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바구니를 들고 일어서려던 아체리아는 등 뒤에서 들린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도 돌리지 않고 픽 웃었다. 자신에게 이런 식으로 짓궂게 말을 걸 사람은 이 공작저를 다 통틀어 한 명밖에 없었다.
“대공 전하.”
“수석 요리장이라면서 아직도 이런 허드렛일까지 하는 건가?”
에른스트는 흙이 덕지덕지 묻은 순무 뿌리로 거리낌 없이 손을 뻗었다. 희고 깨끗한 손으로 순무에 묻은 흙을 털어 낸 그는 공을 가지고 놀듯이 양손으로 번갈아 순무를 던졌다 받으며 말했다.
“대공가로 오라고 말한 건 농담이 아닌데. 어떻게 생각해?”
“농담이 지나치시네요. 대공가의 요리사들은 다들 저보다 훌륭하고 경력도 많을 텐데, 제가 그런 곳에 갔다가는 풋내기 취급이나 받을걸요?”
에른스트는 빙그레 웃으며 순무를 다시 바구니에 집어넣고 손에 묻은 흙을 깨끗하게 털어 냈다.
“수석 요리장으로 데려가지. 그래도 싫어?”
“그럼 대공 전하께서 식사를 하실 때마다 제가 꼬박꼬박 설명을 해 드리고요?”
“그렇지. 네가 어떤 음식인지 설명해 주는 걸 듣고 있으면 없던 입맛도 생기는 것 같다니까. 어때, 나쁜 이야기는 아닐 텐데?”
그렇게 말하며, 에른스트는 아체리아의 붉은 머리카락 몇 가닥을 손바닥으로 살짝 감싼 채 고개를 숙여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단풍 같은 머리카락들이 단정한 손가락 사이에 부드럽게 휘감겼다가 미끄러져 흘러내린다.
아체리아는 책을 읽는 것 같은 투로 하하, 웃고는 무릎을 살짝 굽히며 고개를 숙였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 순무로는 저녁에 수프라도 끓일 건가? 클라우스가 그걸 좋아해?”
좋아하기는 뭘 좋아해. 아체리아는 입술을 비죽거리고는 헛기침을 했다.
“클라우스 님은 좋아하는 음식이 거의 없으시죠. 그나마 친구 분들이 찾아 주시면 식사를 오래 하시는 편이니, 공사다망하시더라도 대공 전하께서 종종 자리를 마련해 주시면 공작가의 요리사로서 무척 감사한 일일 것 같습니다.”
“클라우스를 위해서도 그렇겠지만, 아체리아 네가 직접 초대해 준다면 기쁜 마음으로 매일이라도 오지.”
그 말에 아체리아는 난감한 척하는 듯한 미소를 살며시 입가에 띠었다가, 갑자기 입 안이 다 보이도록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에른스트의 표정이 어리둥절해졌다.
“갑자기 왜 그래? 순무에 이상한 거라도 섞여 있었던 거 아냐?”
“예쁜 척하는 표정을 지어서 대공 전하를 꼬드겨 신분 상승 좀 해 볼까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못 해 먹겠네요.”
“뭐야, 방금 예쁜 척하려던 거였어?”
아체리아는 이제 개구쟁이처럼 키득거리며 웃고 있었다.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단풍색 머리카락들이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잔물결처럼 아름답게 출렁거렸다.
에른스트가 아체리아에게로 한 발짝 다가오더니 그녀의 머리칼 끝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예쁜 척 안 해도 예쁜데, 아체리아. 내가 정말 청혼한다면 받아 줄 용의가 있는 거야?”
아체리아는 샐쭉한 표정을 지으며 일부러 그의 손에서 머리카락을 홱 잡아당겨 빼냈다.
“그런 놀이를 하실 땐 지났지요, 대공 전하.”
“놀이라니?”
아체리아는 샐쭉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배배 꼬았다.
“연애 놀이 말이에요, 전하.”
“내가 지금 이러는 게 놀이로 보여?”
“그럼 대공 전하 같은 분께서 저 같은 요리사에게 진심으로 그런 말씀을 하신단 말인가요? 차라리 말에게서 양털이 자란다고 하셔야죠.”
에른스트가 뭐라 말하려는 찰나, 저택 안에서 아체리아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아체리아는 흙이 묻은 바구니를 옆구리에 끼면서 한쪽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며 고상한 척 허리를 숙였다.
“그럼, 저는 이만.”
“이봐, 아체리아! 아체리아!”
아체리아는 일부러 그의 말을 못 들은 척하며 저택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복도를 반쯤 걸어갔을 때에야 그녀는 비로소 참고 있던 웃음을 마음껏 터뜨릴 수 있었다.
‘맙소사! 대공 에른스트가 내게 수작을 걸다니.’
물론 진심이 아닐 것이다. 아체리아 스스로 말했듯, 그는 대공의 신분이고 자신은 저택에서 일하는 요리사일 뿐이다. 수석 요리장이라고는 하나 어차피 고용인, 귀족들과는 자리를 나란히 할 수조차 없는 신분이었다.
‘하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잖아?’
아체리아는 싱긋 웃으며 자신의 붉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휙 넘겼다.
* * *
왁자지껄했던 점심 식탁과는 달리, 저녁 만찬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고요하고 적막했다.
접시에 식기가 부딪히는 소리가 느리게 들렸다. 아체리아는 뒷짐을 진 채 식탁 옆에 서 있다가, 거의 그대로인 접시를 보며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참새도 너보다는 많이 먹겠다.’
“이봐.”
