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4화.
루헤가 준비해 둔 이정표를 따라 다섯 명은 밀림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말 루헤의 말처럼 갖가지 괴식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휘온의 눈이 커졌다.
“저, 정말 식물학 도감에서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들뿐이로군요!”
그가 품 안에서 노트를 꺼내 미친 듯 필기를 시작했다.
제국 식물학계에 새로운 역사가 쓰이는 순간이었다.
프리트는 장검을 꺼내 들고 새로운 과일이 보이는 즉시 베어버렸다.
서걱—
그리고 곧바로 제 입에 넣어 맛을 보았다.
산수이가 경악해 소리쳤다.
“폐하, 독이라도 들어있으면 어쩌려고 그렇게 막 드시는 거예요!”
“독이 든 과일이라면 남작 그대가 미리 말려주겠지, 뭐.”
“저라고 여기 있는 과일 종류를 모두 다 아는 건 아니거든요?”
“여차하면 저기 마왕 놈도 있잖아. 어이, 내가 쓰러지면 치유 마법으로 살려내, 알겠지?”
루헤가 프리트를 향해 하품했다.
“귀찮은데요.”
“네놈이 말은 그렇게 해도 살려줄 거 다 알고 있어.”
“……바로 죽여드려요?”
그렇게 두 남자가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 사이.
얀피르는 열심히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바로, 아까 산수이가 그림을 그렸던 그 식물.
배추라고 했던가.
‘뭔진 몰라도, 주인이 원래 세상에서 즐겨 먹던 채소가 분명해.’
그럼 왜 지금껏 자신에게 말하지 않았던 걸까.
원하는 건 뭐든 만들어주겠다 했었는데.
저에게 부담을 주기 싫었나?
원래 세계에 대해 말하는 게 미안한가?
아니, 애초에 우리가 그런 얘기조차 털어놓지 못하는 사이였나?
‘어느 쪽이든, 최악의 남편이잖아.’
여러 생각이 얀피르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산수이가 찾는 그 식물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 사이 산수이는 루헤에게 설명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어? 이건 고사리인 것 같네요. 말려서 볶아 먹으면 맛있어요.”
“흐응.”
“그리고 저건 쑥이네!”
“정말로 모르는 게 없네요, 수이.”
“네. 게다가 여기 있는 건 전부…….”
과일도, 채소도 온통 식용 가능한 것들뿐이었다.
‘우연치고는 좀 이상한데?’
산수이가 말했다.
“아무튼 딱히 독이 든 건 없어 보여요, 루헤.”
옆에선 한차례 식물학 도감을 완성한 휘온이 기쁨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완성했다!”
그렇게 어느 정도 분석을 마친 그들은 다음 장소로 이동하기로 했다.
루헤가 말했다.
“이다음 구역에 수이가 찾는 그 식물이 있을 거예요.”
“아, 드디어! 얼른 가 봐요!”
“특별한 채소인가 봐요, 수이?”
“그럼요. 그게 있으면 정말 많은 음식을 만들 수 있거든요.”
“흐응, 기대할게요.”
그런 둘을 바라보는 얀피르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내가 그렇게 필요한 게 없냐고 물어봤을 땐, 아무 말도 해 주지 않았으면서.’
하지만 산수이는 곧 배추를 볼 수 있다는 기쁨에, 얀피르를 신경 쓰지 못했다.
그들 다섯은 또다시 이정표를 따라 이동했다.
그리고.
끼익—
그들이 사라지자 또다시 이정표의 위치가 슬며시 뒤바뀌었다.
그렇게 점점 더 밀림 깊은 곳으로 들어간 산수이 일행들.
그러나 이번엔 아무리 걸어도 특이한 식물이 보이지 않았다.
프리트가 루헤에게 불평했다.
“이봐, 마왕. 이제 금방이라 하지 않았어? 도대체 얼마나 더 걸어야 하는 거야?”
“…….”
루헤 역시 이상하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분명 수하들을 통해 이정표를 심어뒀었는데.
그런데 왜 잘못된 길로 안내했지?
그가 손을 뻗자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마력으로도 원인을 찾을 수 없었다.
그 역시도 혼란스러웠다.
그때, 갑자기 저 멀리서 반짝이는 빛이 보였다.
그 빛을 발견한 모두가 걸음을 멈췄다.
“저건 뭐지?”
뭔가 수상했다.
하지만 모두의 마음엔 호기심이 더 크게 일었다.
그들은 빛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건.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거대한 연못이었다.
“?!”
산수이는 저도 모르게 환호성을 질렀다.
“오, 온천?”
밀림 안에 난데없이 온천이라니.
