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의 세신사 영애님-82화 (82/150)

82화.

아무리 꼬마라 한들 휴와 듀는 여탕으로 데리고 들어가기엔 제법 나이가 있어 보였다.

산수이는 그들의 부모를 찾을 때까지만 얀피르에게 애들을 맡기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휴와 듀를 마주한 얀피르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어쩐지 그 애들에게서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쾌한 기운이 풍겨 나왔기 때문이다.

‘뭐야? 왜 이렇게 어린아이들한테서 꺼림칙한 기운이 느껴지지?’

그런 얀피르의 표정을 본 산수이가 그에게만 들릴 만큼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얀피르, 너 혹시 애들 싫어해?”

그 말에 얀피르는 깜짝 놀라며 아니라고 손사래 쳤다.

“무슨 소리야, 내가 애들을 얼마나 좋아하는데!”

얀피르는 혹시라도 산수이가 오해할까 걱정이 되었다.

정말로 자신은 아이들을 사랑하는데!

혹시라도 나중에 산수이와 제 사이에 아이가 생기게 된다면 정말 잘 키울 자신도 있는데.

그러다 문득 그는 일전의 대화를 떠올렸다.

바로, 산수이가 아이를 가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말.

‘……맞다.’

그렇다면 혹시, 그녀가 이렇게 아이들을 마주하고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상처받고 있는 건 아닐까?

얀피르는 속으로 노심초사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을 알 리 없는 산수이가 또다시 얀피르에게 속삭였다.

“근데 얼굴이 왜 그래? 애들이 너 무서워하겠어. 내가 애들 보호자 금방 찾아올 테니까 잠시만 봐줘, 응?”

“알겠어.”

“금방 다녀올게! 애들 부모님 찾는 즉시 집사님 통해서 남탕으로 보낼게!”

그렇게 멀어져가는 산수이를 보며 얀피르가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하여간 주인은 날 제외한 모든 것에 관심을 두느라 너무 바쁘다니까. 더 좋아하는 내가 참아야지 뭐.’

그렇게 얀피르는 양쪽 손에 애들을 하나씩 데리고 터덜터덜 노천탕으로 향했다.

그런 얀피르를 보며 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너! 저 인간 여자 좋아하지?”

“뭐?”

이어서 듀 역시 신난다고 소리쳤다.

“나 이거 알아! 짝사랑!”

“너 차였지? 저 인간 여자한테? 응응?”

“아니 근데 이놈들이?”

아이들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얀피르를 바라보며 궁금한 것을 모조리 퍼붓기 시작했다.

얀피르는 속으로 부글부글 끓었으나 상대가 어린애들이라 참기로 했다.

‘이상해. 자꾸만 얘들한테서 기분 나쁜 에너지가 느껴진단 말이야? 내가 애들한테 이런 적이 없는데?’

얀피르는 그들이 마족일 거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한 채, 아이들을 데리고 노천탕으로 향했다.

고작 목욕탕에 방문하기 위해, 평화협정을 깨고 결계를 넘어온 마족이 있을 거란 가정은 아예 선택지에 없었으니까.

이윽고 노천탕에 도착한 아이들이 탄성을 내질렀다.

“우와아!”

김이 모락모락 나는 편백탕 안에는 연세 지긋한 어르신 몇 분이 목욕을 즐기고 계셨다.

그 뒤로는 비덴산의 절경을 감상할 수 있었고.

노천탕이 위치한 정원은 각종 수석이며 꽃으로 장식되어 이국적인 정취가 풍겨났다.

“진짜 산! 진짜 꽃!”

아이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행복한 비명을 지르며 노천탕을 향해 달려나갔다.

“인간 목욕탕, 최고!”

그들이 목욕탕 안으로 풍덩 뛰어드는 순간, 그 옆에 앉아계시던 어르신에게 물이 튀었다.

그 모습을 본 얀피르가 당황하며 아이들에게 주의를 주었다.

“다른 손님들에게 피해를 주면 안 돼!”

그의 서슬 퍼런 호통에 깜짝 놀란 휴와 듀가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지금 우리 혼낸 거? 짝사랑남이?”

“루헤 님도 아니면서?”

그 이름을 들은 얀피르가 고개를 갸웃했다.

“루헤? 그게 너희들 부모님 이름이야? 지금 어디 계셔?”

하지만 아이들은 얀피르를 향해 입을 삐죽 내민 채, 아무 대답 없이 노천탕 한구석으로 도망가버렸다.

그 모습을 본 어르신 한 분이 껄껄 웃으며 얀피르에게 말했다.

