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의 세신사 영애님-114화 (114/150)

114화.

마왕성 안.

드넓고 어두운 홀 안에는 마계의 수많은 일족 대표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마왕의 보좌관인 슐레히트로부터 긴급한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수신한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

[긴급] 이 서신을 받는 즉시 회의에 참석할 것. 마왕에 대한 안건.

마왕에 대한 긴급한 안건이라니.

그들은 서둘러 마왕성으로 날아가면서도 도통 무슨 일인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이래? 또 마왕이 죽었대?”

그들은 몇 해 전, 선대 마왕이 루헤에게 살해당했던 일을 떠올렸다.

“그것도 아니면, 마왕성의 안주인이 생겼나?”

하지만 잠만 퍼질러 자는 루헤가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도통 알 수가 없군.”

아무튼 그들은 조금이라도 늦으면 큰일 날세라 서둘러 마왕성으로 모여들었다.

그렇게 제각기 다른 일족의 대표들이 커다란 원탁 테이블에 마주 앉아 시끄럽게 떠들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이곳에 한데 불려 모아진 이유를 추측하면서.

이윽고 슐레히트가 입을 열었다.

“반갑습니다. 미리 공지드렸다시피, 오늘의 안건은 현 대마왕님에 관한 것입니다.”

그가 미리 준비해 둔 수정 구슬에 손을 뻗으며 말했다.

“보시죠.”

슐레히트가 마력을 사용하자, 수정 구슬에서 보랏빛 연기가 뿜어져 나오며 맞은편 벽면에 영상을 재생했다.

그 영상을 본 고위 마족들이 놀라 소리쳤다.

“저, 저건?”

그것은 비덴탕에서 노천욕을 즐기고 있는 루헤의 모습이었다.

얼굴 위에 수건을 덮고 노곤하게 늘어져 있었지만, 저 길고 탐스러운 머리칼은 틀림없는 마왕의 것이었다.

“저건 마왕님이 아닌가!”

그들의 눈에 충격이 서렸다.

저분이 몸을 담그고 있는, 저 물 색깔은 마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닌데?

게다가 배산임수가 완벽한 저 자연 풍경은 분명…….

슐레히트가 그들의 의구심에 쐐기를 박았다.

“저곳은 인간계입니다.”

그들의 마음속에 피어난 의심이 슐레히트에 의해 기정사실로 되자, 일순 장내가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인간계라니!”

“마왕님께서 어찌 인간계에 계신단 말이지?”

슐레히트는 미소 지었다.

고위 마족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바라던 대로.

그가 손을 들어 모두를 진정시켰다.

“그동안 마왕님께서 우리의 눈을 피해 몰래 인간계에 출입하셨더군요.”

“뭐라고!”

이제 회의실 안은 걷잡을 수 없이 소란스러워졌다.

하지만 사실, 이 자체만으론 그다지 큰 문제가 될 수 없었다.

암암리에 인간계로 놀러 가는 마족들이 많다는 건 이곳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으니까.

그걸 문제 삼게 된다면 인간계의 암시장에서 남몰래 거래를 일삼던 자신들의 치부 역시 그대로 드러나게 될 터였다.

슐레히트 역시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말없이 수정 구슬에 다시금 손을 뻗었다.

이윽고 벽면에 또 하나의 영상이 재생되었다.

화면 속 마왕은 어떤 세 명의 남자들과 무언가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저자들은, 설마 인간?!”

슐레히트가 만족스럽게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마왕님께서는 그간 인간들과 교류하신 바.”

“……!”

인간과의 교류라니.

놀란 표정의 마족들을 향해 슐레히트가 말했다.

“그리고 이것은 조금 전에 도착한 따끈따끈한 영상인데…… 한번 보시죠.”

팟!

그들의 눈앞에 마지막으로 재생된 건.

바로 산수이와 발레아나의 앞에서 각종 케이크를 정신없이 먹어치우는 루헤의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본 고위 마족들은 아연실색했다.

인간과 서로 마주 앉아 밥을 먹을 정도의 사이란 말인가.

“보시다시피 현 대마왕님께서는 저희 몰래 다양한 인간들을 만나며 지속적인 관계를 쌓아 나아가신 것으로 사료됩니다.”

이것이 말하는 바는 명백했다.

마왕이 선을 넘었다.

모두가 술렁이며 루헤를 비난하던 순간.

갑자기 벽면에 재생되던 영상이 지지직대며 꺼졌다.

“아니……?”

