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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시를 핥으세요, 공작님! (5)화 (5/144)

5화

“쫓겨나고 싶었다면 진작 말하지 그랬나? 돈 한 푼 없이 발가벗겨 내쫓을 수도 있었는데.”

클라우스가 밉살스럽게 말하자 아체리아도 지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이런 보람 없는 일은 그만두려던 참이거든요?”

거짓말이다. 이곳 공작저를 나가면 아체리아는 당장 갈 곳이 없었다.

설마 진짜로 얀 헨릭을 찾아가 신세를 질 수도 없고, 더더군다나 이런 식으로 패악을 떨어 다음 일자리를 완전히 놓치는 바보짓 같은 것은 할 생각도 없었다.

클라우스의 창백한 낯빛이 붉게 달아올랐다가 다시 희게 질렸다.

이렇게까지 몰아붙이면 아체리아 쪽에서 당연히 숙이고 들어올 것이라 생각했던 그에게 있어선 의외의 상황이었다. 아체리아는 진심으로 그의 곁을 떠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게 소원이라면, 좋다.”

화가 난 것인지, 아니면 기운이 빠진 것인지 클라우스의 입술이 눈에 띄게 떨렸다.

“들어주지. 지금 당장 짐을 싸서 이 집을 나가.”

“또 말씀드리지만, 강건하십시오, 공작님.”

마지막 말에 특히 힘을 준 아체리아는 어깨를 파르르 떨면서 몸을 휙 돌렸다. 이번에는 공작이 아니라 왕이 쳐들어와 자신을 부른다고 해도 멈춰 서지 않을 작정이었다.

주방으로 돌아가니, 저택에 소속된 고용인들과 요리사들이 제각기 할 말이 많은 표정을 한 채 서 있었다. 아체리아는 그들을 어색하게 둘러보고는 팔짱을 척 꼈다.

“다들 들으셨죠?”

“……아체리아 클링, 네가 정신 나간 애라는 건 진작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어.”

몇 년 동안이나 같이 일한 요리사인 해넘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도저히 못 참겠어요. 사사건건 트집에다가 음식을 쥐똥보다도 하찮게 여기는 저……!”

“그렇다고 공작님께 그런 말을 해?”

“못 할 건 뭐예요? 난 요리사라구요! 요리사한테 있어서 중요한 건 요리에 대한 자존심이에요! 공작이 아니라 다른 누가 와도 내 요리를 무턱대고 욕할 수는 없어요!”

세탁실에서 일하는 하녀이자 아체리아 또래인 이본드가 눈물이 글썽한 얼굴로 다가왔다.

“아체리아, 지금이라도 안 늦었어. 공작님께 용서를 빌어. 이렇게 쫓겨나면 넌 갈 데도 없잖아! 귀족 저택에서 일하다가 추천서도 없이 쫓겨났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몰라?”

모를 리가 있나. 아체리아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대개 귀족의 고용인으로 일하는 사람들은 직장을 잘 옮기는 편이 아니지만, 부득이한 사정으로 다른 주인을 모시게 될 때면 그전에 일하던 곳의 집사장이나 주인으로부터 추천서를 받아 가야 했다.

일을 지독하게 못 한 고용인이라 할지라도 추천서 정도는 그럴싸하게 써 주는 것이 또한 관례였는데, 그렇지 못한 경우는 단 하나였다. 무엇이 되었든 간에, 용납될 수 없는 부정한 행위를 저질렀을 때였다.

그게 절도든, 혹은 불륜이든, 주인에 대한 반항이든 이유는 상관없었다. 추천서가 없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신뢰할 수 없는 고용인’으로 낙인이 찍히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으니까.

아체리아가 아무리 날고 기는 요리사라고 해도 공작저에서 이런 식으로 물의를 일으키고 쫓겨난 이상 이제 두 번 다시 귀족가의 요리사로 근무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난 내가 한 일에 대해 후회하지 않아요.”

그러나 아체리아는 담담하게 말했다. 요리사들과 고용인들은 아체리아의 눈치를 살피며 수군거리기 바빴다.

“락케 씨, 당신이 수석 요리장이 되어 주세요.”

음흉한 웃음을 띤 채 구석에 서 있던 로널드 락케는 어깨를 으쓱했다. 마치 내키진 않지만 그 성의를 보아 ‘그렇게 해 준다’는 듯이 말이다.

그에게 굽실대는 몇몇 요리사들을 향해 거들먹거리는 꼴은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든 광경이었지만, 아체리아는 락케 따위에게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았다.

“전 이만 짐을 싸러 갈게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아체리아! 이건 말도 안 돼! 넌 선대 공작 부인께서 직접 여기 데려오셨잖아. 네가 대체 몇 살 때부터 이 주방에 있었는데 이렇게 나가?”

얀 헨릭과 더불어 어릴 때부터 아체리아를 잘 돌봐 주던 거트루드가 감정이 격해져 소리쳤다. 아체리아는 거트루드의 거칠어진 손을 붙잡고 잠시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빙긋 웃었다.

“선대 공작님과 마님께서 제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거예요. 이제 은혜를 갚을 그분들도 계시지 않으니, 제가 떠나도 서운해하지 않으시겠죠.”

“아체리아, 하지만…….”

“전 괜찮아요. 제 실력으로 어딜 가서 취직을 못 하겠어요? 정 안되면 마을의 식당에라도 부탁해 볼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아체리아는 거트루드의 어깨를 탁탁, 소리가 나도록 두드린 뒤 자신의 방이 있는 곳으로 올라갔다.

‘미치겠네.’

