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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세신사 영애님-118화 (118/150)

118화.

이미 한참 전에 마계에서 빠져나온 마족 군단들은 저 멀리 제국을 향해 진군하고 있었다.

경계 쪽에서의 소탕이 어느 정도 끝나자, 프리트와 얀피르는 다시 하늘을 날아 제국 수도로 향했다.

프리트가 부재해 있는 동안 휘온은 서둘러 제국민들을 대피시켰다.

하지만 마족 군단들은 어느새 수도 근방까지 밀려들었다.

그들은 눈앞에 인간이 보이는 대로 살해하기 시작했다.

“끄아악!”

“키키키!”

참혹한 학살이 계속되었다.

새카맣게 밀려드는 마족 군단 앞에, 모든 희망이 사라졌다 생각되던 순간.

갑자기 하늘 위에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깜짝 놀란 마족들이 소리쳤다.

“드, 드래곤?”

그리고 그의 등 위에서 황금빛 머리칼을 빛내며, 인간계의 황태자가 뛰어내렸다.

“네놈들의 상대는, 나다!”

프리트는 화려한 검술로 적들을 무참히 베어나가며 앞으로 나아갔다.

챙—

그가 검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수 마리의 마족들이 검푸른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게다가 하늘 위에서는 전설로만 여겨지던 드래곤 한 마리가 닥치는 대로 마족들을 제거하고 있었으니.

산지옥도 이런 지옥이 없었다.

화르륵-

“이, 이런 얘기는 없었잖아! 드래곤이라니!”

“슐레히트 님은 어딜 가신 거지?”

순간 그 이름을 들은 얀피르가 고개를 돌렸다.

‘슐레히트……?’

어디선가 들어 본 이름이었다.

분명, 그 과거의 전쟁에서.

“……!”

곧이어 얀피르의 머릿속에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마족들 중 유일하게 강력한 정신계 마법을 사용하던 자.

그때 선봉에 서서 제 종족들을 잔혹하게 학살했던 바로 그자가.

‘아직 살아있었어……?’

하지만 주위를 둘러봐도 그놈의 모습은 보이질 않았다.

얀피르는 남작령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만일 그자가 아직도 소멸되지 않고 살아있다면.

‘……주인이 위험해.’

***

슐레히트는 대부분의 마족 부대를 이끌고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수도로 향했던 이들은 그저 루헤의 눈을 속이기 위한 잔챙이에 불과했다.

슐레히트가 향하고 있는 곳은 바로 비덴비덴 남작령.

“서둘러라, 마왕의 여자를 생포하는 게 우선이다!”

산수이가 있는 곳이었다.

아무리 전쟁을 싫어하는 마왕이라지만, 그가 전력을 다하면 마족들을 모두 섬멸하는 것은 일도 아닐 것이었다.

슐레히트 역시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마왕보다 내가 먼저 그 인간 여자를 찾아내야 해.’

그렇게 슐레히트는 산수이의 기운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는 남작령의 뒷산에 있는 커다란 땅굴 앞에 도달했다.

하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도대체 이 마법진은……?’

그 인간의 여자가 숨어있다 추정되는 땅굴 앞에, 강력한 붉은 빛을 뿜어내는 마법진이 설계되어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곳에 새겨져있는 언어는, 이미 멸종한 드래곤족의 용언.

‘그럼 암시장에 떠돌던 그 소문이 사실이었단 말인가? 정말로 그때 살아남았던 드래곤이 있었어?!’

물론 그럴 리가 없었다.

분명 제가 그때 드래곤 족의 마지막 하나까지 숨을 끊어놓지 않았던가.

이 상황을 이해할 순 없었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드래곤 없이 마법진을 해제하는 건 절대 불가능할 거란 것.

이미 멸망해서 없어진 종족의 언어를 무슨 수로 해독해서 문을 연단 말인가.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제 발로 기어서 나오게 하는 수밖에…….’

***

한편, 루헤는 슐레히트의 흔적을 좇으며 이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향하는 곳이 좀 이상했다.

분명 슐레히트가 노리는 것은 인간계에서 가장 최상위에 있는 자, 바로 제국의 황제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방향이 수도가 아니다……?’

마침내 찾아낸 그의 흔적은 너무나 익숙한 곳으로 향해있었다.

그녀가 있는 곳.

이 모든 일의 시작점인, 비덴비덴 남작령이었다.

루헤는 심장이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슐레히트가 노리는 게 그녀였군요.’

새빨간 눈을 번뜩인 그는 검은 연기가 되어 곧바로 남작저로 이동했다.

하지만 그곳은 이미 텅 비어있었다.

평소대로라면 항상 뛰어나와 맞아주던 사용인들조차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비덴탕을 찾아보았지만, 그곳도 마찬가지였다.

