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권세 등등한 미모세의 백작가였던지라 욕실은 저택 내부의 웅장한 홀 안에 마련되어 있었다.
미모세는 얇은 슬립 하나만 걸친 채, 아무런 의심 없이 욕실 내의 마사지 베드 위에 길게 엎드렸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본 얀피르가 고개를 저었다.
“미모세 백작 부인님-엎드리지 마시고-정면을- 향해-누워주실 수-있으시겠습니까? 그래야-.”
얀피르가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제대로 볼 수 있을 테니까.”
그 말에 미모세가 의아한 듯 물었다.
“제대로 보다니, 무엇을 말이니?”
하지만 얀피르는 대답 없이 계속해서 미소만 짓고 있을 뿐이었다.
설마 얀피르 자신의 수려한 얼굴을 말하는 것이려나.
‘오호라, 서로 얼굴을 마주 보자는 말이렷다?’
참으로 귀여운 자가 아닐 수 없었다. 그리 튕겨대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저렇게 적극적으로 먼저 다가오다니.
결국 미모세는 터져 나오는 행복한 웃음을 참지 못한 채,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얀피르를 향해 돌아누우며 말했다.
“그래, 내 이제 너를 보기 위해 돌아누웠…….”
하지만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건 얀피르의 얼굴이 아니었다.
“……!”
얀피르의 손에 들린 물건을 본 미모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의 손에는 너무나도 익숙한 크리스털 빗이 쥐여있었으니까.
얀피르는 제 손에 들린 크리스털 머리빗을 미모세의 눈앞에 흔들며 웃어 보였다.
미모세는 기절할 듯 놀랐다.
왜 저 물건이 그의 손에 있는 거지?
얀피르가 그녀에게 말을 이었다.
“이거, 아는 물건이지?”
얀피르가 사악하게 웃었다.
머리빗을 바라보는 미모세 백작 부인의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녀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생각했다.
‘침착해! 어차피 비덴비덴 남작이 의식을 잃은 마당에 저 머리빗만으로는 아무런 증거가 되지 못해. 게다가 독이 묻은 바늘도 이미 떨어져 나가 버렸을 거야.’
미모세가 짐짓 태연한 척 답했다.
“그, 그저 장식이 매우 화려하여 놀란 것뿐이다. 그런 값비싼 물건을 어디서 구한 거니?”
“어디서 구하긴?”
얀피르가 미모세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속삭였다.
“네가 준 거잖아, 내 주인한테. 그것도 독을 발라서.”
순간 미모세는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제 귓가에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엔 살기가 어려있었다.
이윽고 얀피르가 그녀를 향해 씩 웃어 보였다.
그의 황금빛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나자, 미모세는 저도 모르게 몸을 일으켜 뒷걸음질 쳤다.
“독이라니! 대체 무슨 소리인지? 지금 내게 누명이라도 씌우겠다는 거니?”
“누명……?”
얀피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미모세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런 얀피르의 얼굴을 바라보는 미모세의 눈에는, 이제 욕정이 아닌 짙은 공포가 서려있었다.
그가 차가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래, 순순히 인정할 거라 생각하진 않았어. 그래도 마지막 기회를 주도록 할게.”
“마지막 기회?”
미모세 백작 부인은 제 앞에서 오만방자하게 구는 이 사내에게 뭐라도 한마디 해 주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당장이라도 자신을 죽일 수 있다는 듯한 눈을 하고 있었으니까.
얀피르가 그녀를 향해 서슬 퍼런 눈빛으로 대답했다.
“이 일의 배후가 누구인지 말해준다면, 적어도 살려는 줄게.”
“배, 배후라니? 난 아무것도 모른다니까!”
“음, 그렇게 나올 거 같긴 했어. 그럼 뭐 어쩔 수 없지.”
얀피르는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서서히 제 본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곧이어 얀피르의 탄탄한 피부에서 무서운 속도로 검은 비늘이 돋아났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미모세가 탐욕스럽게 바라보던 그 피부 안에서.
‘비, 비늘?’
