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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국이 너무 따뜻해서 문제다 (67)화 (66/148)

“부탁이요?”

“응. 당장 해야 하는 일은 아니지만.”

자신을 살리기 위해 몸을 내어 준 장본인이었다.

샤르망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설령 샤르망이 해결할 수 없는 일이더라도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싶었다.

“제가 무엇을 하면 됩니까?”

“네 몸으로 돌아가면 날 저주에서 풀어줄래?”

“제가 할 수 있는 일입니까?”

저주.

죽지도 그렇다고 편히 살지도 못하는 살리드 신의 저주.

“응, 실은 자유로움을 느끼고 싶어 널 받아들였는데 말이야. 막상 엘리움을 벗어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

“…….”

“나는 쉬고 싶은 거였어. 괜찮다면 내가 친구들에게 돌아갈 수 있게 네가 좀 도와줄래? 한때는 원망도 하고 미워도 해봤지만 나는 역시 친구들에게로 돌아가고 싶은 거였어.”

그 말은 자유가 아니라 영면에 든다는 소리와 같았다.

부탁치곤 숙연해질 수밖에 없는 말이라 샤르망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

샤르망이 흔쾌히 대답하자 페페의 얼굴에 활짝 꽃이 폈다.

“역시 넌 해줄 줄 알았어. 하늘 어딘가에 세상에 숨겨진 비밀을 풀 수 있는 곳이 있대. 아마 그곳에 가면…… 아, 이런. 지금은 시간이 없고 조금만 기다려줄래? 네가 곧 깨어날 것 같거든.”

페페는 다시 만나는 날, 저주를 푸는 방법을 알려주겠다고 말했다.

“그럼…….”

언제쯤 다시 만날 수 있는 거냐고 물으려는 순간 페페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서로가 흐릿해지고 있었다.

“네 몸은 걱정하지 마! 누가 안전하게 데려다줬거든. 그럼 다음에 또 보자! 오늘 일을 우리 둘만의 비밀로 하자?”

“저기, 페페……!”

아직 물어볼 것들이 많은데!

샤르망이 서둘러 그녀를 잡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잡는 동시에 시야가 확 바뀌었다.

아찔한 현기증과 함께 눈을 떴을 땐 낯선 천장이 보였다.

‘어디지?’

샤르망은 누운 채로 한참 눈을 깜박이다가 완전히 정신을 차린 후에야 일어났다.

아무리 봐도 익숙한 곳이 아니어서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려는데 샤르망이 침대에서 완전히 일어나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일어났습니까?”

펠릭이 들어왔다.

샤르망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뒤늦게 아차 하며 이곳이 제자들이 머무는 집이라는 걸 알아챘다.

“내가 왜 여기 있어?”

“그쪽, 쓰러져 있었습니다.”

“어제, 아…….”

샤르망이 이마를 짚고 생각했다.

어제 분명 꽤 멀리 달아났다고 생각했는데 가까웠었나?

집으로 가기 전에 의식을 잃을 것 같은 기분에 인적이 드문 곳으로 무작정 뛰어갔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죽을힘을 다해 뛸 걸 그랬다.

못 볼 꼴을 보여줬을 게 틀림없다.

한편으로는 의외라고 생각했다.

그대로 그들에게서 떨어지자마자 집으로 돌아갔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자신을 따라왔다니.

마음의 문을 조금은 연 건가 싶어서.

샤르망이 생각을 접고 서둘러 다시 침대에서 일어났다.

“귀찮은 일을 하게 했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지.”

“병이 있습니까?”

“나?”

“어제 말하는 겁니다.”

샤르망은 잠시 눈을 굴리곤 변명으로 대신했다.

“모, 몸이 약해서 원래 가끔 그래.”

“그렇게 약해 보이진 않던데.”

샤르망이 뜨끔했다.

“아냐, 사실은 굉장히 약해. 어쨌든 어제는 도와줘서 고마워.”

샤르망의 시선이 시계를 찾았다.

‘아직 8시.’

오늘은 운동 대신 간단하게 청소만 하고 가게를 열어야 할 것 같았다.

제스퍼가 오지 않았길 바라며 샤르망이 서둘러 문을 나섰다.

“…….”

막 정원 울타리 문을 나가던 샤르망이 멈칫하며 뒤돌았다.

뒤에 샤르망과 같이 세 명이 우르르 나온 것이다.

“……배웅까진 필요 없어.”

“뭔 헛소립니까?”

샤르망의 말에 펠릭이 되받아치며 한쪽 눈썹을 힐끗 올렸다.

“아니야?”

그럼 왜 따라 나와?

“아닙니다.”

펠릭의 단호한 대답에 괜히 멋쩍어진 샤르망이 홱 몸을 돌렸다.

“내가 오해했나 보군. 그럼.”

샤르망은 거의 뛰다시피 가게로 향했다.

“…….”

하지만 얼마 못 가 또 멈췄다.

다시 몸을 홱 돌렸다.

“……저기 내가 이번에도 오해하는 게 아니라면 말이야.”

샤르망의 뒤에 일정 간격으로 따라오던 세 제자가 샤르망을 빤히 쳐다봤다.

“이쪽에 볼일이 있는 거겠지?”

엘타인이 고개를 한 번 까딱 움직였다.

“뭐, 그래.”

샤르망은 좀 찝찝했지만 시간이 시간이다 보니 아침을 먹으러 나왔을 수도 있겠다 싶어 샤르망이 다시 가던 길로 발을 재촉했다.

하지만 골목 안 가게 문 앞까지 왔는데도 그들이 뒤에 있으니 오해를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을 감시하러 갈 땐 별로 느끼지 못했는데, 뒤에서 추적하듯이 따라오는 걸 보니 꽤 신경이 쓰였다.

“……골목 안에 볼일이 있다고?”

그것도 이 가게 문 앞에?

한참 의심의 눈으로 문고리를 잡은 채 열지 않고 쳐다보는데 라디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우리도 당신을 온전히 믿을 수가 없거든.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는 건지 정말 샤르망을 찾을 수 있는 건지 직접 확인해야겠어.”

“그걸 어떻게 확인해?”

샤르망이 황당해서 물었다.

“직접 보면 알겠지. 그쪽도 우리에게 거짓을 말한 게 아니라면 상관없지 않나.”

엘타인이 라디의 옆에서 거들었다.

샤르망이 황당한 눈을 했다.

“그래서 가게 안에 들어오겠다고?”

“방해는 안 할 겁니다.”

“아니, 뭐…… 가게가 좁아서 불편할 텐데?”

“상관없습니다.”

펠릭의 단조로운 목소리에 샤르망이 다시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들이 불편한 존재는 절대 아니나 샤르망이 그들을 찾아가는 것과 그들이 샤르망을 찾아오는 건 좀 달랐다.

딱히 비밀스러운 일을 하는 것도, 부끄러운 것도 아닌데 말이다.

샤르망이 잠시 고민 후에 문을 열며 떨떠름하게 말했다.

“뭐, 그럼 들어오든지.”

끼익.

가게의 문이 열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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