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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세신사 영애님-115화 (115/150)

115화.

네 남자의 도움 아래 비덴비덴 남작령의 수도교 공사는 놀랍도록 빠른 속도로 완성되어가고 있었다.

산등성이와 계곡 사이를 가로지르는 수도교를 보며 산수이의 마음이 벅차올랐다.

‘이제 정말 거의 다 됐어……! 저것만 완성되면 비덴비덴 남작령은 다시 목욕 관광 명소가 될 거고. 그럼 난 드디어 사우나스 님을 만나는 거야.’

이렇게 며칠만 지나면 이 공사도 마무리가 될 터였다.

하지만 여전히 루헤는 자신의 앞에 다시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그날, 그렇게 자신의 앞에서 허무하게 사라진 루헤를 생각하면 산수이는 가슴이 답답했다.

‘또 믿어주지 못했어.’

비록 마족인 그이지만, 결코 위험한 존재가 아니란 걸 믿어보겠다고 해 놓고, 또.

자신을 바라보던 루헤의 마지막 그 쓸쓸한 표정이 자꾸만 떠올랐다.

생각해보면 그간 마족인 그를 경계하면서도 항상 그에게 크고 작은 도움들을 받아왔다.

‘그런데, 루헤는 왜 계속해서 나를 도와줬지?’

지레 걱정하던 계약의 대가 같은 것도 전혀 없었다.

‘으음. 볼 뽀뽀를 해달라고 조르긴 했었지만, 그것도 결국 얀피르가 해결해 줬었으니까.’

그러니 결국, 루헤는 항상 아무런 보답도 바라지 않고 자신을 도와준 셈이었다.

‘혹시 루헤가…… 나를?’

설마 좋아하나?

고작 때밀이가 좋아서 해준 일이라기엔, 루헤라는 인물 그 자체가 나른함의 화신이 아니었던가.

그제야 산수이는 그동안 루헤가 자신에게 보였던 수많은 애정의 증거들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자신을 끌어안던 루헤의 차갑던 손길.

계속해서 이어지던 비덴탕 방문들, 끊임없이 물어오던 수많은 질문들.

[그래서, 수이의 취향은 넷 중 누구죠?]

무도회에서 자신을 삼켜버릴 듯 바라보던 그 핏빛 눈동자.

[이런 모습을, 내가 다른 놈들한테도 보여줄 것 같아요……?]

말로는 귀찮다 해도, 결국엔 못이기는 척 자신의 부탁이라면 모든 들어주던 모습까지.

[이런 게 왜 필요하겠어요, 수이. 당신 옆에 대마왕이 있는데.]

‘그럼 그때, 사랑하는 것 같다고 말한 것도 설마……?!’

산수이는 뒤늦게야 그의 마음을 깨닫고 만 것이다.

아, 어떡해.

만일 이게 사실이라면, 그간 루헤의 마음도 모르고 그에게 받기만 한 게 된다.

게다가, 그의 마음이 자신을 향해 있다면 또 다른 문제가 하나 있었다.

‘발레아나는 어떡하지?’

머리가 아팠다.

사랑의 작대기가 꼬여도 한참 잘못 꼬인 게 아닌가.

만일 다시 루헤를 만나면 뭐라고 말해야 할까?

고마웠다고? 미안하다고?

그렇게 상념에 잠겨있던 산수이의 앞으로 커다란 그림자가 내려왔다.

“크르릉……?”

얀피르였다.

그가 새하얀 빛과 함께 드래곤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와 산수이의 앞에 가볍게 내려섰다.

“얼굴이 왜 그래, 주인. 무슨 고민 있어?”

얀피르가 수도교 건설 현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방금 둘러보고 왔는데, 문제없이 다 잘 진행되고 있어. 그러니까 걱정 안 해도 되는데.”

“그래? 다행이네.”

“……뭐야, 그 이유가 아니구나?”

그가 산수이의 뺨을 사랑스럽게 어루만졌다.

“뭐가 내 반려를 이렇게 걱정시킬까? 나한테 다 말해봐.”

그런 얀피르를 보며 산수이는 참담함에 빠졌다.

이 문제를 제일 해결할 수 없는 게 바로 너라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 남자 친구이신 분께서 이 문제를 뭘 어떻게 해결할 생각이십니까……?’

