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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시를 핥으세요, 공작님! (40)화 (40/144)

40화

에른스트와 필리파는 대공저에서 체스판을 사이에 둔 채 마주 앉아 있었다.

여간해서는 궁 밖으로 나오는 일이 없는 필리파가 남들의 눈을 피해 대공저로 왔다는 것은 그만큼 긴밀한 사정이 있기 때문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러나 필리파는 좀처럼 본론을 이야기하려 하지 않았다.

“사촌께서 체스를 잘 두신다는 소문을 건너 들었는데, 오늘은 왠지 집중을 못 하시는 것 같군요.”

필리파가 말했다. 에른스트는 일부러 난감하다는 듯한 웃음을 입가에 띠면서 턱을 괴었다.

“누이의 실력이 저보다 월등하게 뛰어난 거지요.”

“그럴까요?”

필리파의 말이 딱, 소리와 함께 앞으로 전진했다. 에른스트는 잠시 눈으로만 체스판을 훑다가 폰 하나로 그녀의 말을 잡아냈다. 필리파의 눈썹이 살짝 찡그려졌다.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은데요.”

필리파가 말했다.

“누이가 집중력을 잃었을지도 모르는 거고요. 체크.”

에른스트의 말에 필리파의 눈이 두어 번 깜빡였다. 에른스트는 그녀의 완고한 눈매와 입술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자신의 비숍 위에 손끝을 얹은 채 양쪽으로 천천히 까딱거리고 움직였다.

“절 기다리고 계시진 않았나요?”

“누이를요?”

“그래요. 일전에 비스몽트 공작과 함께 저를 찾아오신 후, 제가 내내 조용했으니 궁금해하실 것 같다고도 생각했습니다만.”

“그야 그랬지만 굳이 기다리지는 않았어요.”

“별로 욕심이 없으시군요.”

“내 깜냥을 잘 안다고 해 두죠.”

그때 필리파가 다시 에른스트의 말을 잡아냈다. 순식간에 오도 가도 못 하게 된 수를 내려다보던 에른스트는 인상을 찌푸린 채 웃고는 양 손바닥을 내보이며 미소를 띠었다.

“졌어요.”

“포기가 빠르시네요.”

“내 깜냥을 아는 거라고 했잖아요.”

필리파는 흥미 없다는 표정으로 체스의 말을 하나씩 아래로 내려놓았다.

“비스몽트 공작을 쓰시겠다는 생각은 여전한가요?”

에른스트의 질문에, 필리파는 감정 없는 눈으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의혹의 감정도, 대답하고자 하는 의지도 없는 눈이었다.

“제가 그러면 안 될 이유라도 있는 건 아니겠지요?”

“물론 안 될 이유는 없죠. 누이가 하시기 나름이겠습니다만…….”

에른스트가 말끝을 흐리자, 필리파는 다음 말을 기다리는 듯이 조용히 눈을 깜빡였다. 잠시 침묵하고 있던 에른스트가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는 비스몽트 공작이 누이에게 새로운 힘이 되어 줄 거라 생각하시는 것 같지만, 제 판단에는 그것과는 다른 이유가 있지 않나 싶어서요.”

“가령?”

“가령…… 글쎄요, 폐하의 의중을 어느 누가 감히 짐작할 수 있겠느냐마는, 누이께서 혹시 폐하께 비스몽트 공작을 천거하신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제가 왜 그럴 거라 생각하시지요?”

“누이께서 비스몽트 공작이 결코 보수파 쪽으로 돌아서지 않을 것을 알고, 폐하의 어심을 역으로 이용하신 건 아닌지요?”

필리파는 웃는 듯 마는 듯 입매를 당기면서 미지근하게 식은 찻물을 한 모금 삼켰다.

“상상력이 풍부하시네요, 대공.”

“긍정인가요, 부정인가요?”

“그걸 제가 여기서 밝혀야 할 이유는 없죠. 하지만, 그래요. 궁금하시다면야. 제가 폐하께 비스몽트 공작을 직접 천거하진 않았어요. 하지만 사촌께서 말씀하신 대로 제가 폐하께서 바라시는 바를 역으로 이용하고자 한 것은 맞습니다.”