그 모습을 눈앞에서 목도한 미모세는 숨조차 제대로 내뱉을 수 없이 바짝 얼어붙어 버렸다.
곧이어 그의 몸이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기 시작했다.
저를 만져줬으면 하고 생각했던 그의 손에서는 새카맣고 날카로운 손톱이 길게 자라났고, 끌어안고 싶다 여겼던 그의 등에서는 살갗을 뚫고 거대한 날개가 자라나기 시작했다.
‘설마, 설마 이자가……?!’
곧이어 온전한 성체 드래곤의 모습을 드러낸 얀피르가 그녀를 향해 낮게 그르렁거렸다.
“크르르르!”
그녀가 욕망하던 그 사내의 정체는 바로 얼마 전 제국에 나타났던 드래곤이었던 것이다.
결국 미모세는 터져 나오는 비명을 참지 못하고 울부짖었다.
“꺄아아악! 사, 사람 살려! 거기, 거기 누구 없느냐!”
미모세는 떨리는 다리를 억지로 추슬러서 도망치려 했지만, 이미 얀피르의 앞발이 그녀의 몸을 낚아채 공중에 들어 올린 후였다.
“어딜!”
“끄, 끄아아악!”
공포에 질린 그녀는 입에 거품을 문 채 혼절했지만, 얀피르가 그녀를 거칠게 흔들어 정신을 되차리게 했다.
“벌써 기절하면 어떻게 해? 재미없게. 아직 본편은 시작도 안 했다고.”
제 눈앞에서 드래곤을 본 미모세는 심장까지 얼어붙을 지경이었다.
‘프, 프리트 황태자가 타고 왔던 드래곤의 정체가 바로 얀피르 이자였다니!’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그런 자를 제 첩으로 삼으려 했다니!
저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거대한 황금 눈동자를 보며, 미모세 백작 부인은 이제 콧물과 눈물이 뒤범벅이 된 얼굴로 싹싹 빌며 애원하기 시작했다.
“아흑, 사, 살려주십시오, 드래곤님! 제발!”
“그러니까 말해. 이 일의 배후가 누구지?”
“저는 그저 황후마마께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미모세는 너무나도 쉽게 황후의 이름을 언급해버렸다. 그녀와 황후와의 관계는 이렇게나 모래성처럼 쉽게 허물어질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고작 이런 자들이 나의 주인을!’
얀피르가 분노에 찬 얼굴로 그르렁거리며 물었다.
“크르르. 그걸 증명할 만한 거, 가지고 있지?”
“예, 물론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걸 모조리 다 넘겨드리겠어요! 그러니 제발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 드래곤님!”
***
카데베르 제국 황실의 대전 안으로 수많은 귀족들이 모여들었다. 이는 휘온이 황제에게 청원한 긴급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황제의 옆에는 어느새 배가 불러오기 시작한 황후가 연신 자신의 배를 쓰다듬으며 함께 앉아있었다.
곧이어 휘온이 대전 앞으로 나와 황제를 향해 예를 갖추며 인사를 올렸다.
“제국의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그래, 에데카나 공작. 자네가 말한 그 중대 사안이 대체 무엇인가? 어서 말해보게.”
“얼마 전 폐하께서 직접 작위를 하사하신 산수이 비덴비덴 남작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들으셨으리라 사료되옵니다.”
“그래, 남작이 중병에 걸려 위독한 상태라고 들었네. 차도가 있다고 하던가?”
“말씀드리기 송구하오나, 실은 비덴비덴 남작이 중병에 걸린 것이 아니오라, 누군가의 음모로 독살될 뻔하였습니다, 황제 폐하.”
“!”
독살이라니.
그것은 카데베르 제국의 황실 내에서는 금기와도 같은 말이었다.
9년 전, 프리트 황태자 사건의 전말을 알고 있던 일부 고위 귀족들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져갔다.
분노한 황제가 왕좌를 강하게 내리치며 물었다.
“감히 누가 이 제국 땅에서 그런 천인공노할 짓을 벌였단 말인가! 범인이 대체 누구인가, 공작!”
