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접시를 핥으세요, 공작님! (30)화 (30/144)

30화

연회 당일, 비스몽트 공작저는 아침부터 부산스러웠다.

온갖 꽃이며 장식들이 새로 배달되어 왔고, 연회가 열릴 메인 홀을 치우는 하인들은 새벽같이 일어나 먼지를 턴 자리를 또다시 쓸고, 닦았다.

그러나 주방의 요리사들만큼 전투적으로 일을 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아체리아는 동이 트기도 전에 일어나 마지막으로 소스와 육수를 끓이고, 싱싱한 재료를 받고, 음식 순서들을 한 번 더 점검하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정작 주인인 클라우스만이 하루 종일 뚱할 뿐, 호즈만 집사장까지도 간만에 소란스러운 공작저의 분위기가 무척 마음에 드는 듯했다.

“그 꽃은 오른쪽에 놓고, 아니지! 화병은 일렬로 정리하라고 말하지 않았나!”

호즈만이 시종들에게 잔소리를 하는 동안, 클라우스는 계단 위에 서서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 그의 머릿속은 온통 아체리아에 대한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만약 오늘의 경연에서 아체리아가 이기지 못하면, 그녀를 정말 수석 요리장의 자리에서 물러나도록 해야 하는가, 에 대한 생각이었다.

“호즈만.”

고개를 든 호즈만이 퍼뜩 놀라며 허리를 숙였다.

“공작님, 나와 계셨습니까?”

“가서 아체리아를 좀 불러와. 내 방으로.”

“아체리아를요? 지금 말씀이신지요?”

“지금 바로. 당장.”

“알겠습니다.”

나이 든 호즈만이 허둥지둥 주방 쪽으로 달려가는 것을 본 클라우스는 작게 한숨을 쉬며 방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부름을 받은 아체리아가 방으로 올라왔다. 바쁜 와중에 왜 부르냐는 불만스런 표정이 얼굴에 가득했다.

“어떤 용건으로 부르셨습니까, 공작님?”

클라우스는 순간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가 망설이는 잠시의 틈도 아깝다는 듯, 아체리아는 마음이 급한 얼굴로 슬그머니 문을 향해 몸을 돌렸다.

“용무가 없으시다면 저는…….”

“잠깐 기다려.”

클라우스의 말에 주춤주춤 움직이던 아체리아의 몸이 뚝 멈추었다. 못마땅한 기색을 애써 감추려는 표정을 보고 있던 클라우스는 속으로 헛웃음을 치면서 턱을 괸 채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만약에 오늘 네가 진다면.”

“…….”

“어떻게 할지 생각은 해 봤나?”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바빠 죽겠는데!’

“공작님, 뭘 생각해 보았냐는 말씀이신지요?”

“네가 지면 수석 요리장 자리를 정말 락케에게 내어놓을 생각이냔 말이야.”

이 이야기를 지금 왜 꺼내는 걸까. 아체리아는 아몬드색 눈동자를 천천히 굴리다가 입술을 일자로 당겼다.

“그렇습니다.”

“정말로?”

“약속은 약속이니까요.”

아체리아의 단호한 대답에 클라우스는 답답하다는 듯이 잠시 고개를 돌렸다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난 락케의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다고.”

훗날, 아체리아는 이 순간을 기억할 때마다 웃음을 짓곤 한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클라우스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을 할 여력이 없었다. 아체리아는 결국 이렇게밖에 대답할 수 없었다.

“지지 않도록 할 거예요.”

클라우스가 가만히 아체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반드시 이겨서, 공작님께서 입에 맞는 식사를 하실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러니 이제 내려가 봐도 될까요?”

건방진 것. 클라우스는 속으로 그런 소리를 하면서도 입가로 슬그머니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내려가 봐.”

아체리아는 무릎을 살짝 굽히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 내려갔다. 길고 시원시원하게 뻗은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클라우스는 별안간 두통이라도 오는 사람처럼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대공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시종이 말을 전하러 왔다. 그 말의 울림이 미처 사라지기도 전에, 에른스트가 시종을 밀치다시피 하며 클라우스의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큰일 났어.”

에른스트의 말에 클라우스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무슨 큰일?”

“필리파 왕녀가 오늘 네 연회에 참석할 예정인 모양이야.”

“뭐?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말이야?”

“나도 이야기를 듣자마자 여기로 달려온 거야. 아직 모르고 있을 것 같아서.”

클라우스는 당연히 필리파 왕녀와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다. 심지어 왕성으로는 초대장도 보내지 않았는데 도대체 무슨 일로 참석을 한단 말인가?

‘필리파는 누구보다 군주의 자리에 어울린다. 아마 직접 만나 보면 이해하게 될 것이다.’

혹시 루뷘 왕이 가 보라고 종용한 것은 아닐까? 클라우스는 이제 진짜로 머리가 아파 오기 시작했다.

필리파가 단순히 재미로 이런 곳에 참석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쯤은 그도 알고 있었다. 루뷘 왕이 그녀와 이야기를 나눠 보라 했지만, 핑계를 대서 빠져나갈 생각이었던 클라우스로서는 날벼락이 아닐 수 없었다.

“왕녀께서 오시면 잘 부탁해, 에른스트.”

“왜 나야? 난 필리파와 친하지도 않다고.”

“나는 어떨 것 같은데?”

에른스트가 한숨을 내쉬었다. 사촌인 자신조차도 친분이 없는 왕녀인데 클라우스와 친분이 있을 리 없다. 게다가 그가 알고 있는 필리파라면 클라우스와 지독히 상성이 안 맞을 것이 분명했다.

“일단 오늘은 피차 가볍게 넘기자고.”

