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산수이를 찾아 비덴산의 숲속을 헤매고 있던 루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수도교 공사 현장 근처에서 그녀와 슐레히트를 찾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 마왕님의 마음은 너에게 향해 있는데, 인간 넌 다른 이를 사랑한다고 하니 어쩌나……?]
슐레히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을 듣는 순간, 루헤의 가슴이 난생처음 느껴보는 통증으로 짙게 물들었다.
‘……썩 유쾌하진 않네요.’
하지만 루헤는 자신이 받은 상처 따위에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어느새 슐레히트의 날카로운 손톱 끝에서 그녀의 붉은 피가 흐르기 시작했으니까.
그 작은 한 방울이 흐르는 것조차 내게는 너무나 아까웠는데, 어떻게 네놈이 감히.
그때 산수이가 저를 향해 외치는 소리를 듣고 루헤는 정신을 번뜩 차렸다.
“루헤, 수도교예요!”
그가 놀란 표정으로 산수이를 바라봤다.
수도교라니. 그럼 지금 그녀가 생각하고 있는 게, 혹시.
“수이, 설마……?”
“수도교를 폭파해줘요, 루헤!”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이 작은 인간 여자는 어쩜 이렇게 매번 자신을 놀라게 하는 거지?
그녀가 저 수도교라는 것을 짓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데.
그런데 정말로 저걸 부숴버리라고?
“수이, 진심이에요?”
“난 괜찮으니까, 빨리요!”
둘 사이의 대화를 듣고 있던 슐레히트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수도교? 그게 대체 뭐…….”
하지만 슐레히트가 상황을 파악하기 직전.
루헤가 먼저 새빨간 눈을 빛내며 자신의 손가락을 튕겼다.
쾅-!
순간 우레와 같은 굉음과 함께, 산등성이와 계곡 사이에 세워져 있던 수도교가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콰르르.
이와 함께 교량이 받치고 있던 수도관이 터지면서, 마족군이 서있던 계곡으로 대량의 물이 쏟아져 흘렀다.
“으, 으아악!”
슐레히트 역시 거센 물살에 휩쓸려 산수이를 놓쳐버렸다.
“이, 이 인간 계집이!”
그는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지만, 결국 순식간에 저 아래로 떠내려 가버리고 말았다.
다른 마족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머리 위에서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교량의 파편과 물줄기 때문에 주문도 제대로 외워보지 못한 채 허우적댔다.
그 틈을 비집고 루헤가 재빨리 산수이를 물속에서 건져내 허공 위로 날아올랐다.
그때, 저 멀리서 검은 형체가 날아왔다.
얀피르였다.
“주인!”
빛의 속도로 날아온 그가 루헤와 산수이를 자신의 등에 태웠다.
“주인, 다친 데는 없어?”
“나는 괜찮으니까 어서 저 아래 물을 전부 다 끓여줘, 얀피르!”
“목욕물처럼?”
“응!”
“알겠어.”
얀피르는 자신의 일족에게 대대로 내려오는 고대 드래곤의 주문을 외웠다.
그의 입에서 새빨간 오라와 함께 불의 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화악—
그러자 계곡 아래로 쏟아져 내리던 물줄기가 목욕하기 딱 알맞은 온수가 되어 모락모락 김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됐어!’
산수이가 루헤에게 고개를 돌렸다.
“루헤, 저를 한 번만 더 도와주실 수 있나요?”
루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무엇이 필요한가요, 수이?”
“제게 아주 아주 길고 커다란 이태리타월 하나만 만들어 주세요. 채찍처럼 쓸 수 있으면 더 좋겠어요.”
루헤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설마 지금…… 때를 밀려고요?”
“네, 그게 사실.”
잠시 망설이던 산수이가 곧 결연한 표정으로 천천히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았다.
“저에게 때를 밀리면, 그게 누구든 긴장을 풀고 속마음을 털어놓게 되거든요.”
“……!”
그 말을 들은 얀피르와 루헤가 놀란 눈으로 동시에 그녀를 돌아보았다.
이게 바로 그 이유였구나.
산수이 그녀에게 때를 밀리기만 하면,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한 기분이 들던 것이 말이다.
루헤는 산수이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곧바로 허공에 손을 뻗었다.
“그럼, 분부대로.”
그렇게 검은 연기와 함께, 허공에서 거대하고 길쭉한 초록색 이태리타월이 생겨났다.
뿅-!
그 대형 때수건은 하늘 위에서 깃발처럼 펄럭이며, 계곡 아래 떠다니는 마족들의 위로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갑작스레 쏟아지던 지하수가 뜨뜻한 온수로 변한 것도 기가 막힐 노릇이었는데.
이젠 초록색의 기다란 괴물체까지 등장하자, 마족들은 아연실색했다.
“저건 또 뭐야!”
“뭐긴 뭐야, 때 밀 시간이지!”
산수이가 제 손에 들린 기다란 이태리타월을 채찍처럼 휘두르며 물에 빠진 마족들을 향해 강하게 내리쳤다.
찰싹-!