“송구하게도 범인은 잡지 못하였으나, 공범을 이송해왔사옵니다, 폐하.”
“바로 들라 하라!”
그 말과 동시에 대전 안으로 프리트 황태자가 들어섰다. 그의 뒤에는 미모세 백작 부인이 밧줄에 꽁꽁 묶인 채 끌려오고 있었다.
프리트가 황제를 향해 고했다.
“이자가 바로 공범입니다, 폐하.”
그가 미모세를 바닥에 주저앉혔다.
붙잡혀온 자가 미모세 백작 부인이라는 것을 확인한 황후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미모세는 제 앞에 앉아있는 황후를 간절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속으로 외쳤다.
‘화, 황후마마. 살려주십시오!’
하지만 황후는 그녀와 눈조차 마주치려 하지 않은 채, 재빨리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 모습을 본 미모세가 제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어서 귀족 몇 명이 일어나 프리트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귀부인께 이게 무슨 짓입니까, 황태자 저하!”
하지만 프리트가 조소하며 말했다.
“세상 어떤 귀부인이 그따위 음모를 꾸미는지 모르겠군. 자, 어서 사실대로 털어놔 봐, 미모세.”
그러자 미모세가 황제의 앞에 고개를 조아리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비, 비덴비덴 남작을 독살하려 한 것은 제가 아닙니다! 전 그저 황후마마의 지시에 따랐을 뿐입니다, 황제 폐하!”
그 말을 들은 황제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지금 대체 뭐라 했느냐!”
순간 장내가 소란스러워졌다.
황제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미모세를 향해 물었다.
“미모세 백작 부인,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한 건지 아는가? 스스로 내뱉은 말에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할 것이야!”
“무, 물론입니다!”
이어서 휘온이 자신의 품 안에서 증거품인 머리빗과 독침을 꺼내 황제의 앞에 올렸다.
미모세가 서둘러 말을 이었다.
“황후 마마의 지시로 독침이 숨겨져있는 머리빗을 제작해 비덴비덴 남작에게 선물했나이다, 황제 폐하.”
황제가 차가운 표정으로 미모세 백작 부인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 말을 증명할 수 있겠는가?”
“물론입니다, 폐하. 황후 마마의 시녀를 통해 공방에 주문 의뢰서를 넣었었습니다. 그 서류를 증거로 제출하겠습니다.”
하지만 미모세 백작 부인이 건넨 서류를 읽어 보던 황후는, 자신은 전혀 모르는 일이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 시녀 중 이런 아이는 없는데? 난생처음 보는 이름이옵니다, 폐하.”
그 말을 들은 미모세가 절규했다.
“그럴 리가! 분명 그 시녀를 통해서 제게 머리빗의 도안과 함께 독약을 보내셨잖습니까, 마마!”
하지만 황후는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울먹였다.
“이건 모함입니다, 폐하! 의심된다면 제 밑의 아이들을 모두 조사해 보시옵소서!”
황제가 분노에 가득 찬 얼굴로 하명했다.
“황후궁 시녀들의 행방을 조사하라, 회의는 그 이후 재개하도록 하겠다!”
***
그렇게 며칠간 황후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녀에게서는 그 어떤 증좌도 발견되지 않았다.
며칠 후 재개된 회의에서 황후는 여유만만한 표정으로 미모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렇게 뒤통수를 치는구나, 미모세. 어리석긴, 내 그 시녀를 순순히 살려둘 줄 알았느냐?’
이렇게 미모세에게 산수이 비덴비덴 남작 살인 미수 혐의를 씌워 꼬리를 잘라내고 나면,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갈 것이었다. 곧 산수이의 목숨도 끊어질 테니까.
그렇게 황후가 승리의 미소를 짓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대전의 문이 열리며, 누군가 걸어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어……?’
검은 제복 차림에 푸른 물빛 머리를 높게 묶고 힘차게 걸어들어오는 그녀는, 바로 산수이 비덴비덴 남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