이윽고 검은 연기와 함께 그 앞에 나타난 것은 이 모든 소란의 주인공인, 그들의 군주 루헤였다.

“제군들.”

그가 제 손아귀에 쥐고 있던 벼룩 마족의 커다란 본체를 거칠게 땅바닥에 내려쳤다.

“깜찍한 짓을 했더군요, 슐레히트.”

그 말에 슐레히트가 앞으로 나섰다.

“어서 말씀해 주시지요, 마왕님. 인간들과 교류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슐레히트가 루헤를 빤히 바라보며 덧붙였다.

“설마 그토록 애지중지하시는 인간들을 지키기 위해, 전쟁을 막고자 선대 마왕을 살해하신 겁니까?”

“!”

저게 무슨 소리지?

고위 마족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인간계와의 전쟁……?

술렁이는 좌중 사이로 슐레히트가 말을 이었다.

“마왕님께선 다 알고 계셨던 거죠? 당신이 선대 마왕을 살해했던 바로 다음 날, 귀족들과의 정기 회의가 있었다는 걸. 그곳에서 선대 마왕님께서 제안하려 하셨던 안건은 바로, 인간계와의 전쟁이었죠.”

“……!”

그 말을 들은 마족들의 낯빛이 충격에 휩싸여 굳어갔다.

그러니까 정말, 루헤 저자가 인간계와의 전쟁을 막기 위해서 선대 마왕을 살해한 거야?

우리의, 마족들의 오랜 염원인 인간계로의 진출을 막은 거야?

그러자 루헤가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 맞아요. 전쟁을 막기 위해서 내가 선대 마왕을 죽였죠.”

“이럴 수가……!”

하지만 주위에서 쏟아져 나오는 아우성과 욕설에도 불구하고, 루헤는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전쟁보다 더 쉬운 방법이 있으니까요.”

쉬운 방법이 있다고? 전쟁보다?

마족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슐레히트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그때와 지금의 상황이 다르다는 건 마왕님께서도 잘 알고 계실 텐데요? 왜냐하면…….”

“그만.”

루헤가 그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슐레히트의 입에서 믿을 수 없는 말이 흘러나왔다.

“이번 전쟁에는 천족이 참전할 수 없을 테니까 말입니다.”

저게 무슨 소리야?

천족이 전쟁에 참전할 수 없다니?

마족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과거 몇백 년 전, 패전의 원인은 천족 때문이었잖아. 그런데 이번에는 그들이 없다니.

모든 고위 마족들이 동시에 루헤를 돌아보았다.

루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침묵 자체가 바로 대답이었다.

그때, 고령의 마족 한 명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그 전설이 모두 사실이었단 말입니까? 탄생과 소멸의…….”

슐레히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게다가 지금이 바로 그 주기입니다.”

탄생과 소멸의 주기.

모든 것은 탄생과 소멸을 반복한다.

이것은 고대 역사서에도 나와 있는 불변의 법칙이었다.

이 세계에 영생을 누릴 수 있는 생명체는 존재하지 않았다.

아무리 천족이나 마족이라 해도, 그들은 몇백 년의 주기를 거쳐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과거 마계 대전에 참전했던 신들이 소멸하는 시기.

게다가 새롭게 태어나는 이들이 그 자리를 대체하는 시기였다.

과거 마계 대전을 천족의 승리로 이끈 주역이었던 전쟁의 여신이 소멸한 뒤, 그 자리에 새롭게 태어난 건.

바로 이름만 들어도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 목욕의 신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러한 기밀 사항을 알고 있는 것은.

당시의 마계 대전에 참전한 후 지금까지 살아있는 유일한 마족, 슐레히트뿐이었다.

그가 선대 마왕에게 정보를 넘겨 함께 전쟁을 일으키려던 찰나, 매일같이 선대 마왕의 꿈을 감시하고 있던 몽마 루헤가 그를 곧바로 살해해버렸던 것이다.

이제 모든 진실을 알게 된 고위 마족들은 경멸 어린 시선으로 루헤를 바라보았다.

그가 우리를 속였다.

인간계를 손쉽게 먹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 그가 모든 걸 망쳤어!

격분한 모두를 향해 루헤가 입을 열었다.

“천족이 없다 한들, 전쟁이 일어나면 우리 쪽도 피를 흘리게 된다고요.”

“대를 위해서라면 그깟 작은 희생쯤은 어쩔 수 없는 법이죠.”

슐레히트가 맞받아쳤다.

그렇게 끊임없이 자신의 말꼬리를 잡는 슐레히트를 보며 루헤는 생각했다.