하지만 그들의 눈앞에 명확한 실체가 있었다.
온천이 만들어내는 뿌연 수증기가 하늘 높이 솟아오르고 있었고.
물은 바닥이 다 보일 정도로 투명하게 빛났다.
그 장관에 모두가 입을 벌린 채 서 있었다.
산수이가 루헤를 향해 물었다.
“온천에 대해서도 알고 계셨나요, 루헤?”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이건 보고받지 못했어요.”
그러자 얀피르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 말은, 우리가 이정표를 벗어났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마족?”
“……부정하지 않을게요.”
“너 이 자식! 그게 지금 할 소리야?”
얀피르가 루헤의 멱살을 잡았다.
“진정해요, 드래곤. 일부러 그런 건 아니니까.”
“네놈도 몰랐다는 말이야?”
“네. 게다가 여전히 이곳의 위치를 파악할 수가 없네요.”
루헤가 서늘한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감히 누가 제 마력을 무력화시키고 있는 걸까요……?”
하지만 그의 의문은 이어지는 소리에 묻혀버렸다.
첨벙-!
어느새 프리트가 바지를 걷고 온천 안으로 들어가 버렸기 때문이다.
“물 온도가 아주 딱 좋군.”
휘온이 비명을 질렀다.
“폐, 폐하! 그러다 옥체가 상하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상하긴 뭐가 상해. 고작 온천수일 뿐인데.”
산수이 역시 프리트를 다그쳤다.
“위험한 마법이라도 걸려있는 온천이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위험하긴 무슨. 나를 봐, 아주 멀쩡하잖아? 혹시 무슨 일이 생겨도…….”
루헤가 얼굴을 찡그렸다.
“왜 저를 보시죠? 당신이 죽든 말든 관심 없다니까요.”
“아 잔소리들 좀 그만하고, 일단 들어와 봐. 여기 물이 정말 끝내준다니까?”
프리트는 이제 세수까지 하고 있었다.
“이제야 좀 살 것 같군!”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모두의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꿀꺽.
그들 역시 제국 최고의 목욕 덕후들이었으니까.
특히나 산수이의 얼굴이 압권이었다.
그녀는 피어오르는 덕심을 채 숨기지도 못하고 있었다.
‘들어가고 싶다……. 나도 저 온천 안에 들어가 보고 싶다!’
밀림 한복판에 있는 온천이라니?
살면서 이런 걸 또 경험해볼 수나 있을까?
흥분한 산수이의 콧구멍이 벌름거렸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선뜻 온천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새 물 밖으로 나온 프리트가 모두를 보며 혀를 찼다.
“쯧, 겁들만 많아서.”
얀피르가 산수이의 표정을 보곤 물었다.
“주인, 너도 들어가 보고 싶어?”
그녀가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잠시만 기다려 봐.”
그 말과 동시에 얀피르가 제 웃옷을 훌렁 벗어 던졌다.
그리고 누가 말릴 새도 없이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풍덩-!
“야, 얀피르?!”
얀피르는 온천 깊은 곳으로 잠수해 들어갔다.
얼마 후 물 밖으로 솟구쳐나온 그가 말했다.
“안전하네. 들어가도 되겠어.”
그가 산수이에게 다가와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러고는 나머지 세 남자를 향해 말했다.
“나는 주인하고 저쪽 반대편 연못에 가서 씻고 올 테니까, 네놈들은 여기서 씻어. 한 시간쯤 있다 여기서 만나면 되겠지?”
프리트가 분개했다.
“이 자식이 근데? 지금 우리 앞에서 신혼인 거 자랑하냐?”
“뭐 어쩌라는 거야. 네놈들하고 다 같이 씻을 순 없잖아. 아무튼, 우린 이만 간다?”
그렇게 얀피르는 산수이를 안고 저 멀리 사라져버렸다.
이제 이곳에는 세 남자만이 쓸쓸하게 남겨져 있었다.
프리트가 중얼거렸다.
“젠장. 제국으로 돌아가면 얀피르 저놈을 더 굴려야겠어.”
휘온 역시 끄덕였다.
“제 몫까지 잘 부탁드립니다, 폐하.”
루헤는 하품과 함께 손가락을 튕겼다.
검은 로브가 연기처럼 사라지고, 그의 나신이 드러났다.
그러자 루헤의 몸에서 매혹적인 페로몬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주위에 있던 모든 꽃과 나무들이 그를 향해 기울었다.
‘이런.’
루헤가 서둘러 제 매력을 거둬들였다.
다행히 그의 기운이 프리트와 휘온한테 퍼지진 않은 모양이었다.
‘귀찮을 뻔했네요.’
