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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국이 너무 따뜻해서 문제다 (17)화 (17/148)

아무렇지 않게 짚은 척했으나 이유가 명확했다.

“그런데 여기가 좀…….”

“좀?”

“국경 수비가 취약하지 않나? 싶어서.”

“글루턴? 거기가 왜?”

아힐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샤르망이 표시한 지역을 보며 갸웃했다.

샤르망은 흠흠, 헛기침을 했다.

“아니, 이쪽으로 나중에 여행하고 싶은데 위험하면 안 되니까……?”

되지도 않는 이유라는 거 잘 안다.

그런데도 샤르망은 ‘치안 같은 걸 좀 더 정비하면 좋을 텐데’라고 일부러 들리게 중얼거렸다.

글루턴은 샤르망이 처음으로 엘리움을 침공했을 때 박살을 내고 들어온 곳이니까.

늪지대가 넓게 분포해 있어 난이도가 높은 지역이라 쳐들어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군사력은 둘째 치고 방벽이 형편없었다.

역시나 아힐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거긴 밀림에다 늪지대야.”

샤르망이 빠르게 덧붙였다.

“어? 어, 나 늪지대 좋아해. 갑자기 마음에 들었어.”

그러자 아힐이 뭔가 잘못 씹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내 눈썹을 치켜떴다.

“음, 뭐 그래. 취향이니 좋아할 수도 있지. 심경 변화가 일어났을 수도 있고.”

“그, 그렇지.”

그 외에도 기억 속에 남은 몇 가지 지역이 떠올랐지만 의심하지 않도록 하나씩 풀기로 마음먹었다.

샤르망은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대신 연회 순서라든가 하는 자잘한 질문을 던졌다.

아힐은 모르는 것이 없는 편이었고 그녀가 묻는 족족 대답을 술술 내놓았다.

책을 덮자 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자리에 앉아 책을 읽고 대화를 나눈 지 벌써 4시간이 넘어가고 있었다.

“시간도 늦었는데 다른 건 다음 시간에 하는 건 어때?”

“벌써 그렇게 됐나? 뭐, 나는 밤을 새도 상관없는데.”

아힐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오히려 그 멀끔한 대답에 당황한 건 샤르망이었다.

밤새? 그쪽이랑 둘이? 미친 거 아닌가?

샤르망은 당황한 모습을 들키지 않기 위해 눈을 내리깔았다.

평소에 둘이 얼마나 친하기에 저렇게 자연스럽게 말을 꺼내지.

샤르망은 그렇게 믿었던 제자들하고도 밤새 이야기를 나눈 적이 손에 꼽았다.

거기다 이제 사고가 난 게 아니라면 슬슬 버키가 돌아올 때가 되었다.

특히 어둠을 좋아하는 특성을 갖고 있는 세이아크다 보니 자정에 가까운 시간에 움직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더 늦은 밤이 되기 전에 혼자가 되어야 하는데 이곳에서 밤을 샌다면 너무나 곤란했다.

“도움도 받는데 민폐를 끼칠 순 없지. 대신 오늘 가져다 준 책을 틈틈이 읽어보도록 할게.”

재차 말하자 아힐이 의자에 기대 팔짱을 낀 채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뭐. 주말은 조금 일찍 와도 돼?”

“물론. 네가 귀찮지만 않으면.”

“난 꽤 즐거웠거든. 그럼 일요일에.”

샤르망이 눈을 둥글게 뜨고 갸웃했다.

오늘 그가 한 거라곤 몇 시간 내내 책을 읽을 동안 테이블을 지킨 것밖에 없었을 텐데.

질문에 답해준 것도 합치면 30분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었다.

그녀가 누군지 알면 정말 불쾌할지도 모르는데.

그 생각을 하자마자 그가 눈을 감던 순간이 환상처럼 스쳐 지나갔다.

‘륀트벨에 이런 괴물이 있을 줄은 몰랐어. 엘리움에 그대가 있었다면 든든했을 텐데 아쉬워.’

‘당신은 륀트벨에 어울리지 않아. 그래서 안타깝군. 적어도…….’

그러고 보니 그는 제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제법 중요한 말 같았는데.

“저…… 아힐?”

“응? 더 있으라고?”

“아니, 그게 아니라.”

“뭔데.”

샤르망이 어떻게 질문할지 한참 고심하다 입을 열었다.

“혹시 인생 최대의 원수를 맞닥뜨리면 하고 싶은 말이 있나?”

그러자 아힐은 의미를 곱씹는 듯 한참을 멍하니 쳐다보더니 아까보다 더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인생…… 최대의 원수?”

“어, 그러니까 가령 너를 죽, 아니, 너 아니면 네 소중한 사람을 죽이고자 하는 사람이 눈앞에 있다면. 만약에 그렇다면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을까?”

그 말이 대체 뭐라고.

궁금해서 내놓은 하찮은 질문에 샤르망의 얼굴이 뜨거워질 것 같았다.

샤르망은 결국 아힐이 다시 입을 열기도 전에 손을 저었다.

“아니야. 그냥 흰소리라고 생각해. 책을 많이 읽어서 머리가 어떻게 됐나 봐.”

“그래, 그럼.”