‘어디 있지? 어디로 간 거지……?’

순간 그의 머릿속을 스치는 하나의 장소.

얀피르를 타고 날아간 산수이.

내가 만일 그 드래곤이라면 그녀를 어디에 숨겨뒀을까? 그녀가 가장 안전할 만한 곳이라면.

답은 하나였다.

루헤는 곧장 비덴산에 있는 드래곤의 땅굴 앞으로 날아갔다.

“수이……?”

하지만, 그곳에서도 산수이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

“……이.”

“……?”

“산수이, 일어나 봐.”

땅굴 속에서 울다 지쳐 잠이 든 산수이는 익숙한 목소리에 눈을 떴다.

“얀…… 피르?”

“그래, 나야.”

벌떡 일어난 산수이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얀피르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얀피르, 어디 있는 거야?”

“……여기야.”

그녀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걸어갔다.

출구가 가까워질수록 그의 목소리가 점점 더 선명하게 들려왔다.

마침내 출구에 도달해 위를 올려다보자, 그의 형형한 황금빛 눈동자가 보였다.

새카만 밤하늘과 대조되는 그의 눈빛은 마치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그가 산수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어서 와, 산수이.”

“얀피르, 무사했구나……!”

“그래. 이곳은 너무 위험해. 나와 함께 다른 곳으로 가자.”

“하지만 아직 안쪽에 모두가…….”

“괜찮아. 일단 너를 안전한 곳에 데려다 놓은 다음에, 내가 모두를 데려올게.”

“알겠어.”

그렇게 산수이는 얀피르의 손을 잡고 땅굴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그와 함께 향하고 있는 방향이 좀 이상했다.

“저, 얀피르? 우리 지금 어디로 가는 거야?”

“계곡 쪽으로 갈 거야.”

“계곡?”

계곡이라면 수도교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곳이었다.

‘공사장이 안전한 곳이라고……?’

석연치 않은 표정을 짓는 산수이에게, 그가 달래듯 말을 이었다.

“그곳에서 모두 기다리고 있어.”

“모두?”

프리트와 루헤가 그곳에 모여 있다는 건가?

그렇게 한참을 걷던 산수이는 문득 깨달았다.

얀피르, 그가.

‘……나를 산수이라고 부른 적이 있었나?’

어느새 저 앞에 수도교가 보였다.

그 밑으론 까마득히 꺾어 내려가는 계곡이 이어질 터였다.

산수이는 순간 걸음을 멈춰 섰다.

그러자 당황한 얀피르가 돌아보며 물었다.

“왜 그래? 거의 다 왔어. 이제 여기만 지나면-.”

“저, 얀피르? 그거 기억나?”

“뭐?”

“왜, 내가 힘들다 하면, 네가 내 이름 불러주곤 했잖아.”

산수이는 제 마음에 번져나가는 의문을 확인하기 위해 얀피르에게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자신의 그 말도 안 되는 물음에, 제 눈앞의 얀피르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산수이.”

“……아니, 그 이름 말고.”

산수이가 고개를 저으며 그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내 진짜 이름, 불러 줘.”

그러자 얀피르가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산수이 비덴비덴.”

“……!”

그 이름을 들은 산수이가 뒷걸음질 쳤다.

“넌 얀피르가 아니야……. 넌, 누구지?”

그 말을 듣자마자 얀피르의 입이 양쪽으로 길게 찢어졌다.

“이런, 벌써 들켰나.”

순간 그가 소름 끼치는 미소를 짓더니, 보랏빛 연기와 함께 다른 인영으로 변했다.

“너, 넌……?”

보라색 머리에 모노클을 쓴 그 마족은 어딘지 낯이 익었다.

“구면이지? 인간.”

“뭐……?”

“아아 그렇지. 넌 날 기억하지 못하겠군. 뭐, 이것도 인연인데 자비를 좀 베풀어 줘 볼까.”

슐레히트가 산수이에게로 다가와, 그녀의 이마에 손가락을 얹었다.

그러자 잊고 있었던 꿈의 기억들이 산수이의 머릿속에서 되살아났다.

“넌……! 그때 내 꿈에 나왔던 마족?!”

“뭐, 꿈이라기보단 너의 무의식 속이었지만.”

그 말과 동시에 슐레히트는 재빨리 산수이를 들쳐 업고 계곡 쪽으로 향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이거 놔!”

산수이는 그를 주먹으로 때리며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하지만 마족의 몸에 생채기 하나 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걱정하지 마, 인간. 마왕을 만날 때까진 널 죽일 생각은 없으니까.”

“……!”

