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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시를 핥으세요, 공작님! (31)화 (31/144)

31화

어스름히 노을이 질 무렵, 공작저의 문이 열리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손님들이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선대 비스몽트 공작이 살아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이곳에 발을 들여 본 일이 없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최근 사교계에 데뷔한 이들 중에는 오늘이 소문만 무성한 공작저를 처음으로 구경해 보는 날인 사람들도 있었다.

“세상에, 그토록 세월이 흘렀는데도 변함없이 아름다운 성이네요!”

“비스몽트 공작가의 재산이 어디로 흘러간 것도 아니니까요.”

“새 공작님은 몸이 무척 약하다고 들었는데, 이렇게 꾸미신 걸 보면 그렇지도 않은가 봐요?”

“몸이 약한 거랑은 상관없죠. 하지만 센스가 참 좋은 분인 것만은 확실하네요. 꽃향기가 아주 은은해서 기분이 좋아져요.”

클라우스는 에른스트와 함께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난간에 기대어 서 있었다.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이 저마다 왁자지껄하게 입방아를 찧어 대는 것을 보고 있던 클라우스가 냉소적인 웃음을 입가에 띠었다.

“신들이 나셨군.”

“당연하지.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금단의 성이었잖아. 가십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더없이 달콤한 먹잇감이 아닐까?”

“흥.”

“네가 오늘 이 연회를 왜 열었는지 알면 저 사람들이 더 신나 할걸.”

에른스트의 말에 클라우스의 눈꼬리가 삐죽하게 치켜 올라갔다.

“무슨 뜻이야?”

“몰라서 물어? 아체리아 때문에 열게 된 거잖아. 안 그래?”

“하도 졸라 대니 귀찮아서 자리를 마련해 주었을 뿐이야.”

“나라면 안 그랬어.”

에른스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었다.

“안 그랬을 거라고?”

“그래. 나라면 아체리아를 못살게 군다는 그 요리사를 당장 해고하고 말았을 거야.”

“기사님 납셨군.”

“방향성은 다르지만 자네도 마찬가지잖아? 아체리아가 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이런 연회를 연 거 아니야?”

“너랑 똑같이 취급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는데. 난 그 시건방진 녀석에게 요만큼도…….”

관심이 없다, 그런 말을 하려던 클라우스의 입이 순간적으로 다물렸다.

에른스트는 그 모든 변화가 웃기고 흥미로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초조했다.

처음 클라우스가 아체리아를 대하는 태도가 미묘하게 달라졌음을 안 날은, 자신이 그 둘을 대공저로 초대한 날이었다.

붉은 드레스를 입은, 몰라보리만치 눈부시게 아름다운 아체리아를 바라보는 클라우스의 눈빛이 지금까지와는 다르다는 것을 가장 먼저 알아챈 사람이 에른스트였다.

그 이후로 클라우스가 부쩍 아체리아와 가까이 지내는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것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그게 다 변덕일 거라 생각했는데…….’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클라우스는 성미가 까다로운 만큼 호불호가 지나칠 정도로 분명했으며 싫증도 잘 내고, 변덕도 심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싫어하던 장난감을 오늘은 세상에 둘도 없다는 듯이 아끼는가 하면, 다음 날이 되면 질렸다며 팽개치기 일쑤였다.

아체리아를 대하는 태도 역시 그런 변덕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여겨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오늘 클라우스의 반응을 보면 지금까지의 변덕과는 조금 다른 경향성을 띠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이 녀석과 경쟁하는 건 별로 내키지 않는데 말이야.’

에른스트가 생각했다. 클라우스는 그가 자신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에 관심이 없었다. 아체리아를 떠올렸다가, 북적대는 사람들을 보았다가, 마치 제집이 아닌 것처럼 화사하게 꾸며진 공작저의 홀을 내려다보면서 클라우스의 얼굴은 점점 피로에 젖어 갔다.