등으로 방문을 밀어 닫은 아체리아의 입에서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식당에 취직이라니, 말이 쉽지.”

아무도 듣지 않을 혼잣말을 한 아체리아는 이제 곧 떠나야 할 자신의 방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공작가에서 내어주었으니 다만 군소리 없이 사용했을 뿐, 특별히 애정 어린 기억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새삼스럽게 널찍하고 아늑해 보였다.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이렇게까지 아쉬워지는 모양이지.’

이제는 후회해 봐야 코웃음도 못 칠 만큼 늦어 버린 일이다. 아체리아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호두나무로 된 옷장 속에서 낡아빠진 짐 가방을 하나 꺼냈다.

손잡이는 이음매가 거의 다 닳아 덜걱거리고, 귀퉁이마다 덧대지 않은 곳이 없는 가방을 본 아체리아의 표정이 묘한 우수에 젖었다.

“이 가방을 또 꺼내는 날이 올 줄은 몰랐네. 이럴 줄 알았으면 새 가방이나 사 둘걸.”

아체리아는 뻑뻑한 걸쇠를 풀어 가방을 연 뒤 그 안에 자신의 물건을 챙겼다. 짐이라고 해 봐야 아체리아 본인의 물건은 우스울 정도로 적었다. 머리빗과 옷 몇 벌, 구두 한 켤레와 요리책 서너 권이 전부였다.

거트루드의 말대로 어릴 때부터 공작저에서 일을 했건만 아체리아는 모아 둔 돈이 별로 많지 않았다. 급여를 받는 족족 빈민가의 굶주리는 아이들을 돕는 데 다 써 버리곤 했기 때문이다.

얀 헨릭은 그런 아체리아를 보면서 늘 잔소리를 해 대곤 했다.

‘돕는 것도 좋지. 다 좋다만 네가 살길도 마련해 놓아야 할 게 아니냐?’

“그때 영감님의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푸념하듯 중얼거린 아체리아는 영영 떠날 짐이라기에는 너무나도 가뿐한 가방을 든 채 문을 열었다.

방을 나오니, 복도 끝에 호즈만이 기다리고 서 있었다.

“집사장님?”

“……공작님께서 널 맨몸으로 내쫓으라 하셨으니, 관례적인 퇴직금은 줄 수 없다.”

굳이 그 말을 또 전해 주려고 여기까지 왔나? 아체리아는 심사가 뒤틀려 삐딱하게 대꾸했다.

“저도 압니다.”

“그러니, 이건 공작님께선 모르시는 일이다. 받거라.”

호즈만이 내민 조그만 주머니를 얼결에 받아 든 아체리아는 그 안에서 뭔가 짤그랑거리는 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다. 입구를 열어 보지 않아도 안에 든 것이 은화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왜 집사장님이 제게…….”

호즈만은 뭔가 잘못을 한 어린애처럼 머뭇머뭇하는 태도로 말을 고르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비록 공작님께 불경한 말을 한 건 잘못이다만 너는 그동안 일을 아주 잘해 주었어. 기회가 된다면 공작님께 말씀을 잘 드려서 네 추천장을 쓸 수 있도록 해 보마. 그동안 너무 멀리 떠나지 말고 근처에서 머물 곳을 찾아보도록 해라.”

호즈만의 말에 아체리아는 진심으로 놀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살면서 이 깐깐하면서도 심약한 집사장을 이렇게까지나 꼭 안아 주고 싶었던 날이 있었던가?

“감사해요, 호즈만 집사장님.”

“어서 가거라. 해가 지기 전에 묵을 곳을 찾아야지. 덴트 거리로는 가지 마라. 그쪽 여관들은 바가지가 심하니까.”

“그럴게요. 고맙습니다.”

아체리아는 호즈만을 향해 인사를 한 후 그대로 복도를 따라 공작저를 나섰다. 드넓은 정원을 지나는 동안 코가 시큰해지는 기분이 들었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그 시간, 클라우스는 3층의 서재 창가에 기대어 선 채 조금씩 멀어지는 아체리아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의 모습이 대문 너머로 완전히 사라진 순간, 노크 소리와 함께 호즈만이 들어왔다.

“정말로 나갔군.”

“공작님께서 명령하신 일인데 어떻게 거역하겠습니까?”

“독한 것. 어릴 때부터 맹랑하더니 아주 지독해. 다시 돌아와서 싹싹 빌어도 받아 주지 마. 알겠어?”

“……공작님, 아체리아는 공작님의 심기를 상하게 하려던 것이 아니라, 오직 공작님의 건강을 걱정하여…….”

“심기를 상하게 하려던 게 아닌데도 그 정도로 퍼부어 댈 성질머리라면, 작정하고 심기를 상하게 할 땐 뭐라고 할지 궁금해지는군. 절대로, 두 번 다시는 들이지 마. 내 말 알았나?”

호즈만은 무거운 표정으로 굳게 입을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클라우스는 이맛살을 찡그리며 관자놀이를 짚었다.

“머리가 아프니 차를 한 잔 가져와. 향이 너무 독하지 않은 것으로.”

호즈만이 가 버리고 난 뒤, 클라우스는 다시 한번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그의 생각과는 달리 텅 빈 정원에는 아무도 없었다. 울면서 용서를 빌러 달려오는 빨강 머리 요리사 따위는 더더욱이나 보이지 않았다.

‘내 요리에 그런 식으로 토를 다는 건 용서할 수 없어요!’

그 듣기 싫은 목소리가 왜 이렇게 쟁쟁하게 귀에 울릴까. 클라우스는 더욱더 심해지는 것 같은 두통을 참느라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시건방진 계집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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