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자식이 왜 여기 있지?
엔조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기분이 급속도로 안 좋아졌다.
설마 요 며칠 느껴지던 시선이 엔조의 시선이었던 것인가.
사절단은 이미 돌아간 지 오래였다.
그의 직속 부하인 테메릭도 샤르망에게 보기 좋게 얻어터지고 돌아간 참이었다.
그런데 사절단 인원도 아니었던 남자가 왜 눈앞에 있는지.
샤르망의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그는 엔조가 확실했다.
테메릭 때문에 온 것은 아닐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귀족인 그가 저런 수수한 옷차림으로 오지 않았을 테니까.
그가 직접 움직였다는 이야기는 라칸이 명을 내렸다는 뜻이었다.
라칸이 직접 명을 내린 이상 엔조가 제국의 후작이든 아니든 상관없는 것이다.
어떻게, 왜 왔지? 무슨 명으로?
일을 꾸미려고 제 부하들과 밀입국을 하기에는 여전히 국경 경비가 삼엄했을 거다.
그렇다면 직접 신분을 드러내고 들어오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부하들을 우르르 데려온 것 같진 않고. 그렇다면 아무리 엔조라도 수도로 직진하지도 않았겠지.’
하기사 마음먹으면 한 명 정도야 못 올 것도 아니었다.
낌새가 좋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 시선을 느꼈었다.
그렇다면 아직 살아 있는 펠릭, 엘타인, 라디를 봤다는 이야기다.
그것 떄문인가.
하지만 그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쓸모를 다하면 가차 없이 버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는 라칸이다.
그런 그가 구태여 사람을, 그것도 엔조와 같은 고위 귀족을 이렇게 따로 보내 제물로 내다 버린 제자들을 감시할 이유가 없었다.
그걸 잘 알고 있는데도 노파심에 제자들과 있을 때면 일부러 번화가 쪽으로는 가지도 않았던 샤르망이었는데, 걱정이 현실이 된 것 같았다.
“누구?”
샤르망은 처음 보는 것처럼 물었다.
그러자 남자가 고개를 푹 숙이며 사과했다.
“이 늦은 밤 갑자기 불쑥 찾아온 점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샤르망이 눈을 가늘게 떴다.
“무슨 용건이야? 물건을 구매하러 온 거라면 이미 문을 닫았으니 내일 아침에 다시 찾아오도록 해.”
“아닙니다. 샤르망 페페 후작 각하를 만나러 왔습니다.”
“나를? 왜?”
남자는 주변을 한 번 휙 경계하더니 다시 샤르망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야기가 좀 길어질 것 같은데 대화를 위해 안으로 들어가게 해주시겠습니까?”
“네가 누군지, 무슨 용건인지 먼저 말해야지. 다짜고짜 들어가게 해달라?”
“아, 그렇군요. 실례했습니다. 저는 엔조 클라엠이라고 합니다. 륀트벨에서 왔습니다.”
“륀트벨에서? 그것도 공식적인 요청도 아니고 이 시간에?”
엔조가 품 안에서 자신의 신분패를 내보였다.
“마법을 쓸 줄 아시니 금방 확인이 가능하실 겁니다. 확인이 되면 대화를 할 수 있겠습니까?”
잉겔로가 그랬듯, 페페에 대해 조사했다는 뜻을 담은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샤르망은 신분패를 건네받고 간단하게 확인하는 시늉만 하고 돌려주었다.
“그럼 더더욱 이해가 안 가는데. 일국의 귀족이라는 자가 타국 귀족에게 은밀히 접촉해야 할 이유가 있는지 말이야.”
“그럼 어쩔 수 없이 이 자리에서 말씀드릴 수밖에 없겠군요. 엘리움에서 제를 지낸 것으로 알고 있는데, 륀트벨에서 보낸 제물을 쓰지 않으셨더군요.”
엔조가 고개를 들어 가게를 살피며 말했다.
어쩐지 입술 끝에 비웃음이 달리는 것 같았다.
“…….”
“제물에 무슨 문제가 있었습니까?”
정말 목적이 이건가.
‘피곤해지겠군.’
기어코 가게 안으로 들어오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더구나 더 있다간 귀가 밝은 미야가 잠에서 깨어 나와볼 것만 같았다.
“우선 들어와.”
샤르망은 결국 엔조를 가게 안으로 들였다.
“감사합니다.”
불을 더 밝히고 앉으니 엔조의 얼굴이 더욱 확실해졌다.
잉겔로보다 더 싫은 게 엔조였는데, 그까지 마주할 줄이야.
이러다 륀트벨 사람들을 다 만나게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마주 앉자마자 샤르망이 말했다.
“제물은 이미 엘리움에 소유권을 넘긴 상태잖아. 여기까지와 물어볼 이유가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리고 제의 날짜는 언제든지 변동될 수 있어. 우리가 속국도 아닌데 륀트벨에 보고할 이유는 없지. 사절단도 환대하고 배웅까지 무사히 마쳤는데 뒤늦게 이렇게 나를 따로 찾아온 이유를 모르겠네.”
“아, 물론 그렇지요. 하나 제물에 문제가 있어서라면 륀트벨에서 회수를 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넘어간다면 화합의 의미가 퇴색되지 않겠습니까?”
“사람을 회수하겠다고?”