아힐이 의자를 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도 제법 몸이 굳었는지 기지개를 켜며 앓는 소리를 냈다.

그게 인간다워 샤르망이 몰래 작게 웃었다.

문을 열자 밤공기가 훅 들어왔다.

샤르망은 문을 나서는 아힐을 보다 또 갑자기 사라지기 전에 그를 붙잡았다.

“아, 저기.”

“응?”

“다른 게 아니라 오늘 고마웠다고.”

단순한 한마디였는데 아힐의 양쪽 입꼬리가 보기 좋게 올라갔다.

“아까 인생 최대의 원수한테 하고 싶은 말이 뭐냐고 물었던가?”

“……잊으라니까.”

“신선한 질문 같아서 잠깐 생각해 봤는데.”

“…….”

몇 번이나 잊으라고 해놓고, 어느새 샤르망의 눈은 기대감으로 가득 차 아힐의 입을 향해 있었다.

“글쎄, 날 죽일 놈이 있을까 싶긴 한데.”

그래, 그는 강한 자였지.

그날 샤르망이 이겼던 것도 천운에 가까웠다. 모든 게 다 맞아떨어지는.

샤르망은 그 소리에 인정하듯 끄덕였다.

그런데 그때, 아힐 더프의 입이 열렸다.

“정말 그런 자라면 가장 질 나쁜 욕을 던지지 않을까? 이를테면 $*@^#같은.”

느닷없이 쏟아진 욕에 샤르망의 눈에 휘둥그레졌다.

저런 욕이 있다고?

그런데 이어진 말이 더 놀라웠다.

“어때? 네가 자주 쓰던 말을 써봤는데 나쁘지 않지?”

그걸 이 입으로 쏟아냈다고? 이렇게 예쁜 얼굴로?

맙소사였다.

샤르망은 별 해괴한 걸 다 본다는 표정으로 질색하며 그를 밀었다.

“내가 실수했군. 얼른 가.”

실없는 소리를 듣고 나자 실망감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알게 모르게 자괴감이 들었다.

그래, 자신은 그에게 어쩔 수 없었다는, 자신의 선택이 아니었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을 듣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제 죄를 조금이나마 씻으려는 그런 혐오스러운 생각을 했던 거다.

아힐은 떠밀리며 호탕하게 웃었다.

“알았어, 갈게.”

“그래.”

아힐이 샤르망을 빤히 보더니 불쑥 말을 꺼냈다.

“진짜 네 선택을 하고 살아. 그리 말했겠지. 난 그다지 원한 살 짓은 안 하고 살거든.”

그리고 ‘나한테 들이댈 실력이라면 너무 아깝지 않아?’라고 덧붙이며 피식 웃었다.

“…….”

샤르망은 바보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뭐 그렇지 않았을까. 문단속 잘하고 자라.”

사뭇 다정한 인사와 함께 아힐은 그때처럼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샤르망은 또 그때처럼 멍하니 사라진 곳을 쳐다봤다.

“…….”

올곧은 괴짜, 제법 다정한 괴짜.

아무리 봐도 이상한 남자였다.

본래 탐욕에는 만족이 없다.

강한 힘을 가지고 있어도 더, 더, 더.

더 강한 걸 찾기 위해, 정복하기 위해 또는 그것을 지키기 위해 더욱 탐욕스러워진다.

자신도 한때 그러지 않았나.

눈앞의 강함에 홀려 스스로 라칸의 개가 되었던 때처럼.

역시 괴짜.

자조적으로 웃으며 뒤돌아 문을 닫으려는데 어두운 밤하늘을 가르는 높은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샤르망의 얼굴에 기쁨이 번졌다.

샤르망은 소리가 들린 쪽을 향해 홱 몸을 돌렸다.

“버키.”

예상했던 날에 맞추어 버키가 돌아온 것이다.

곧이어 밤하늘보다 더 짙은 검은색이 샤르망에게 올곧게 하강하기 시작했다.

샤르망이 익숙하게 팔을 올리고 단단히 힘을 주었다.

저번처럼 또 휘청이면 버키가 토라질 테니 말이다.

“구르르르—”

샤르망의 팔에 내려앉은 버키가 다리 하나를 쭉 내밀었다. 다리에 작은 쪽지가 달려 있다.

“엘프들이 달아줬니?”

“구륵.”

샤르망은 웃으며 다리에 달린 쪽지를 풀어냈다.

“엘프들이 잘해줬어?”

버키는 샤르망의 몸이 휘청일 정도로 크게 날갯짓을 했다.

그곳에 간 동안 아주 극진한 대접을 받은 모양이었다.

역시 버키를 보낸 게 정답이었다.

샤르망은 힘겹게 문을 열어 버키가 먼저 들어가게 해준 뒤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버키에게 물과 먹을 것을 간단히 챙겨주고 옆에 앉아 쪽지를 펼쳤다.

아무리 버키를 보냈다고 해도 본론부터 말하면 대차게 거절할 것 같아서 소로 숲에 방문해도 되는지만 물어보긴 했는데…….

과연 그들이 어떤 답을 내줬을지.

샤르망은 쪽지 안의 내용을 확인하자마자 웃음을 터뜨렸다.

두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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