로 아체리아가 선택되었다는 것이 그는 정말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클라우스는 아체리아를 마차에 태워 이제 막 사람들이 웅성대기 시작한 번화가로 데려갔다. 향신료를 파는 시장이나 음식 재료를 살 수 있을 만한 상점가는 아체리아도 많이 돌아다녔지만, 마차가 멈춘 곳은 아체리아가 혼자서는 별로 올 일이 없는 장소였다.

“옷 가게잖아요?”

아체리아의 질문에 클라우스는 그럼 어디로 데려올 줄 알았냐는 듯이 그녀를 힐끔 바라보았다.

“왕족을 만날 때는 거기에 걸맞은 복장이 있어.”

“에른스트 님도 따지자면 왕족이시잖아요. 에른스트 님을 뵐 때는 한 번도 이런 치렁치렁한 걸 걸친 적이 없는데요?”

“에른스트는 왕족이기 이전에 내 친구니까 상관없지. 하지만 그의 집으로 저녁 식사를 하러 갔던 날을 생각해 봐. 그때도 치렁치렁한 걸 입고 갔었잖아.”

그랬지, 참.

아체리아는 그때 입었던 붉은 드레스를 새삼스럽게 상기했다. 더불어 에른스트의 저택에 잠시 머물렀을 때 입었던 드레스도.

다시 생각해도 얼굴이 홧홧해지는 일이었다. 평소에 그런 복장에 익숙지 않다 보니 그런 것이다.

“안심해. 오늘은 붉은 드레스는 안 입힐 테니까.”

클라우스가 약간 심술맞게 말했다. 그가 앞서서 가게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체리아는 뒤늦게 그를 따라 들어가면서 입 모양만으로 ‘심술쟁이’ 하고 소곤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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