“벌써 그런 표정 지으면 나중에는 어떡하려고?”

에른스트가 짓궂게 말하자, 클라우스의 눈썹이 삐딱하게 솟구쳤다.

“놀리는 거야, 걱정을 해 주는 거야? 하나만 해.”

“한 끗 차이지. 아, 저기 봐. 릴리엇이 왔군.”

그 말대로였다. 릴리엇은 마치 알록달록한 작은 새처럼 화사하게 치장을 한 채 내달리듯이 공작저의 홀 안으로 들어오고 있는 중이었다. 부산하게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것을 보아 클라우스가 어디 있는지 찾고 있는 듯했다.

“내려갈까? 저러다 네 이름을 고래고래 외치기 전에 말이야.”

“란츠호프 후작가의 교육 방침을 너무 우습게 보는 거 아니야?”

“후작이 아무리 교육을 잘 시킨들 릴리엇은 릴리엇이니까.”

두 사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나란히 계단을 내려갔다.

홀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계단을 내려오는 두 청년을 보고는 일제히 고개를 숙이거나 허리를 굽혔다.

병약하다느니 어떻다느니, 무성한 소문이야 어쨌든 클라우스는 에른스트를 제외하면 이 나라에서 가장 높은 귀족 중 한 사람이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클라우스! 에른스트!”

릴리엇이 마치 종달새처럼 높은 소리로 그들을 부르며 다가왔다. 에른스트가 그것 보라는 듯 콧잔등을 찡그리며 미소를 띠었다.

“세상에, 멋지게도 차려입었네요. 클라우스가 제대로 예복을 차린 걸 대체 몇 년 만에 보는 거람?”

“릴리엇, 목소리가 너무 커.”

에른스트가 다정하게 나무라듯 말했지만 릴리엇은 개의치 않고 클라우스의 팔짱을 착 꼈다.

“뭐 어때요. 드디어 비스몽트 공작저가 사람들을 향해 마음의 문을 활짝 연 날인데. 다들 떠들고 싶어서 입들이 간질간질할걸?”

“연회 한 번 가지고 마음의 문 운운하기에는 너무 이르지. 들어가자고.”

주인인 클라우스가 가장 먼저 안쪽으로 입장했다. 저녁 식사에 정식으로 초대된 귀족만 해도 줄잡아 몇십 명은 되었지만, 공작저의 연회용 식당은 무척 넓어서 그 인원을 전부 수용할 수 있었다.

“멋지게 꾸며진 테이블이네요!”

“어떤 요리가 나올지 무척 기대되네요.”

“오늘은 두 요리사의 음식이 동시에 나온다면서요?”

사람들은 각자 좋을 대로 떠들어 대면서 자신의 이름이 적힌 자리를 찾아 앉았다. 대공인 에른스트가 주빈 대접을 받아 가장 상석에 앉았고, 그 오른쪽이 클라우스, 왼쪽이 릴리엇의 자리였다.

사실 란츠호프 후작가보다도 위상이 드높은 귀족들이 몇몇 있기는 했지만, 릴리엇이 대공의 왼쪽에 앉는 것에 대해 아무도 함부로 입을 뗄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들 중에는 릴리엇이 장차 대공비가 되거나 아니면 비스몽트 공작 부인이 될 거라 믿는 이들이 많았다. 정작 에른스트나 클라우스는 단지 릴리엇을 어릴 때부터 봐 온 여동생 정도로밖에 생각하고 있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 빈자리는 누구 자리야?”

릴리엇이 물었다. 에른스트의 옆에 자리가 하나 더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자리에는 이름표가 없었다.

“비밀이야.”