게다가 남자 친구 앞에서 다른 남자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산수이는 그냥 얀피르를 꼭 끌어안고 제 얼굴을 그의 가슴에 비볐다.

“……!”

예상치 못한 스킨십에 귀까지 새빨개진 얀피르가 산수이를 바라보며 물었다.

“주인……? 여기 바깥인데 이래도 돼?”

“왜, 싫어?”

“아니 나야 당연히 좋지만! 너는 들키는 거 싫어하니까.”

“몰라, 지금은 그냥 이러고 있을래.”

“……그럼 기왕 하는 김에 더.”

그렇게 말하며 얀피르가 제 입술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하여간 진짜.”

얀피르를 째려보던 산수이는 바로 그에게서 떨어져 반대편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버렸다.

당황한 얀피르가 서둘러 그녀를 쫓아갔다.

“주, 주인! 취소! 그냥 아까처럼 계속…….”

“이미 끝났습니다.”

“주인-!”

저택을 향해 홀로 걸어가며 산수이는 다짐했다.

다음에 루헤를 만나게 되면 꼭, 꼭 그 말을 하자고.

***

새벽녘.

산수이는 이상한 꿈을 꾸고 있었다.

“으…….”

앞은 온통 짙은 어둠뿐이었다.

한참을 걸어도 그 앞엔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하지만 얼마 후, 저 멀리서 루비같이 붉게 타오르는 두 개의 빛이 보였다.

산수이는 그 빛을 따라서 하염없이 걸어갔다.

그렇게 도달한 곳엔, 붉은 소파 위에 나른히 앉아있는 루헤가 있었다.

“……어서 와요, 수이.”

“루헤?”

산수이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자 칠흑 같았던 어둠이 밝아지며, 그들의 주위로 벽난로가 생겨났다.

팟—

이윽고 그녀가 앉을 수 있는 푹신한 소파와 담요 등이 차례차례 나타났다.

“편하게 앉아요.”

산수이는 루헤의 맞은편에 앉아 계속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들이 존재하는 이 작은 공간 이외에는, 여전히 모든 것은 어둠에 둘러싸여 있었다.

“루헤, 여긴 어디죠?”

“당신의 꿈속.”

“제…… 꿈속이요?”

그가 쓸쓸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래요. 당분간은 이곳이 아니면 안 돼서.”

그렇지 않으면 슐레히트가 당신을 찾아낼 테니까요.

루헤가 속마음을 삼킨 채 말을 이어갔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찾아왔어요, 수이.”

그런 루헤를 향해 산수이 역시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저도…… 저도 할 말이 있어요!”

“수이 먼저 말해요.”

산수이가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루헤를 의심해서 미안하다는 얘길 하고 싶었어요.”

그가 피식 웃었다.

“하는 수 없죠. 나는 마족, 그것도 마왕인걸요.”

“그치만 지금까지 루헤는 아무런 대가 없이 항상 날 도와줬었잖아요?”

“그건…….”

“그래서, 결심했어요.”

“……?”

산수이가 진지한 표정으로 루헤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차피 믿겠다고 말만 해서는 의미가 없는 것 같으니, 앞으로는 행동으로 보여주기로요!”

“행…… 동이라고요?”

“네!”

“흐음?”

“루헤는 평화를 원한다고 했죠?”

그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언제가 되든 당신이 인간계와 평화 협정을 맺고 싶다고 하면, 내가 당신을 지지할게요.”

“……!”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믿을 수 있도록, 내가 가운데서 다리가 되어 주겠다는 뜻이에요.”

그렇게 말하며 산수이가 씨익 웃었다.

미치겠네.

루헤는 자꾸만 터져 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으며 머리를 쓸어올렸다.

역시 사랑스럽다, 이 인간의 여자가.

“정말이지…….”

루헤가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당신 같은 인간은 처음이에요, 수이.”

“그거 칭찬이죠?”

루헤가 대답 대신 싱긋 웃었다.

“이제 당신 차례예요, 루헤. 나에게 물어보려던 게 뭐예요?”

“으음. 그건…….”

그가 미소 지었다.

“이미 답을 들은 것 같네요.”

“예?”

“어떻게 하면 수이가 나를 믿어줄 수 있을지, 물어보고 싶었어요.”

“아…….”

루헤가 산수이에게 다가와 그녀의 앞에 무릎 꿇고 손을 내밀었다.