“폐하께서는 그럼 진실로 비스몽트 공작이 누이에게 도움이 되리라 보시는 거군요.”

“아바마마는 병으로 인해 판단력이 많이 흐려진 상태세요. 지금의 비스몽트 공작과, 그의 외조부였던 17대 비스몽트 공작을 명확히 분간하고 계시는지도 사실 의심스러울 지경이죠. 아바마마께서는 비스몽트 공작이 흩어진 보수파의 새로운 구심점이 되어 줄 것이라 믿고 계세요. 그가 외조부의 피를 이어받았다고 생각하고 계시죠.”

비스몽트 공작가는 클라우스의 외조부 대까지는 보수파의 강력한 축이었다. 그러나 18대 비스몽트 공작, 즉 클라우스의 아버지가 데릴사위로 들어와 새로운 공작이 되면서부터는 더 이상 보수파의 핵심이 되지 못했다.

사위가 보수파를 지지하지 않는 것을 안 17대 비스몽트 공작은 노발대발했지만,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사람이 두루뭉술하던 18대 비스몽트 공작은 무슨 일인지 보수파를 지지하는 것만큼은 강하게 꺼렸다.

옹서翁壻간의 관계가 그토록 나빠진 데에는 정치적인 이유가 큰 지분을 차지했었다.

“18대 비스몽트 공작은 있는 듯 없는 듯한 인물이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저도 어렸을 때라 잘은 모르지만요.”

필리파가 말했다.

“하지만 아바마마의 믿음과 달리, 저는 비스몽트 공작이 결코 그의 외조부와 같은 길을 걷진 않을 거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죠, 누이는?”

“만약 그가 외조부의 의지를 따르려 했다면 자신이 공작이 된 이후부터 부친의 중도적인 행보부터 지워 버리려 했을 테니까요.”

“확신하고 있군요.”

“비스몽트 공작가가 전면에 나서 보수파를 끌어모으고자 한다면 꽤 많은 인물들이 거기에 걸려들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그럴 수 있는 많은 기회를 여태까지 흘려버렸어요.”

“…….”

“그 점만 보아도 비스몽트 공작이 외조부의 행보를 따라가지 않으리라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죠.”

“때를 기다리고 있는 건지도 모르잖아요?”

“정말 그런 거라면 어리석은 거지요. 저 역시 사람을 잘못 봤다 할 수 있겠군요.”

에른스트는 필리파의 단정적인 말에 웃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현재 클라우스의 상태로 본다면 필리파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것이었다.

클라우스가 외조부의 행보를 따라가지 않으려 한다는 것은 그녀가 옳게 본 지점이다. 그러나 클라우스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생각도 전혀 없을 것이라고 에른스트는 생각했다.

이왕 필리파를 지지하겠다고 서약을 했으니, 아마 그녀가 필요로 하는 것을 들어주려 노력은 하겠지만 클라우스 그 자신이 주체가 되어 앞으로 나서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

그동안 에른스트가 보아 온 클라우스의 모습으로는 그런 일을 상상하는 것이 어려웠다.

“참, 그런데 말이죠.”

필리파가 다시 말했다.

“그때, 비스몽트 공작저에서 열었던 연회…… 어떤 요리사가 요리를 했지요?”

“두 요리사가 한꺼번에 요리를 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재미있던 쪽이요.”

재미있던 쪽. 에른스트는 픽 웃으며 손바닥 안에서 체스 말을 쥐락펴락했다.

“아체리아를 말씀하시는 거로군요.”

“아체리아라…… 성은?”

“클링입니다. 아체리아 클링. 공작저의 수석 요리장이죠. 왜 그러십니까?”

“간단한 저녁 모임을 가져 볼까 하는데, 솜씨 좋은 요리사가 한 명 필요해서 말이에요.”

필리파가 말했다.

“공작이 그녀를 빌려주려 할지 모르겠습니다.”

에른스트의 대답에 필리파의 눈썹이 살짝 솟았다.

“왜죠?”

“음, 그 까다로운 입맛에 맞는 요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체리아밖에 없어서요.”