“네, 공작님.”
“이 파이 안엔 대체 뭐가 들어간 거지?”
입가를 닦는 클라우스의 안색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다분히 맛있어서 상이라도 내리려고 묻는 게 아닌 것은 분명했다. 아체리아는 작게 헛기침을 하고는 턱을 살짝 들어 올리며―얀 헨릭이 늘 말하던 바른 자세로― 말했다.
“메추라기와 푸른 호박, 그리고 붉은 차조기 잎입니다.”
“맛이 끔찍해. 너무 기름져서 한 입만 더 먹었다가는 뒤룩뒤룩 살이 찔 거 같다고.”
당연히, 클라우스는 그 파이를 열 개쯤 더 먹어도 뒤룩뒤룩 살찌지 않을 것이다. 아체리아가 말했다.
“공작님, 메추라기 고기는 예로부터 뼈와 근육을 튼튼하게 하며, 쇠약해진 신경을 보해 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지방질이 적은 고기니 적어도 한 개는…….”
“지방질이 적어? 네 눈엔 이 기름이 안 보인단 말야?”
“……공작님, 그것은 고기를 익히면 당연히 나오는 육즙으로…….”
“치우라면 치우지, 말이 왜 이렇게 많아!”
요리사인 아체리아가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선택지는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로는 얌전히 접시를 치우는 것이고, 두 번째로는 그토록 싫다는 파이 대신 다른 요리를 권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체리아는 그만 순간의 감정을 참지 못하고, 원래 골라서는 안 되는 세 번째를 선택하고 말았다.
―쾅!
“도대체 공작님께선 뭐가 그리 불만이십니까?”
클라우스는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도 하지 못한 거 같았다. 아체리아의 얼굴이 너무 무시무시하게 일그러져 있어서, 모자 아래에 단정하게 눌린 붉은 머리카락이 순간 거꾸로 솟구치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채소도 싫다, 고기도 싫다, 생선은 입에도 대지 않겠다. 그럼 도대체 뭘 먹겠다는 거예요?”
“이봐, 너…….”
“눈이 있으면 공작님의 손목을 직접 좀 보시죠! 그게 어디 남자의 손목입니까? 아니, 남자가 뭐야? 사람의 손목이라고도 할 수 없어요! 공작님의 방에는 거울도 없습니까? 핏기 하나 없이 허여멀건 죽을상을 해서 1년 중 350일을 골골거리면서 보내고! 다들 이제나 죽나 저제나 죽나, 수군거리는 거 듣는 게 즐거워요?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네! 죽길 바라는 거야 자기 마음이니까요! 하지만 내 요리에 그런 식으로 토를 다는 건 용서할 수 없어요! 얀 헨릭의 요리에 토를 달았던 것도, 내 성격으로는 참을 만큼 참았던 거라고!”
클라우스는 이제 완전히 넋이 빠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많은 말을 숨조차 쉬지 않은 채 순식간에 퍼부은 아체리아는 꽉 다문 잇새로 한숨을 씩씩, 내쉬고는 천천히 허리를 세웠다.
“부디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제 발로 알아서 나갈 테니, 퇴직금은 챙겨 주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봐, 잠깐.”
“그럼 공작님, 부디 강건하십시오.”
아체리아는 마치 기사처럼 허리를 깊이 숙였다가 그대로 돌아섰다.
“이봐!”
클라우스의 강한 외침에 어쩔 수 없이 걸음을 멈춘 아체리아는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오만상을 찡그렸다가 그를 돌아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잠깐 이리로 와.”
싫어! 내가 왜!
그렇게 외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이미 반항할 기회를 다 써 버린 아체리아로서는 더 이상 뻗댈 여유가 남아 있지 않았다.
“왜…… 그러시는데요.”
클라우스의 눈썹이 삐딱하게 올라갔다.
“말투가 그게 뭐야?”
“……이제 와서 공손하게 얘기해 봐야 뭐 달라지는 것도 없을 거 같아서요.”
“뭐가 달라지는 게 없다는 건데?”
‘왜 자꾸 쓸데없는 말을 거는 거야?’
아체리아가 툴툴거리듯 생각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당사자인 공작 앞에서 죽는 게 좋으면 맘대로 하라느니 뭐라느니 퍼부어 댔으니, 이제 자신이 그만두기 싫다고 해도 이 집에서 잘리는 건 물론이거니와 다른 귀족 저택에 취직하는 것도 불가능할 게 뻔했다.
그 생각만으로도 당장 앞길이 막막한데, 이 허여멀건한 꼬챙이 자식은 대체 무슨 할 말이 있기에 이렇게 질척거리는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아체리아는 다시 한번 크게 한숨을 쉬었다. 클라우스는 그조차도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눈썹을 까딱이다가 파이 접시를 멀찍이 밀어 놓으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아주 잘도 말하던데. 이렇게 말을 잘하는 줄 알았으면 요리사가 아니라 앵무새로 취직을 시킬걸 그랬어.”
“앵무새는 직업이 아닙니다, 공작님.”
“나도 알거든? 비꼬는 말도 모르나?”
“저도 비꼬는 말이 뭔지는 알거든요? 공작님께서 비꼬는 솜씨가 형편없다고는 생각지 않으시는 모양입니다?”
“설마 요리할 때도 이렇게 떠들어 대는 건 아니겠지? 생각하니까 갑자기 비위가 뒤틀려.”
“언젠 비위가 멀쩡하셨나요?”
클라우스의 입가가 비뚜름하게 뒤틀리며 일그러진 웃음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