“허허, 너무 성내지 말게. 애들 땐 다 그런 거 아니겠나. 그나저나 자네, 여기서 세신사로 일하던 총각 아닌가?”

변방에 위치한 남작령이었던지라, 동네 어르신들 중에는 아직 얀피르의 정체에 대해 잘 모르시는 분도 계셨다.

얀피르가 어르신을 향해 웃으며 답했다.

“왜, 오늘도 때 밀어드릴까?”

“어이쿠, 말이라도 고맙네. 하지만 자네는 애들을 봐야 하는 거 같은데.”

“하아, 그건 그렇지. 대신 다음에 꼭 밀어드릴게.”

얀피르 역시 노천탕 안으로 들어가 몸을 녹이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물장난하는 것을 한참 바라보던 얀피르의 입가에는 어느새 미소가 씩 번졌다.

그러자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어르신이 말했다.

“자네, 나중에 좋은 아빠가 되겠구먼.”

그 말을 들은 얀피르가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난 굳이 아빠가 될 수 없어도 괜찮아.”

“혼자 살 생각인가 보지?”

“아니?”

얀피르가 어르신을 향해 행복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남편은 될 생각인데?”

***

목욕탕에서 정신없이 한나절을 보내버린 휴와 듀는 뒤늦게서야 정신을 차리고는 시계를 확인했다.

당연히 마계로 돌아가야 하는 시간은 이미 한참 전에 지나있었다.

“큰일 났다!”

그들은 얀피르에게서 도망쳐 비덴탕을 빠져나오다가 산수이와 딱 마주쳤다.

“어? 너네! 잘생긴 형은 어디에다 두고 너희끼리 혼자 다녀!”

“우, 우리 시간 늦었다! 혼나, 집에 가야 해.”

“얼른 간다. 고맙다 오늘!”

꽁지 빠지게 달려 산수이의 앞에서 모습을 감춘 두 꼬마 마족은,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 박쥐의 모습으로 날아올랐다.

한편 산수이는 멀어져가는 두 아이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뭐지? 정말로 그냥 자기들끼리 목욕하러 온 거였나?”

그렇게 생각에 잠겨있던 찰나, 비덴탕 안에서 얀피르가 헐레벌떡 달려 나왔다.

“헉헉…… 주인! 애들이 갑자기 도망갔어!”

“괜찮아, 내가 방금 마주치고 오는 길이야. 집에 간대.”

“그래? 하아, 그럼 다행이고.”

안도의 숨을 내쉰 얀피르는 산수이와 함께 아이들이 사라져간 곳을 바라보았다.

얀피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또 올까?”

“여기가 마음에 들었다면 또 오겠지? 왜, 그새 정들었어?”

“그 말 안 듣는 놈들한테 정은 무슨.”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얀피르의 얼굴은 어딘가 아쉬워 보였다.

산수이는 그런 얀피르를 보며 생각했다.

‘맨날 들이대기만 하는 거 같아 보여도, 이럴 때 보면 얘도 참 참 진국이란 말이야……?’

***

휴와 듀는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무사히 자신들의 동굴에 도착했다.

아무리 인간계와의 밀매업이 성행하고 있다 해도 이렇게 장시간 자리를 비운 채 인간 세상에 놀러 나가는 건 위험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는 날에는 마왕이 저들을 가만두지 않을 터였다.

그러나 비밀스런 소풍을 마치고 돌아온 두 꼬마 마족의 얼굴은 흥분에 가득 차 있었다.

“재미있었어!”

“목욕탕 주인 좋아!”

“짝사랑남도 맘에 들어!”

“또 가자.”

“응응!”

만일 두 아이가 자신의 입단속만 잘했더라면, 인간세계로의 잠행은 영원히 완전범죄로 묻힐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야, 휴랑 듀! 나 지난주에 용암산 놀러 갔다 왔다? 너네는 그런 데 못 가봤지?”

“우린 더 좋은 데 갔는데!”

“더 좋은 데? 그게 어딘데?”

“그, 그건 말할 수 없다.”

“에에-휴랑 듀가 거짓말한대요!”

“정말이야, 인간 세상에 갔었다고!”

“뭐……?”

결국 휴와 듀는 자신들의 모험담을 주변 친구들에게 모두 자랑하고 만 것이다.

“인간계에는 목욕탕이란 게 있다!”

“목욕탕? 그게 뭐야?”

“뜨거운 물에 들어가는 거!”

“아아-용암 속에서 수영하는 거 말하는 거지?”

“아니야! 아니야! 뜨거운 물에서 몸을 씻는 거다!”

“몸을…… 씻는다고?!”