에른스트의 말에 릴리엇은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뒤늦게 도착한 페터의 자리는 릴리엇의 바로 옆자리였다. 왜 이렇게 늦었느냐며 릴리엇이 면박을 주는 동안, 사람들의 착석이 얼추 끝나자 클라우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초대에 응해 주신 여러분들을 모두 환영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그는 기대에 찬 좌중을 한 번 돌아보았다. 앉아 있는 사람들, 특히 몇몇 아가씨들 사이에서는 탄식 같은 한숨 소리가 터져 나오기도 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는 미소 한 번 지어 주지 않았다.

“말씀드린 바와 같이, 오늘의 연회는 공작저의 두 요리사가 각자 솜씨를 펼치는 경연 자리입니다. 부디 즐겨 주시기 바랍니다.”

그게 끝이었다. 공작이 된 후 처음으로 연회를 열어 사람들을 초청한 것에 대한 장황하고도 거창한 인사말을 기대했던 이들은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약간은 떨떠름한 박수 소리와 더불어, “역시 이런 자리를 싫어한다는 게 사실이었던 모양이에요”라는 소곤거림이 들려왔다.

클라우스는 자신을 둘러싼 수군거림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왠지 긴장이 되었던 것이다.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체리아가 이들을 전부 만족시킬 수 있을지 슬그머니 걱정이 되었다.

클라우스가 눈짓을 하자 곁에 서 있던 호즈만이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주방 쪽을 향해 울릴 종을 꺼내 들었다. 그가 종을 치려는 순간, 홀과 면해 있는 입구의 문이 갑자기 다시 열렸다.

“레이넌의 왕녀, 아르베른 후작이신 필리파 하르모네 레이넌 전하 드십니다!”

놀라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구름처럼 부풀었다.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은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나기 바빴다. 그리고 그것은 릴리엇과 페터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필리파 왕녀께 초대장을 보냈어?”

릴리엇이 조그만 목소리로 속삭였다. 클라우스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테이블 사이로 나가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왕녀를 향해 궁정식 절을 해 보였다.

“필리파 왕녀님을 뵙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내가 올 걸 알고 있었던 것 같은 반응이로군요?”

무심한 목소리로 말한 필리파의 시선이 미끄러지듯이 에른스트를 향했다. ‘네가 말해 주었니?’라고 묻는 듯했다.

“그렇다고도, 그렇지 않다고도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자리는 아무 데나 좋아. 축객령만 내리지 않는다면.”

“전하의 자리는 마련되어 있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필리파의 단정한 눈썹이 처음으로 작게 움직였다.

“듣던 것과는 다르군, 비스몽트 공작.”

클라우스의 에스코트를 받아 걸으며, 필리파가 조용하게 말했다.

“전하께서도 소문과는 다르신 분인 것 같습니다.”

클라우스가 지지 않고 받아쳤다. 필리파는 보일 듯 말 듯하게 입꼬리를 비스듬히 끌어올리고, 비어 있던 에른스트의 옆자리에 앉았다.

필리파가 착석하자 다른 귀족들도 다시 자리에 앉았다. 어리둥절한 얼굴들이 낮게 소곤거리는 것을 보면서도, 필리파의 낯빛은 전혀 변함이 없었다. 연회에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수수한 옷차림도 여전했다.

“오랜만이군요, 에른스트.”

“오랜만에 뵙습니다, 사촌누이.”

필리파는 올해 스물세 살로, 아체리아와 같은 나이였다. 즉, 클라우스나 에른스트보다는 세 살이 어리다. 그럼에도 그녀를 대하는 에른스트의 어조는 깍듯하기 그지없었다. 평소의 장난기 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도 않았다.

“오늘 내가 이곳에 온다는 걸 공작에게 알려 준 사람이 에른스트로군요.”

“오랜 친구가 너무 당황하지 않도록 도와준 것뿐이니 너무 노여워 말아요.”

“노엽긴요. 그런 우정이 있다는 게 부럽군요.”

필리파의 목소리에서는 단 한 줌의 진심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껍데기만 남아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비로소 종소리와 함께 시종들이 음식을 서빙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입이 딱 벌어진 것은 그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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