“역시, 표정을 보니 우리 마왕님을 잘 알고 있는 모양이야. 그런데 참 이상하지? 왜 너의 눈엔 내가 마왕이 아닌, 다른 남자의 모습으로 보인 걸까?”

“뭐?”

슐레히트가 킥킥거리며 말을 이었다.

“내 모습이, 인간 네가 사랑하는 자의 모습으로 보이도록 했었거든.”

“……!”

“아아, 가엾은 우리 마왕님. 인간을 짝사랑하고 계셨다니.”

그렇게 히죽대며, 슐레히트는 마침내 산수이를 데리고 계곡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이미 수많은 마족이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슐레히트 님, 그 인간 여자는?”

슐레히트가 산수이를 땅바닥에 거칠게 내려놓으며 말했다.

“크윽!”

“마왕의 여자다.”

“!”

그 말에 마족들이 서둘러 산수이에게로 다가와 그녀를 결계로 포박했다.

그렇게 산수이는 보이지 않는 밧줄에 묶인 채 꼼짝없이 허공에 매달려있게 되었다.

그녀가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며 발버둥 쳤다.

“너네, 진짜 가만 안 둬!”

그런 산수이를 보며 마족들이 혀를 내둘렀다.

“어이, 인간. 넌 우리가 무섭지도 않냐?”

얼굴에서 시뻘건 용암이 흘러내리고 있는 괴수 마족이 물었다.

“무섭긴 누가!”

“마왕의 여자라더니, 기백이 장난 아닌데.”

마족들이 그녀를 향해 웃어젖혔다.

“난 마왕의 여자가 아냐! 그러니까 이거 풀어!”

그 말을 듣고 있던 슐레히트가 웃었다.

“아아, 그래. 인간 넌 다른 이를 사랑했었지.”

슐레히트가 제 날카로운 손톱으로 그녀의 턱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하지만 우리 마왕님의 마음은 너에게 향해 있는데, 이걸 어쩌나……?”

그때 모두의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를 놔 줘요.”

검은 연기와 함께 루헤가 모습을 나타냈다.

슐레히트를 바라보는 그의 적안이 분노에 타오르고 있었다.

“오, 마왕 전하.”

슐레히트가 공손한 인사를 올리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누굴 찾으러 오셨나 봅니다?”

“……슐레히트, 이번에야말로 죽고 싶은가 보죠?”

“어이쿠, 저를 또 그때처럼 내동댕이칠 생각이십니까?”

슐레히트가 허공에 매달려있는 산수이의 목에 제 손톱을 겨누며 물었다.

“그럼 이건 어떨까요, 마왕님?”

“……!”

손톱이 찔려 들어간 산수이의 목에서 새빨간 핏방울이 새어 나왔다.

“크윽…….”

그 모습을 본 루헤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갔다.

지금 당장 슐레히트를 날려버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만에 하나라도 산수이가 다치게 된다면.

‘제길.’

루헤가 눈을 질끈 감으며 물었다.

“내게 원하는 게 뭐죠, 슐레히트?”

“그치, 그렇게 나오셔야지.”

슐레히트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내 눈앞에서 죽어.”

“……뭐라고요?”

“우리가 모두 힘을 합쳐도 마왕 네놈을 이길 수 없다는 건 인정. 그러니까, 스스로 죽으라고.”

슐레히트가 격노한 목소리로 루헤를 향해 계속해서 외쳐댔다.

“네놈만 아니었으면, 우리 마족은 선대 마왕님과 함께 진즉에 전쟁을 일으키고 인간계를 손에 넣을 수 있었어!”

그가 산수이의 목에 손톱을 더욱더 깊게 찔러넣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죽어, 마왕.”

“안 돼요!”

산수이가 소리쳤다.

“입 닥쳐, 인간!”

슐레히트의 손톱이 점점 더 그녀의 살 속으로 파고들었다.

하지만 산수이는 굴하지 않고 계속 외쳐댔다.

“이놈 말을 어떻게 믿어요? 믿지 마-! 그냥 난 신경 쓰지 말고 마구잡이로 공격해요! 루헤 힘세잖아!”

“시끄러워!”

손톱 끝에 맺힌 그녀의 핏방울이 점점 굵어졌다.

그와 함께 루헤의 표정도 초조하게 변해갔다.

“안 돼요, 루헤!”

제 목을 타고 흘러내리는 뜨뜻한 핏줄기에 산수이의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녀는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생각해, 분명 다른 방법이 있어. 다른 방법이…….’

그때 문득, 산수이의 머릿속에 한 가지 해결책이 떠올랐다.

‘……!’

물론 아무리 생각해봐도 미친 짓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결국 산수이는 침을 꿀꺽 삼키고, 제 입으로 그 말을 내뱉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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