이제 수많은 하급 마족들은 이 두 꼬마의 대서사시를 듣기 위해 마계의 동굴 안으로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휴와 듀는 모두의 앞에서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자신들의 목욕탕 체험기를 낱낱이 들려주었다.

“인간들은 씻지 않으면 죽어!”

“그렇게나 허약하단 말이야? 대체 너희는 왜 그런 델 놀러 간 거야?”

“인간계의 식물을 구경하면서 수영하려고!”

“시, 식물을? 그럼 햇볕도 쬐었겠네?!”

“응응! 달고 시원한 과일 음료도 마셨어!”

“과일? 인간들은 그 귀한 거로 주스를 만든단 말이야?!”

그렇게, 마족들은 휴와 듀의 이야기에 흠뻑 빠져들었다.

들으면 들을수록 그 비덴탕이란 곳은 정말 지옥 낙원이나 다름없었다.

인간계의 햇볕을 쬐며 신선한 음식을 먹을 수 있다니?

신이 난 휴와 듀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게다가 인간, 마계에서 듣던 거랑 완전 달라! 착해!”

“응응! 그 짝사랑남도 꼭 아빠 같았지!”

“짝사랑남……?”

뭔진 몰라도 그 비덴탕이라는 곳에서는 신명 나는 드라마도 한 편 볼 수 있는 모양이었다.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는 좌중을 향해 휴와 듀가 다시 한 번 당부의 말을 전했다.

“하지만 다들 비밀이야!”

“우리가 인간계에 몰래 나간 거, 너희들만 알고 있어야 해!”

“그럼 그럼, 물론이지. 저얼대 비밀로 할게!”

동굴 안에서 이야기를 듣던 하급 박쥐 153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휴와 듀가 인간계에 다녀왔다는 소문은 이제 하급 마족이라면 모르는 자가 없게 되었다.

그렇게 다음 날에도, 또 다음 날에도 새로운 마족들이 휴와 듀의 이야기를 들으러 동굴을 찾아왔다.

“휴, 듀! 어서 나한테도 이야기 해 줘. 인간계의 목욕탕에서 짝사랑 괴물을 물리치고 공주를 구했다는 그 얘기!”

“아이참! 이건 정말 비밀인데!”

그렇게 휴와 듀가 기거하는 동굴은 연일 북적이는 마족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와 같이 마족 친구들에게 인간계 이야기를 들려주던 하루가 지나가고, 휴와 듀가 잠자리에 들려던 순간.

갑자기 동굴 입구에 밝혀뒀던 촛불이 바람에 흔들리며 픽 꺼져버렸다.

하지만 휴와 듀는 자신들의 동굴에 누군가 들어오고 있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한 채, 그저 신나서 흥얼거리고 있었다.

“내일도 또 해 주자, 인간계 얘기!”

“응응!”

그때 갑자기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인간계 얘기, 지금 해주면 안 될까요?”

“누구야? 지금은 잘 거라구! 내일 다시……!”

순간 자신들의 앞에 선 사내의 얼굴을 본 휴와 듀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마, 마왕님!”

꼬마 마족들은 군주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소스라치게 놀라버렸다.

하지만 그들 앞에 선 마왕이란 자의 모습은 마족이라기보단 오히려 천족에 가까워 보였다.

강림한 여신이라 해도 믿을 만큼 눈이 부시게 찬란한 아름다움을 뿜어내는 자.

흠 하나 찾아볼 수 없이 고운 그의 피부에선 연신 고귀한 빛이 났고.

자신의 길고 탐스러운 군청색 머리칼을 쓸어내리는 우아한 손동작에서는 기품이 흘러넘쳤다.

그는 바로, 마계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대마왕이라 불리는 루헤 슈바츠발트였다.

피로 물든 듯 선명하게 타오르는 적안만이 그가 틀림없는 마족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루헤가 휴와 듀를 바라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흐음, 인간계에 다녀왔다…… 라.”

그 말을 들은 휴와 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갔다.

그들은 마왕을 향해 울먹이며 싹싹 빌었다.

“자, 잘못했어요, 마왕님!”

“다신 안 갈게요!”

하지만 루헤의 입장은 단호했다.

“지금 당장 나와 함께 마왕성으로 가죠, 휴와 듀.”

“캬아아아악-!”

“안 돼요, 마왕님!”

자신들의 앞에서 그저 배시시 미소 짓고 있을 뿐인 루헤를 향해, 휴와 듀는 손이 닳도록 빌고 또 빌었다.

마왕의 저 청아한 미소 뒤에 숨겨진 섬뜩한 일면을 모르는 마족은 단 한 명도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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