“수이의 말대로, 인간들과 평화 협상을 해 보겠어요.”

“그게 정말이에요, 루헤?”

“그때 나를 도와줄 수 있겠어요?”

산수이가 루헤의 손을 잡으며 웃었다.

“기꺼이.”

그렇게 둘은 서로를 보며 미소 지었다.

루헤가 말했다.

“인간의 황태자를 만날 거예요.”

“인간의 황태자라면, 이 제국의? 프리트 말이에요?”

루헤가 고개를 끄덕였다.

산수이가 말했다.

“저도 같이 갈게요. 하지만 프리트가 어떻게 나올지는…….”

“그건 나에게 달린 일이니, 수이가 걱정할 필요 없어요.”

산수이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루헤, 이 꿈에서 깬 후에도 우리가 나눈 대화들을 기억할 수 있는 거죠?”

“당신이 원한다면, 모두 없던 일로 할 수도 있어요.”

산수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모두 기억하게 해주세요. 그리고 프리트를 만나러 갈 때 꼭 저를 먼저 찾아와줘요.”

“……분부대로.”

곧이어 루헤가 손가락을 한 번 튕기자, 산수이는 꿈에서 깨어났다.

***

번쩍—

산수이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가 누워있는 곳은 자신의 침실이 아니었다.

“……?!”

분명 루헤가 이제 잠에서 깨어나게 될 거라고 했는데?

하지만 그곳은 현기증이 날 정도로 어지러운 색깔들이 뒤섞여 일렁이는.

정체불명의 이공간이었다.

‘여긴 어디지?’

누가 날 여기로 데려온 거지?

산수이의 머릿속에 다시금 루헤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아니야.’

믿기로 했어. 루헤가 날 이런 이상한 곳으로 데려왔을 리가 없어.

침착하고 생각해보자. 여긴 어디고, 어떻게 빠져나갈 수 있을지.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일어났군.”

뒤를 돌아본 곳엔, 웬 보라색 머리에 모노클을 쓴 자가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그의 뾰족한 귀를 보자 산수이는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마족……!’

산수이가 뒷걸음질 치며 그를 향해 외쳤다.

“넌 누구냐! 나를 왜 여기로 데려온 거지?”

“말해줘도 소용없을 텐데. 어차피 여기서 나가면 모든 걸 잊게 될 테니까.”

그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산수이의 이마에 제 손가락을 갖다 댔다.

“난 그저, 인간 네 꿈만 확인하면 되거든.”

“……!”

손가락 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보랏빛 오라와 함께, 산수이의 꿈이 그에게 읽히기 시작했다.

“크윽……!”

“이런 이런, 역시 이 인간 여자의 꿈속으로 찾아가셨었군요. 마왕님.”

슐레히트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나중에 다시 보자고, 마왕의 여자.”

***

산수이가 남작저에서 눈을 떴을 때, 그녀의 머리맡엔 작은 편지 봉투가 놓여 있었다.

[0월 0일, 00시. 황태자의 접견실. -R-]

루헤가 보낸 편지였다.

‘이날 프리트를 만나서 평화 협상을 제안하려는 모양이네.’

그곳에서 함께 만나자는 뜻일 터였다.

프리트가 과연 그의 제안을 받아들일까?

사실 루헤가 제안하려는 평화 협상은, 인간계에는 하등 도움 될 것이 없는 모양새였다.

어차피 지금 마족들이 인간계를 침략하지 못하고 있는 마당에.

갑자기 새로운 평화 조약을 맺었다면서 마족들이 인간계로 진출하게 된다면 그 누가 반기겠는가.

그런데도 산수이는 루헤를 돕고 싶었다.

‘그 누구도 차별받지 않고, 각자가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살아갈 수 있어야 좋은 세상 아닐까?’

그러다 보면 목욕탕에 마족 고객님들도 늘어날 거고.

‘으음. 그게 주목적은 아니지만. 뭐, 아무튼!’

그렇게 루헤를 도와 이 땅을 조금 더 평화롭게 만들어보자고 결심한 산수이였다.

하지만 그녀는 지난밤, 루헤와 헤어진 후 자신이 누구를 만났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뽑혀 나간 꿈의 기억은, 마왕성에 모인 고위 마족들에게 영상으로 재생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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