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그렇게 마왕성에 붙잡혀 온 휴와 듀.
두 꼬마 박쥐는 자신들의 앞에 앉아있는 대마왕 루헤를 보며 몸을 와들와들 떨었다.
그리고 바로 대전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빌기 시작했다.
“요, 용서해줘요, 마왕님!”
“제발요!”
하지만 루헤는 그들을 향해 아름답고도 나른하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하암. 인간계의 목욕탕이 그렇게 좋던가요?”
그의 질문에 휴와 듀의 심장이 공포에 질려 덜컹 내려앉았다.
제아무리 나이 어린 하급 마족이었을지라도, 그들 역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루헤 그가 어떻게 새로운 마왕이 된 것인지를.
오로지 힘의 순위로만 마왕이 결정되는 마계.
그런 이곳에서, 선대 마왕은 단 한 번의 일격으로 배가 뚫려버린 끔찍한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섬뜩한 사실은 따로 있었다.
바로, 선대 마왕을 살해한 그 암살자가 시신 옆에서 태평하게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는 것.
그가 바로 새롭게 왕좌에 군림하게 된 루헤 슈바츠발트.
길고 긴 마계의 역사 속에서도 가장 강력한 마왕이라 불리는 자.
자신들의 눈앞에 있는 현 대마왕이었다.
새파랗게 질려 대답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휴와 듀를 향해, 대마왕 루헤가 귀찮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나는 두 번 말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요.”
휴와 듀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조, 좋았다!”
“천국에 간 느낌! 아차차……!”
실수로 천국이라고 말해버린 휴는 날개를 들어 올려 제 뺨을 스스로 후려갈겼다.
하지만 마왕이 화를 내기는커녕 그들에게 다가와 이렇게 속삭이는 것이 아닌가.
“흐음…… 그렇게 좋았다니, 거기 다시 갈 수 있도록 허락해 줄까요?”
그 말에 휴와 듀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물었다.
“정말?”
“갈래 갈래!”
신이 난 두 꼬마를 향해 루헤가 예쁘게 웃으며 덧붙였다.
“대신, 조건이 하나 있어요.”
***
비덴탕 앞에서 신나게 뛰어다니는 수많은 아이들을 보며, 산수이는 얼마 전 이곳을 방문했던 두 명의 꼬마 아이들을 떠올렸다.
‘말은 잘 안 통하긴 해도 귀여웠는데. 부모님 모시고 또 한 번 안 오려나?’
이런 생각에 잠겨있던 찰나, 멀리서 얀피르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주인!”
얀피르가 단숨에 달려와 산수이를 꽉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오늘도 보고 싶었어.”
‘윽.’
갑작스럽게 얀피르의 품에 안긴 산수이의 얼굴이 붉어졌다.
얀피르가 물었다.
“지금 바빠?”
자신을 향해있는 얀피르의 매혹적인 얼굴을 바라보며, 산수이는 제 심장을 부여잡았다.
‘이번엔 미남 공격이냐.’
하지만 그녀는 언제나처럼 태연하게 대답했다.
“아니, 괜찮아.”
“그럼 나랑 같이 어디 좀 가 줄 수 있어?”
그 말을 하는 얀피르의 표정은 어딘지 모르게 평소와는 조금 달라 보였다.
“좋아, 무슨 일인데?”
“그냥, 잠깐 둘이서만 할 얘기가 있어.”
‘둘이서만?’
그렇게 산수이는 얀피르와 함께 남작저 정원 내에 딸려있는 작은 온실로 들어갔다.
잘 관리되어 있는 온실 안에는 수십 가지 꽃들이 화사하게 피어있었다.
‘우와……!’
온실 안은 큰 나무부터 작은 들꽃까지, 어느 하나 손이 가지 않은 곳이 없었다.
특히나 온실 양옆에는 보라색 꽃들이 줄지어 심어져 있어, 꼭 환상의 숲을 걷는 듯한 느낌을 자아냈다.
그 길에 시선을 던지며 얀피르가 입을 열었다.
“각기 다른 종류의 보라색 꽃들이 계절 따라 순서대로 피어나도록 심어놨어. 그래서 일 년 내내 보라색 꽃만 피어.”
“설마 이거 다 얀피르 네가 관리한 거야?”
“응.”
넋을 놓고 정원을 바라보던 산수이가 황홀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진짜 예쁘다. 꼭 요정이 사는 곳 같아.”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네. 우리 주인이 목욕탕 경영하느라 하도 바빠 보이길래, 내가 손 좀 봤지.”
“아…….”
산수이가 멋쩍어하며 말했다.
“얀피르 너도 바빴을 텐데 언제 이런 걸 다 했어.”
“그냥, 주인 네가 웃는 걸 보고 싶어서.”