“그럼 비스몽트 공작도 그날 내 궁으로 와서 저녁 식사를 하고 가면 되겠네요. 그럼 문제없겠죠?”

“아, 뭐…… 그야 그렇겠지요.”

“그 요리사를 하루나 이틀쯤 빌리고 싶다고 전해 주세요.”

마치 아랫사람에게 명령을 하듯 무미건조하게 말한 필리파가 몸을 일으켰다. 에른스트도 그녀를 따라 일어섰다.

“가십니까?”

“사촌께 할 말은 다 했으니까요.”

“질문을 하나 드리고 싶습니다만. 허락하신다면요.”

필리파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의 의미였다.

“누이는 왜 국왕이 되려 하십니까?”

“솔직한 대답을 원해요? 아니면 누이로서의 대답을 원해요?”

“솔직한 대답을 원합니다.”

에른스트가 말했다. 필리파는 잠시 그의 의중을 가늠하는 듯 말을 않고 있다가, 가냘픈 두 어깨를 들썩이면서 턱을 살짝 치켜들었다.

“그야 내가 적임자니까요.”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훨씬’ 정도로는 부족하지요. 나만이 유일한 적임자라고 해 둘게요.”

“정말 솔직한 대답이군요. 만약 내가 다른 왕자나 왕녀를 돕고 있다면 위험한 발언이 됐을 겁니다.”

에른스트가 짓궂은 표정으로 말하자 필리파는 접은 부채 끝으로 입가를 톡톡, 두드리면서 고개를 돌렸다.

“사촌께서는 그런 분이 아니시리라 믿어요.”

“왜 그렇게 생각하죠?”

“그런 줄타기는 귀찮은 일이죠. 만약 사촌께서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뭔가를 이뤄 내고자 하는 욕심이 있으셨다면, 아까 체스에서 그런 수를 두시진 않았을 테고요. 대답이 되었나요?”

도도하고, 어딘지 강압적인 분위기마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에른스트는 다시 한번 졌다는 표정으로 콧잔등을 찡그린 채 웃으면서 필리파를 배웅했다.

“‘아체리아를 빌리고 싶다’라…….”

떠나는 마차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에른스트가 중얼거렸다.

“빌리는 역할은 내 몫이 됐군. 은근슬쩍 귀찮은 일을 잘도 떠넘기는 걸 보면 국왕감은 국왕감이네.”

* * *

‘순무와 건자두를 곁들인 삼겹살’은 아체리아의 말대로 클라우스에게 호평을 받았다.

물론 그가 입 밖으로 ‘맛있다’고는 말하지 않았지만, 접시 하나를 다 비운 것만으로도 그의 의도는 아체리아에게 충분히 전달이 되었다.

로널드 락케는 콧노래를 부르며 뒷정리를 하는 아체리아를 잡아먹을 듯한 눈으로 쏘아보다가 주방을 팩 나가 버렸다. 그러나 이미 아체리아의 말만을 충실하게 따르게 된 요리사들은 락케가 무슨 패악을 부리든지 더 이상 그의 눈치를 살피지 않았다.

“요리장님, 접시 정리 끝났어요.”

그중에서도 아체리아의 말을 가장 잘 듣게 된 것은 요아킴이었다. 아체리아가 시키는 것은 뭐든지 따르게 된 뒤로, 그는 조금씩 주방 일에 관여할 수 있게 되었다.

“좋아. 오늘 쓰고 남은 채소는 네가 가져다가 썰기를 연습해 봐. 아니면 남은 것들로 수프를 만들어 봐도 좋아.”

“네? 정말로요?”

불을 써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 것은 처음이다. 요아킴이 설레는 표정을 짓자 아체리아는 그의 어깨를 격려하듯이 툭툭, 두드려 주었다.

“슬슬 불 다루는 법도 익혀야지.”

“감사합니다, 요리장님!”

“잘 만들면 남겨 뒀다가 내일 아침에 다 같이 먹어도 좋고. 그러니까 한번 해 봐. 알겠지? 모르는 게 있으면 물어보러 오고.”

“네!”

신난 요아킴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아체리아는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주방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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