정말이지, 이 모든 상황이 너무 귀찮다고.

‘내가 왜 이런 일로 싸우고 있어야 하는 거죠?’

그저 선대 마왕을 없앤 후 제가 왕좌를 깔고 앉아 있으면 모든 일이 해결될 거라 생각했는데.

일이 이렇게 복잡해진 건 오직 하나의 이유 때문이었다.

‘……수이, 당신을 만나서.’

처음엔 그냥 가볍게 하루짜리 온천 여행을 다녀올 생각이었다.

마왕의 자리도 따분하고, 그 목욕이라는 것도 자신의 취향에 맞아 보이길래.

그러다 그 인간 여자를 만났고, 때를 밀었고, 흥미가 생겼고, 이젠…….

‘결국, 그대가 내게 제안했던 것을 내 입으로 말하게 되었군요.’

원래부터 이럴 생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젠 이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저들을 모두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마침내 그가 마족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만일 제게, 누구의 희생도 없이 인간계로 진출할 방법이 있다면?”

“……!”

“정말 그런 방법이 있단 말입니까?”

“……제가 직접 인간의 황제와 협상을 시도하죠.”

일순 장내가 얼어붙었다가, 박장대소가 터져 나왔다.

“와하하-!”

“인간들이 마족의 말을 믿을 리가요!”

“내가 믿게 만든다면?”

루헤가 단호한 표정으로 말하자, 마족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설마 마왕님…….”

“이걸 위해 그동안 인간계에?”

루헤는 이마저도 원래 계획되어 있었다는 듯 끄덕였다.

그러자 마족들의 얼굴이 점차 화색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역시 마왕님!”

“다 생각이 있으셨군!”

뒤에서 이 모든 것을 지켜보던 슐레히트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제가 이 판을 어떻게 깔아놓았는데!

게다가 저 게으른 루헤 놈이 그딴 협상을 미리 계획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러다 설령 정말로 인간계와의 협상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된다면?

‘그럼 모든 일이 끝난 후, 시체로 발견되는 건 내가 될 텐데…….’

안 될 말이었다. 뭔가 더 확실한 한 방이 필요했다.

그때, 슐레히트의 뇌리에 누군가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래, 벼룩 놈이 보내온 영상 안에 한 시도 빠지지 않고 나오던 그 얼굴……!’

마왕이 목욕을 할 때도, 인간 남자들을 만날 때도, 다과를 즐길 때도.

항상 그 전후로 나오던 한 명의 얼굴이 있었다.

‘그 여자……!’

마침내 산수이의 얼굴을 떠올린 슐레히트가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

마왕의 집무실 안.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그곳에 홀로 앉은 루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아…… 제길.”

산수이에게 눈이 멀어서 저한테 감시가 붙은 줄도 모르고 있었다.

그깟 하급 마족 하나 눈치채지 못하다니, 제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도대체 슐레히트 저놈을 어떻게 해야 할까.

하지만 지금 급한 건 그를 처리하는 일이 아니었다.

그랬다간 고위 마족들의 반발이 심할 터였다.

‘마왕의 자리라는 거, 예상은 했지만 정말 너무 귀찮네요.’

이제 마족들을 설득시키기 위해선 꼼짝없이 협상 자리에 나가야 할 판이었다.

여기서 더 시간이 지체되기 전에 서둘러야 했다.

하지만.

그때, 산수이의 눈빛을 보지 않았나.

제가 휴의 등짝에 손톱을 꽂아 벼룩 마족을 해치웠을 때.

공포와 두려움, 그리고 의심으로 가득했던 그 눈빛을.

그런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는 건 아닐까 착각을 했었다니.

‘수이도 날 믿어주지 않는데, 인간의 황제라고 믿겠어요……?’

설령 황제가 자신을 믿는다 쳐도, 마족이 인간계로 진출하겠다는 것을 허락해줄 리는 만무했다.

마족들의 잔혹한 성정상, 지상 위에서 무슨 짓을 저지를지는 안 봐도 뻔했다.

그러나 만일, 이 협상이 잘 이루어져서 자신들도 따뜻한 햇볕을 누리며 맛있는 음식을 먹고 살아갈 수 있다면?

‘그런 건 꿈일 뿐인데 말이죠.’

그런데도, 그의 머릿속에는 자꾸만 산수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럼 루헤가 인간계와 다시 협상을 해 보면 어때요? 난 평화를 원한다, 하고.]

고민은 길지 않았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루헤는 손가락을 튕겨 검은 연기와 함께 어디론가 사라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