“시원하게 밀어드릴게요, 고객님들!”
“크, 크악!”
계속되는 채찍질 소리와 함께, 마족들의 비명이 온 공간을 채웠다.
그렇게 산수이는 얀피르를 타고 날아다니며, 물속에 잠겨있는 마족들에게 신명 나는 때수건 채찍질을 이어갔다.
게다가 마족들이 온수 안에 들어가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들의 몸은 계속해서 더 발갛게 달아올랐다.
“아주 때 밀기 좋게 잘 불었네? 얀피르, 이번엔 저쪽으로!”
“좋아!”
얀피르는 산수이의 요청에 따라 계곡 근처를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진창이 된 웅덩이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마족들의 몸을, 아주 구석구석 깨끗이 밀어줄 수 있도록.
찰싹-찰싹!
“크, 크아악!”
“우리 고객님들, 너무 좋으신가 보다. 그럼 더 열심히 밀어드려야죠!”
“사, 살려줘!”
마족들은 살아남기 위해 서둘러 물 밖으로 기어 나왔다.
하지만 곧바로 산수이의 때수건에 맞아 다시 온탕…… 아니, 물속으로 빠져버리고 말았다.
풍덩-!
벅벅벅-.
그렇게 죽음의 무한 굴레 때밀이가 계속되었다.
거대 이태리타월에 때를 밀릴수록, 마족들은 정신이 점차 혼미해졌다.
‘아아, 분명 매를 맞고 있는데 왜 이렇게 시원하지?’
저 까끌까끌한 게 몸에 와서 닿을 때마다, 천년 묵은 번뇌가 모조리 씻겨져 내려가는 것만 같았다.
마법으로 몸을 세척할 때는 결코 느껴본 적 없었던, 극강의 카타르시스.
그렇게 한참을 때수건에 뚜드려 맞던 그들은, 결국 산수이가 있는 허공을 향해 제 속내를 모두 털어놓기 시작했다.
“나, 사실 집에 가고 싶어. 며칠째 행군만 해서 다리 아파.”
“슐레히트 저놈을 믿어도 되는 거야?”
“근데 이건 대체 뭐지? 엄청 시원한데?”
그렇게 산수이에게 때를 모조리 밀려 빨갛게 달아오른 마족들.
그들은 저마다 행복한 미소를 지은 채 물 위에 나른하게 동동 떠다녔다.
“하아, 전쟁이고 뭐고 그냥 너무 좋다아…….”
산수이의 옆에서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루헤는 자꾸만 웃음이 났다.
‘수이, 당신이란 인간은 정말이지.’
그때, 루헤의 눈에 무언가 들어왔다.
“……!”
그것은 지금껏 물 밖에 매복해있던 또 다른 마족 군단이었다.
수많은 마족 군사들이 온수를 피해 계곡을 빙 둘러서 달려 나오고 있었다.
“인간 여자,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냐!”
그것은 산수이의 때수건 채찍질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숫자였다.
그들을 발견한 산수이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이걸 어쩌지?”
그러자 뒤에서 잠자코 있던 루헤가 입을 열었다.
“……어쩌긴요, 이젠 나한테 맡겨야죠.”
“네? 하지만 루헤 당신이 동족들을 공격하게 만들 수는 없어요!”
“하아, 수이. 지금은 전쟁 중이라고요. 까딱했다간 되레 당신이 죽어요.”
“하지만……!”
“고민할 시간 따윈 없어요.”
그렇게 루헤는 천천히 마족들을 향해 제 손을 내뻗었다.
그때였다.
“남작-!”
“산수이!”
어디선가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산수이가 내려다본 곳엔, 프리트와 휘온이 제국의 군사들을 이끌고 진군해오고 있었다.
이윽고 수도교 근처에 도달한 그들은 눈앞에 펼쳐진 참상을 보고 아연실색했다.
프리트가 혀를 내둘렀다.
“아니 이건 대체? 여기서도 목욕탕을 차린 거야, 남작?!”
휘온이 무너져버린 수도교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산수이 그대는 전술에도 능했군요.”
그때 산수이의 머릿속에 번쩍 하고 떠오르는 아이디어가 있었다.
“루헤! 이태리타월을 더 만들어 줄 수 있나요?”
“얼마나요?”
“저 아래 있는 이들의 숫자만큼이요. 그리고.”
루헤는 산수이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눈치챘다.
“……당신의 능력을 담아서 말이죠.”
“네, 맞아요.”
둘은 서로를 보며 씩 웃었다.
루헤가 하늘을 향해 손을 뻗자 곧바로 무수한 이태리타월이 지상을 향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마족들은 크게 당황했다.
“초, 초록색 비가 내린다!”
산수이가 지상에 있는 두 남자를 향해 소리쳤다.
“프리트, 휘온! 어서 그걸로 마족들의 때를 밀어주세요!”
“썰어버리는 게 아니라 때를 밀라고? 지금 제정신이야, 남작?”
“이렇게 하면 피 흘리지 않고 전쟁을 끝낼 수 있어요. 절 한 번만 믿어주세요!”