얀피르가 산수이의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부드럽고 따뜻한 감촉이 손바닥 끝에서부터 몸을 타고 찌릿하게 퍼져나갔다.
산수이는 자신의 심장 소리가 자꾸만 커져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이러다 내 심장 소리가 얀피르한테까지 다 들릴 것 같아!’
산수이는 동요하는 제 심장 소리를 들키기 전에 어서 여기서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얀피르는 그녀의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주인, 내가 장담하는데. 이런 맞춤형 남자 친구 어디 가서 또 못 구한다?”
“나, 남자 친구?!”
얀피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일하느라 바빠서 결혼하기 싫어하는 건 알고 있어. 그럼 남자친구부터 시작하면 안 될까?”
“뭐, 뭐?!”
얀피르가 그녀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진지하게 말했다.
“연애하자고, 나랑.”
얀피르는 계속해서 산수이의 손바닥에 쪽쪽 입을 맞춰댔다.
“아니 저기 얀피르, 갑자기 이러면…….”
“갑자기 아닌데? 나 주인 너한테 백 번도 넘게 고백한 거 같은데.”
그야 산수이도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제 목에 걸린 드래곤의 비늘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이제 더는 피할 수 없어.’
산수이가 결심한 듯 얀피르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얀피르, 일전에 헤슬리히한테 붙잡혔을 때 말이야. 네가 준 이 목걸이가 아니었다면 난 살아남지 못했을 거야.”
그 말에 얀피르가 멋쩍은 듯 답했다.
“제대로 작동돼서 다행이야. 그 덕에 내가 주인 너를 빨리 찾을 수 있었…….”
“그런데, 이 목걸이의 기능은 그게 다가 아니잖아. 나 이미 알고 있어. 이 목걸이가 뭘 의미하는지.”
그 말을 들은 얀피르는 크게 당황했다.
‘황태자 이 자식! 결국 주인한테 저게 위치추적기라는 소리를 해버린 거구만?!’
당황한 그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주인, 그게 사실은!”
“드래곤의 반려를 위한 목걸이라며, 이거.”
“어!?”
예상치 못한 말에 얀피르는 그 자리에서 놀라 굳어버렸다.
산수이는 그의 표정만 봐도 답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정말이구나.”
잠시 말이 없던 얀피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왜 말 안 했어!”
“사실대로 말했으면, 받지 않았을 거잖아.”
그가 한숨을 내쉬며 제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내가 없는 데서 주인 네가 위험에 처할까 봐 뭐든 들려 보내야 했어. 그런데 내가 반려니 뭐니 그딴 소리를 했어 봐, 네가 그걸 받았겠어?”
“아…….”
“이렇게 됐으니 그냥 다 사실대로 말할게. 그래, 그건 반려를 위한 목걸이야. 드래곤이 제 비늘을 떼서 준다는 건, 평생을 걸고 그 대상만 사랑하겠다는 맹세니까.”
그 말을 들은 산수이의 눈이 커졌다.
“평생 그 대상만 사랑한다니? 그게 무슨 뜻이야?”
“……드래곤의 심장은 평생 단 한 명의 반려한테밖에 뛰지 않아.”
“그, 그럼 그 반려가 드래곤보다 먼저 죽으면?”
잠시 망설이던 얀피르가 말을 이었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드래곤의 반려는 오직 하나뿐이야.”
그 말을 들은 산수이의 머릿속이 일순 멍해졌다.
‘일생 동안 단 한 명밖에 사랑하지 못한다고? 반려가 먼저 죽어도?’
당황한 표정의 산수이를 바라보며, 얀피르가 말을 이었다.
“네가 이럴까 봐 말 못 했던 거야. 주인 너한테 부담 주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냥, 나한테 그땐 널 지키는 게 더 중요했고.”
그가 산수이의 손을 들어 올려 자신의 가슴에 갖다 대며 말을 이었다.
“그런 맹약을 하는 게 나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어. 왜냐하면 나는…… 앞으로도 계속 너만 사랑할 거니까.”
산수이의 손끝으로 세차게 뛰는 얀피르의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그가 깊은 눈빛으로 산수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사랑해, 주인. 널 처음 만났던 그 순간부터 단 하루도 사랑하지 않은 날이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하지만 산수이는 그의 말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지금 그녀의 머릿속을 꽉 차게 지배하는 건 오로지 단 한 생각뿐이었으니까.
‘그럼 내가 원래 세계로 돌아가 버리면 얀피르는 어떻게 되는 거야……?’
산수이는 그제야 제 속에 새싹 같이 피어오르던 마음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일전에 생사의 기로에 섰을 때, 무의식 속에서 들려오던 그 사랑스러운 이의 목소리는 바로.
‘얀피르였구나!’
그녀는 자신도 몰랐던 제 마음을 이제야 깨달아 버린 것이다.