에른스트가 말했다.

“필리파는 이런 자리에서 중요한 이야기를 할 만큼 생각 없는 사람이 아니니까 말이야. 네가 어떤 사람인지 탐색하려는 목적일 게 분명해.”

“실망하고 돌아가시겠군.”

클라우스가 시니컬하게 대꾸했다.

* * *

그 무렵, 요아킴은 주방 구석에서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한 채 머리를 싸쥐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지날 때쯤, 락케는 바키와 듀켄을 앞세워 요아킴을 마구잡이로 을러댔다. 왜 아직까지 재료에 손을 대지 않았느냐는 어깃장이었다.

‘오후 안에 일을 끝내지 못하면, 오늘이 여기서 일하는 마지막 날인 줄 알아.’

락케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뱅뱅 맴돈다. 그가 진짜로 그럴 수 있을지, 없을지는 차치하고서라도, 이제 열다섯 살에 지나지 않는 요아킴에게 성인 남자 세 명의 협박은 무서운 것이었다.

요행히 쫓겨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눈 밖에 난 이상 락케와 그 패거리들은 자신을 죽을 때까지 괴롭혀 대지 못해 안달을 할 게 분명했다. 그런 것을 누가 막아 줄 수 있을까?

요아킴은 준비가 전부 끝난 재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지금 아체리아와 다른 세 명은 식사를 하러 갔다. 일을 저지르려면 지금뿐이었다. 하지만 일을 저지른 다음에, 그 뒤에는 어쩌지? 들키지 않을 수 있을까?

‘제길, 이런 일 같은 거, 애초에 한다고 하는 게 아니었는데…….’

요아킴은 울상이 된 채 주춤대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아체리아와 다른 요리사들이 열심히 준비해 놓은 재료 위로 칼을 휙 치켜들었다.

* * *

“이게 다 뭐야!”

아체리아보다 먼저 주방으로 들어선 프레드가 고함을 꽥 질렀다.

뒤따라 들어서려던 아체리아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을 금방 깨닫고 도미닉과 프레드를 밀치며 주방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주방은 난장판이었다. 정성 들여 손질해 놓은 재료들은 하나같이 엉망으로 조각이 나 흐트러져 있었고, 수프에 쓸 육수며 소스 같은 것들도 도무지 손쓸 도리가 없을 만큼 망쳐져 있었다.

“락케, 이 빌어먹을 놈을 그냥……!”

성격 급한 프레드가 뛰쳐나가려 하자, 아체리아가 소리를 꽥 질러 그를 막았다.

“기다려요, 프레드 씨!”

프레드뿐만 아니라 도미닉과 루디도 놀라서 아체리아를 돌아보았다.

“왜 그래, 아체리아! 이런 짓을 할 놈이 그 자식 말고 또 누가 있다고!”

“증거도 없잖아요.”

“요아킴 놈이 없는 게 증거지. 그 자식이 분명 락케의 말을 듣고 이런 짓을 했을 거야. 돌아오기만 해 봐. 그 자식 골통을……!”

“요아킴은 제가…… 심부름 보냈어요.”

아체리아의 말에 도미닉이 개구리처럼 큰 눈을 굴렸다.

“뭐라고?”

“제가 심부름 보냈다고요. 그러니 요아킴이 한 짓은 아닐 거예요.”

“아니, 도대체 무슨 심부름을 보냈는데?”

아체리아는 입을 꾹 다문 채 주방을 휘둘러보았다. 지금 요아킴이 있고 없고, 그런 것을 가지고 말씨름할 때가 아니었다.

“하…… 망했군. 재료가 이 꼴이 됐는데 무슨 수로 연회 만찬을 준비해?”

프레드가 토그 브란슈를 확 벗어 던지며 자리에 쭈그려 앉았다. 도미닉과 루디도 허망한 표정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제 와서 재료를 다시 사 온다 하더라도, 그것을 다듬고 손질할 시간이 부족하다. 게다가 육수 같은 것은 또 어떤가. 길게는 사나흘씩 시간을 두고 끓여 내야 하는 것도 있었다.

이제 와서 그걸 다 준비하는 건 도무지 불가능한 일이다.

마치 전투에 나서기도 전에 패잔병이 된 것처럼 주방의 분위기는 음울하고 무거웠다.

황망한 표정을 짓고 있던 아체리아는 별안간 입술 안쪽을 꽉 깨물면서 묶었던 머리를 풀었다. 그러고는 손목에 매달고 있던 끈으로 다시 한번 단단히 머리를 묶고, 벽에 걸어 두었던 토그 브란슈를 썼다.

“모자 써요, 프레드 씨.”

“……뭐?”

“모자 쓰라고요. 요리를 해야죠.”

프레드가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아체리아를 바라보았다.

“아체리아,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 판국에 무슨 요리를, 어떻게 해? 연회가 장난이야?”

“내 말이 그 말이에요. 연회가 장난이에요? 경연을 벌인다는 초대장이 벌써 온 귀족들에게 다 돌아갔다고요. 그런데 이제 와서 우리가 포기해 버리면, 공작님의 체면도 체면이지만 우리 체면이 뭐가 돼요?”

아체리아는 결연한 얼굴로 앞치마의 매듭을 꽉 조였다.

“그리고, 내 신조를 몰라요?”

요리사들의 시선이 아체리아에게로 모였다. 그녀는 엉망으로 흩어진 채소들을 한 소쿠리에 확 쓸어 담았다. 그러고는 허리에 손을 얹으며 그들을 차례대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 주방에서 버리는 재료는 없어요. 잘 알잖아요? 자! 어서 일어나요. 손님들을 대접해 드릴 준비를 해야죠. 요리사라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