한편, 마족들은 지금 대관절 인간들이 무슨 얘기를 나누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때를 민다는 게 대체 뭐야?”
“아까 그 이상한 초록색 채찍으로 때리던 걸 말하는 건가?”
“하지만 지금 하늘에서 내려오는 건 채찍이 아니라 주머니인데?!”
그때였다.
갑자기 휘온이 바닥에 떨어진 이태리타월을 하나 집어 들어 자신의 손에 끼우기 시작했다.
“……?”
저걸 왜 손에 끼워?!
심지어 그는 제 손에 끼워진 이태리타월로 뜬금없이 스스로의 목덜미를 밀기 시작했다.
슥-
“!”
마족들은 점점 더 혼란에 빠졌다.
‘저 이태리타월이라는 무기는 혹시 힘을 증폭시켜주는 마도구인가?!’
휘온은 마족들이 자신을 주목하는 것을 알아챘다.
그가 이번에는 이태리타월로 제 옆에 서있던 병사의 얼굴을 슬쩍 밀었다.
“하으으응-!”
그러자 그 병사는 외마디 신음과 함께 다리가 풀려 주저앉더니 무어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
그 놀라운 광경을 모두 지켜보고 있던 마족들은 혼란에 빠졌다.
‘자신에게 쓰면 힘이 증폭되고, 남에게 쓰면 힘을 흡수하는 무기인가 보구나!’
이제 마족들은 저마다 땅에 떨어진 이태리타월을 집어 들어 손에 끼우고는…….
하나같이 제 옆에 선 전우의 몸을 몰래 밀기 시작했다.
이 전쟁에서, 오로지 자신만이 더 큰 공훈을 세우겠다는 일념 하나로.
“크으으응……!”
그렇게 때를 밀려 나른해진 그들은 한 발자국도 채 떼지 못한 채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휘온은 사실 잘 알고 있었다.
마족들은 보통 호기심이 많고, 질투심 때문에 남을 따라 하길 좋아한다는 것을.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잘 걸려들 줄은 몰랐는데.’
이어서 프리트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병사들을 향해 외쳤다.
“다들 이태리타월로 마족들의 때를 밀어주도록! 놈들을 모두 생포한다-!”
제국의 병사들은 모두 땅에 떨어진 이태리타월을 손에 하나씩 끼웠다.
그리고 빠르게 달려나가 마족들의 때를 밀기 시작했다.
프리트 역시 제 눈앞에 선 덩치 큰 마족 한 마리를 붙잡았다.
그를 거칠게 꿇어 앉힌 후 때를 밀기 시작했다.
“하, 하악……!”
“가만히 좀 있어, 때를 밀 수가 없잖아!”
우악스럽게 마족의 때를 미는 프리트의 팔뚝에서 힘줄이 불거졌다.
곧 그의 근육 아래에서 수십 명의 마족들이 전의를 상실한 채 바닥에 길게 늘어졌다.
게다가, 그들의 입에서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온갖 비밀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사실 마계에는 숨겨진 보물이 있는데…….”
“인간계로 몰래 나가던 비밀 통로가 어디 있냐 하면요.”
물론, 그들이 왜 이렇게 속내를 터놓는지 알고 있는 건 산수이와 함께 하늘을 날고 있는 두 남자뿐이었지만.
그렇게 제국은 마침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평화로운 승리를 이뤄낼 수 있었다.
“이겼다!”
산수이가 기쁨에 가득 차 소리 질렀다.
루헤는 제 앞에 있는 산수이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항상 불가능하다고만 생각해서 자신은 지레 포기했던 일을, 그녀가 정말로 해냈다.
귀찮은 전쟁 없이 모든 것을 평화롭게 마무리하는 일을.
그것도 이 작고 가냘픈 인간 하나가.
이윽고 얀피르가 지상으로 내려왔다.
루헤는 바닥에 나른하게 널브러져 있는 마족들을 바라보았다.
프리트가 루헤에게 다가와 그의 어깨에 손을 턱 하니 올렸다.
“정말로 약속을 지켰군, 마왕.”
“속고만 살았나 보죠, 인간의 황태자.”
루헤가 손가락을 들어 올리자 바닥에 쓰러져있던 마족들이 공중에 떠올랐다.
그가 보이지 않는 밧줄로 모두를 포박했다.
프리트가 루헤를 향해 물었다.
“설마 그 전범들을 풀어줄 생각은 아니겠지?”
“우선은 마계의 감옥으로 보낼 생각입니다만, 원하신다면 제국으로 데려가세요.”
“아아, 됐어. 이미 잡아 처넣은 놈들만 해도 감옥이 터질 지경이야.”
프리트가 루헤를 향해 씩 웃으며 덧붙였다.
“곧 다시 보자고, 마왕. 아직 마무리 짓지 못한 이야기가 있잖아.”
“……그럼 다녀오죠.”
그렇게 루헤는 검은 연기와 함께 모든 마족들을 데리고 허공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그들은 승리감에 도취한 나머지, 포박되어있는 마족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이 하나가 빠져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