‘이제 알겠어. 내가 얀피르를…….’
하지만 그것이 원래 세계를 포기할 정도의 마음인가?
아니, 결코 그렇지 않았다.
모든 걸 버리고 이 남자 하나 때문에 이 세계에 남을 만큼 그를 사랑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자신은 여전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럼 혼자 남겨질 얀피르는? 평생 다른 짝도 찾지 못하고 외롭게 살아가야 해? 드래곤은 수명도 인간보다 훨씬 길다는데?’
그녀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자, 얀피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주인, 여기 이 꽃들 말이야. 왜 보라색으로 심어뒀는지 알아?”
“왜 그랬는데?”
그가 산수이에게 손을 뻗어 그녀의 눈가에 흘러내린 머리를 귀 뒤로 살며시 넘겨주었다.
산수이를 바라보는 얀피르의 눈에는 사랑이 가득 담겨있었다.
“주인 네 눈 색깔과 똑같아서.”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산수이의 가슴은 쿵 하고 내려앉았다.
‘얀피르가 반려로 선택한 건, 내가 아니야!’
지금 얀피르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원래의 자신이 아니었다.
얀피르의 눈동자에 산수이 비덴비덴의 아름다운 모습이 비쳤다.
그가 사랑하는 것은, 이 세계에 살아가고 있는 산수이의 육신일 것이었다.
산수이의 가슴이 저릿하게 아파왔다.
이제야 확신할 수 있었다. 얀피르가 사랑하는 건, 자신이 아닌 원래의 산수이 비덴비덴 이라는 걸.
‘혹시 내가 떠나고 나면, 이 몸 안에 진짜 산수이의 영혼이 되돌아오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자신이 원래 세계로 되돌아가더라도 얀피르가 혼자 외롭게 남겨질 일은 없을 것이었다.
만일 그렇게 될 수 있다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니까 마음이…… 너무 아파.’
산수이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하지만 얀피르는 그런 산수이의 마음을 알 길이 없었다.
“일단 나랑 한번 만나보면 안 돼, 주인? 내가 정말 잘할게, 응?”
자신을 한없이 사랑스럽다는 눈길로 바라보는 얀피르를 보며, 산수이는 굳게 결심했다.
‘이 마음이 더 커지기 전에, 확실하게 정리해야만 해.’
그래서 그를 향해 차갑고도 단호하게 말했다.
“미안해 얀피르. 난…… 너한테 전혀 관심 없어.”
“뭐? 정말 나한테 관심이 요만큼도 없어?”
그 말을 들은 얀피르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그럼 주인 네 심장은 왜 이렇게 세게 뛰고 있는 건데?”
산수이는 이를 꽉 물곤 거짓을 말하기로 했다.
“그야 네 얼굴만 봐도 심장이 떨리는 걸 어떡해? 너도 알잖아. 내가 잘생긴 남자 좋아하는 거.”
“하, 그럼 내 얼굴이 네 취향이라는 게 정말로 그런 뜻이었어?”
“그래. 난 잘생긴 남자면 다 좋아해.”
그 말을 들은 얀피르는 적잖은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의 얼굴이 서서히 무너져갔다.
그걸 지켜보고 있는 산수이 역시 가슴이 저릿하게 아팠다.
얀피르가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물었다.
“혹시 내가 아닌 다른 놈을 사랑해서 그래……?”
“뭐? 그런 건 절대 아니야!”
“그런 게 아니면 혹시 그자와 관련된 거야?”
“그자라니?”
얀피르가 천천히 입을 열어 읊조렸다.
“……사우나스.”
그 이름을 들은 산수이는 얼어붙고 말았다.
얀피르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네가 키우던 개 이름이 아닌 건 이미 알고 있어. 게다가 주인 너, ‘돌아가고 싶다’고 했잖아. 대체 어디로 떠나려는 거야?”
이제 와서 뭐라 둘러대봤자 믿지 않을 게 뻔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진실을 말해줄 수도 없었다.
그녀가 억지로 웃어 보이며 말했다.
“무슨 소리야, 내가 어딜 떠나.”
“거짓말! 내가 모를 줄 알아? 너는 항상 어딘가 멀리 떠나버릴 것 같은 표정을 짓곤 하잖아! 마치 저 너머 다른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
산수이는 얀피르가 그걸 눈치채고 있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대체 언제부터? 아니, 얀피르는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동요하는 산수이의 표정을 본 얀피르는 이제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가 정말로 자신을 영영 떠나버릴지도 모른다는 걸.
그가 산수이를 부둥켜안고 울먹였다.
“나를, 나를 사랑해 달라고는 하지 않을게. 그러니까 제발…… 제발 떠나지만 말아 줘, 주인.”
하지만 산수이는 그날 얀피르에게 아무런 대답도 해 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