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이 너무 따뜻해서 문제다 (127)화 (126/148)

샤르망은 아힐과 눈빛을 교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힐이 작게 읊조렸다.

“문 앞에 있을게.”

그리고 곧 샤르망은 아르디나와 둘만 남았다.

“저희와 대화하실 마음이 생기신 겁니까?”

샤르망이 그녀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아르디나는 왕좌에 앉아 샤르망을 굽어보고 있었다. 한 마디 물었을 뿐인데 눈에 언짢음이 번졌다.

아르디나는 대답 대신 뭔가를 보란 듯이 홱 던졌다.

바닥에 가차 없이 떨어져 데구루루 구르는 물건에 샤르망의 시선이 그대로 따라붙었다.

던져진 물건은 샤르망의 발끝에 툭 하고 멈췄다.

“…….”

그건 샤르망이 선물로 건네준 환상수의 심장이었다.

어쨌든 선물로 주긴 한 거지만 저런 식으로 굴어달라는 말은 아니었는데…….

샤르망이 쩝 하고 입맛을 다시며 아쉬움을 삼키고는 심장을 집어 들었다.

거기다 전혀 필요없다는 듯 대차게 던진 것과 다르게 환상수의 심장은 처음 샤르망의 손을 떠났을 때보다 현저하게 색이 어두웠다.

그 말은 수시로 환상수의 심장이 가진 능력을 사용했다는 건데.

그만큼 동생을 그리워한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그냥 보고 싶다 하면 될 것이지 왜 화를 낸담.

샤르망인 이것도 말을 삼켰다.

“주제넘게 신의 시련에 간섭을 하더니 이제는 설계도를 잔뜩 훔쳐 갈 셈이구나.”

훔쳐 가는 게 아니라 분명히 열쇠를 허락받고 가지러 온 것입니다만…… 이라고 하고 싶었으나 그러면 또 괘씸해할 것이 분명했다.

“당연히 지상으로 가져갈 설계도가 무엇인지는 모두 말씀드릴 예정이었습니다.”

“아르디엘은 어디 있느냐.”

“…….”

“어디 있느냐 물었다.”

“그건 죄송하지만 말씀해드릴 수 없습니다.”

“뭐라?”

“다만…… 도움을 주신다면 아르디나 님과 아르디엘의 관계 호전을 위해 제가 힘을 쓸 수는 있습니다.”

“또 나를 능멸하려 드는구나.”

샤르망은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주군에게 충성하듯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아르디나를 올려다봤다.

“정말입니다. 제가 이곳에 온 것은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아르디나 님의 지혜를 얻고자 함입니다. 절대 당신을 능멸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할 수 있다면 아르디나 님을 돕고도 싶습니다.”

아르디나가 헛숨을 뱉었다.

“네가 나를 도와? 너 따위가 무얼 돕는다는 것이냐.”

“이걸 통해 아르디엘을 그리워하셨죠.”

“그건 하찮은 인간들이나 하는 짓이지.”

“아르디나 님도 이곳에 있는 분들 모두 반은 인간이시잖아요. 저를 도와주신다면 두 분의 관계 개선에 힘을 쓰고 싶습니다.”

“너의 도움은 필요 없으니 아르디엘이 있는 곳을 말하거라.”

자유자재로 마법을 다루고 신의 힘까지 쓸 수 있는 그녀가 아르디엘의 행방을 묻는 게 조금 의아했다.

설마 아르디엘이 모종의 방법으로 자신과 멜피네의 존재를 숨기고 있는 것인가.

지금 샤르망이 할 수 있는 건 추측뿐이었다.

“……그건 죄송합니다. 아르디엘이 원치 않습니다.”

“그래? 그럼 더는 필요가 없겠구나. 너는 나를 그런 하찮은 물건으로 능멸했으니 이 자리에서 죽어도 할 말이 없겠지.”

“……큭.”

갑자기 샤르망의 목이 졸려왔다.

고개를 내릴 수 없어 자세히 보이진 않았으나 희미한 빛이 느껴졌다.

그리고 목 주변이 불에 탄 듯이 뜨겁고 괴로웠다.

정말 이 자리에서 죽여버릴 셈인가.

인간의 목숨을 개미 취급하는 줄은 알았으나 과거보다 더 취급이 박해진 것 같았다.

그 순간 벽이 우르르 무너지며 단단한 얼음 창이 샤르망의 주위를 가득 에워쌌다.