“이제는 사람이 아니라 제물이죠. 폐기 후 새로운 제물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제물은 들러리다.
따로 본론이 있군.
샤르망이 속으로 생각했다.
문제는 엔조가, 라칸이 샤르망 페페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거다.
엔조는 자신이 원하는 답이 나올 때까지 약점을 찾아대고 밀어붙일 것이다.
게다가 엔조는 지금 혼자였다.
테메릭을 달고 왔던 잉겔로처럼, 멋대로 구는 수하가 멍청하게 일을 그르칠 일도 없으니 어떻게 해서든 라칸에게 원하는 답을 쥐여 주겠지.
생각만 해도 짜증이 치솟았다.
지금은 그를 돌려보내는 게 우선이다.
“회수 후 폐기라. 필요 없다고 하면?”
조앤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그들은 이미 고도의 훈련을 받은 자들입니다. 제물이 아닌 다른 수단으로 존재한다면 더 이상 안전을 논할 수 없게 됩니다. 목적이 평화와 화합인 이상 륀트벨에서는 소유권을 넘겼다 하더라도 이를 두고 볼 수만은 없지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샤르망의 예상대로 그의 말은 뻔하게 흘러갔다.
“그래서 나와 대화가 되지 않으면 륀트벨에서 공식적으로 요청을 하겠다고? 그자들이 얼마나 위험하고 고도의 훈련을 받았는지는 모르나 륀트벨에서 걱정할 만큼 엘리움에 인재가 없는 것도 아닌데 좀 지나치다고 생각되지는 않나?”
조앤은 살짝 미소를 지은 채 답이 없었다.
샤르망은 라칸이 원하는 게 뭘지 생각했다.
만에 하나 이 몸에 자신이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어떤 방법으로도 알고 있다면 이런 식으로 나오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아니면 샤르망 노엘 켄더스와 내통하고 있다고 짐작이라도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아니면 엘리움의 제사장이자 국민이신 후작께서 륀트벨의 제물을 감싸고도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그들을 살려두면 반드시 륀트벨에도 화살을 겨누게 될 텐데요.”
“…….”
“아, 혹시 그게 륀트벨을 향한 엘리움의 뜻이라고 봐도 되겠습니까?”
뭐라는 거야.
과장된 목소리에 샤르망은 일부러 무슨 미친 소리를 하는 거냐는 표정으로 엔조를 쳐다봤다.
엘리움이 륀트벨을 공격할 여지가 있다는 허무맹랑한 상상을 억지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원하는 걸 쟁취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억지 이유를 만들어서라도 어떻게 해서든 찍어 누르던 수법은 샤르망이 과거에 하던 일이었다.
그것을 역으로 받고 있으니 정말 기가 찼다.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다들.’
기분 한 번 제대로 더럽네.
샤르망이 속으로 쓰게 웃었다.
문제는 이 말도 안 되는 말을 결코 우습게 볼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단순히 이런 억지 이유 하나로도 명분을 만들어 륀트벨은 엘리움으로 밀고 들어올 수 있었다.
그래. 들어나 보자.
아니면 맘껏 의심해 보든지.
어차피 지금은 때가 아니다.
내가 직접 그를 끌어내릴 거라는 다짐은 절대 변하지 않으니.
“이 늦은 밤에 제국의 귀족이 은밀히 찾아와 하는 말이 그런 겁박이라니.”
엔조가 빤히 보더니 갑자기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겁을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그렇게 가정할 수 있다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물론 오늘 일이 전혀 없는 일이 될 수도 있죠.”
샤르망은 손가락 끝으로 테이블을 탁탁 두드렸다.
“자, 알았으니 이제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을 해볼까?”
어차피 앞에 소리는 모두 개소리다.
그러니 앞에 또 어떤 개소리를 포장하기 위해 저런 개소리를 했는지 확인해야겠다.
“알아주시니 지체하지 않겠습니다.”
엔조가 신분패를 꺼냈던 것처럼 다시 품에 손을 넣더니 두꺼운 두루마리 하나를 꺼냈다.
두루마리를 샤르망에게 건넨 엔조가 말했다.
“저희 폐하께서 샤르망 페페 후작 각하의 륀트벨 방문을 바라고 계십니다.”
“내 방문?”
그게 무슨 소린가 싶어 샤르망은 엔조가 건넨 두루마리를 펼쳤다.
그럼 이건 초대장인가.
“천천히 읽어보셔도 됩니다.”
“…….”
샤르망이 두루마리를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이게 뭐야.’
순간 제 눈을 의심했다.
누군가 뒤통수를 퍽 때리고 지나간 것 같다.
이건 단순한 방문을 초대하는 의미가 담긴 내용이 아니었다.
륀트벨 작위와 어마어마한 양의 금액.
거기다가 영지까지.
이건 보통 각 방면에 탐나는 인재를 발견해 빼올 때 현혹하는 수법이었다.
거절해도 원하는 대로 협박해서 데려가긴 하지만, 대부분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범위를 훌쩍 넘어서는 제안을 받으면 대개 협박까지 갈 필요 없이 넘어오곤 했다.
그런데 왜 그게 여기 있냐는 말이다.
전혀 예상을 벗어나는 이 막장 같은 상황에 샤르망은 침착해지려 노력했다.
‘이건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개소린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