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온천 안으로 들어갔다.
루헤는 곧 눈을 감고 깊은 명상에 잠겼다.
프리트 역시 온천을 보며 씩 웃었다.
“좋아, 기왕 여기까지 온 거, 충분히 즐겨줘야지.”
프리트는 옷을 훌러덩 벗고 물 안으로 점프해 들어갔다.
그가 구릿빛 근육을 뽐내며 온천 안에서 마음껏 자유형을 했다.
혼자 남겨진 휘온은 두 남자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으음, 저하의 피부에 발진이 올라오진 않는군. 루헤 님을 보니 딱히 위험한 마법이 걸려있는 것 같지도 않아. 얀피르 놈이 잠수까지 해서 확인한 걸 보면, 물 안쪽도 안전한 것 같고.’
마침내 그 역시 옷을 벗고 온천 안으로 들어갔다.
휘온의 잘 관리된 피부는 햇살 아래서 더욱 눈부시게 빛났다.
그렇게 신나는 목욕 타임이 시작되었다.
***
세 남자 사이에선 한동안 평온한 침묵이 이어졌다.
울창한 밀림 속에서 즐기는 온천은 난생 최고의 경험이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프리트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말이야, 마왕. 여기선 네놈의 마력이 잘 듣지 않는 것 같던데?”
“……물장구치고 놀고만 있던 줄 알았더니, 눈치는 빠르네요.”
“사실이라면 엄청 심각한 문제잖아?”
루헤가 크게 하품했다.
“나가는 길만 찾으면 되니 뭐, 딱히.”
“그거야 이따 얀피르 놈 타고 날아가면 되잖아.”
“뭐, 그렇죠.”
“아무튼 네놈의 마법에 문제가 생긴 건, 이 밀림 속 한정이라는 거지?”
“네.”
“흐음.”
도대체, 이 수상한 밀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세 남자는 잠시간 말이 없었다.
그때였다.
“크윽……!”
갑자기 루헤가 제 가슴을 부여잡았다.
“이, 이봐 마왕?!”
프리트와 휘온은 깜짝 놀랐다.
여태껏 마왕인 그가 저렇게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던가?
휘온이 물었다.
“루헤 님, 괜찮으신 겁니까?”
루헤가 휘온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갑자기 루헤의 눈이 커졌다.
“……!”
곧이어 루헤의 눈동자가 짙은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가 몸을 일으켜 휘온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루, 루헤님?”
루헤가 손바닥으로 휘온의 얼굴을 덥석 잡았다.
깜짝 놀란 휘온이 몸을 떨었다.
“왜, 왜 이러십니까?”
“공작.”
“예, 루헤 님?”
“저에게 윙크 한 번만 해보시겠어요?”
“예, 예에에?!”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프리트 역시 경악해 소리쳤다.
“이 미친놈이 지금 뭐라는 거야?!”
휘온의 동공은 갈 곳을 잃고 방황했다.
“대, 대체 왜 갑자기 그 위, 윙크를!”
하지만 루헤의 표정은 진지했다.
“설명할 시간이 없어요, 빨리.”
그의 표정을 본 프리트와 휘온은 직감했다.
뭔진 몰라도, 이 수상한 밀림과 휘온의 윙크에 모종의 관계가 있는 모양이었다.
결국 고뇌 끝에 휘온은 마음을 먹었다.
“이, 이이 이렇게 하면 되겠습니까?”
그가 루헤를 향해 한쪽 눈을 살짝 감았다 떴다.
찡긋-!
“……!”
하지만 루헤는 아무 말이 없었다.
‘부, 부족했나?’
휘온이 몇 차례 더 윙크했다.
찡긋, 찡긋!
그 모습을 보며 루헤는 확신했다.
휘온이 제게 윙크하는 모습을 보자, 자신의 심장이 미친 듯 뛰기 시작한 것이다.
루헤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아, 역시 제 예상대로군요.”
옆에서 궁금해 폭발하기 직전이었던 프리트가 외쳤다.
“왜, 대체 뭔데 그래!”
하지만 루헤는 대답 대신 휘온에게 말을 이었다.
“공작, 인간의 황제에게도 한번 윙크해 주세요.”
“이, 이렇게 말입니까?”
휘온이 프리트를 향해 눈을 깜빡였다.
찡긋-!
두근-!
그와 동시에 프리트의 가슴 역시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프리트가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뭐, 뭐야? 내 심장이 왜 이래? 윙크하면 심장마비 오는 마법이라도 걸린 건가?”
“아뇨, 그게 아니라.”
루헤가 고개를 저었다.
“제가 가진 미혹술이…… 휘온 공작에게로 넘어간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