날카로운 얼음 창의 날이 샤르망을 등지고 아르디나에게 향해 있었다.

샤르망은 머리카락 하나 다치지 않았지만 그보다 놀란 마음이 더 컸다.

샤르망도 마법을 쓰려고 막 마음을 먹었는데, 누군가가 그보다 더 빠른 속도로 그녀의 목을 조인 힘을 풀어낸 것이다.

“괜찮아?”

등 뒤에서 따뜻하고 단단한 몸이 느껴졌다.

샤르망이 엉겁결에 끄덕였다.

겹겹이 얼음 창이 솟아오름과 동시에 샤르망의 목을 죄던 빛의 고리는 파훼된 지 오래였다.

“……나는 괜찮아. 그보다 어떻게 이렇게 빠르게.”

“안에서 갑자기 살기가 느껴지길래. 네 말 안 들어서 미안. 그 약속에 이 정도의 위험은 없었어.”

아힐의 시선은 아르디나에게 향해 있었다. 그 와중에도 미안하다고 사과하다니.

“아냐. 내 생각이 짧았어.”

날카롭게 솟아오른 수천 개의 얼음 창은 아르디나 코앞까지 펼쳐져 있었다.

“무엄하구나. 감히 할스레이크에서 나를 공격하려 하다니.”

“단순히 감정에 휩쓸려 무차별적인 공격을 하는 자는 오히려 당신인 것 같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이것이 진정 신의 힘을 받은 자들이라 할 수 있습니까?”

아힐의 주변으로 마력이 휘몰아쳐 태풍처럼 바람이 불었다.

아르디나의 힘이 더욱 거세졌다.

그러자 샤르망도 더는 가만히 있지 못했다.

이 상태로는 어차피 대화를 계속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거대한 세 개의 힘이 태풍처럼 맞부딪쳤다.

아르디나는 혀를 찼다.

내 힘을 단숨에 풀다 못해 받아치다니.

인간 주제에 둘 다 까다로운 힘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기분을 상하게 한 주제에 인간이 갖지 못할 힘을 가진 자들이라 처음부터 탐탁지 않았다.

겹친 시간 선을 가진 것도 모자라 특별한 심장을 가진 여자와 아직 천장을 뚫진 못했지만 몸 안에는 이미 초월한 힘을 가진 남자.

만약 자신을 거슬리게 하지 않았다면 둘을 데려다 연구하고 싶을 정도로 매혹적인 힘이긴 했다.

꽁무니를 빼고 도망가게 하려고 겁을 주었는데 도리어 공격을 해오다니.

아르디나는 차갑게 웃고 있었지만 휘몰아쳐 오는 마력의 바람을 꽤 신경 써서 막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아르디나가 진짜 힘을 끌어내면 처참하게 죽여버릴 수도 있었다.

고민하던 찰나였다.

“저를 죽이신다면 평생 아르디엘의 미움을 사시게 될 겁니다.”

샤르망이 아르디나의 힘을 맞받아치며 대꾸했다.

아르디나의 눈이 움찔 미세하게 떨렸다.

당연히 그녀가 뿜어내던 힘도 미세하게 파동이 끊겼다가 다시 이어졌다.

샤르망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

“그건 아르디나 님도 바라시는 것이 아니겠죠. ……제가 일전에 아르디나 님의 심기를 거슬리게 한 점은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하지만 부디 기회를 주실 수는 없나요? 아르디엘이 있는 곳을 말씀해드릴 순 없지만 두 분을 만나게 해드릴 수는 있습니다.”

아닌 척하고 있어도 아르디엘을 이야기할 때마다 힘의 파동이 일었다.

샤르망은 정신을 집중해 힘을 받아치면서도 아르디엘이 자신을 은인처럼 생각하고 있다고 말하며 아르디나를 살살 꼬드겼다.

아르디나가 그런 둘을 보며 미간을 찌푸린 채 이마를 짚었다.

정말 조금도 기세를 꺾지 않는군.

“…….”

갑자기 힘이 거두어졌다.

바람을 막아내듯 힘을 쓰고 있었던 탓에 순간 샤르망의 몸이 휘청였다.

아힐이 샤르망을 단단하게 지탱했다.

“좋다. 그러나 그 대화마저도 마음에 차지 않는다면 너희들은 그 설계도마저 가져가지 못하고 쫓겨날 것이다.”

아르디나가 일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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