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산수이는 온몸이 타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긴 잠에서 깨어났다. 그녀의 시야에 공작저의 화려한 샹들리에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무슨 꿈을 꿨던 것 같은데 기억이…… 으윽.’
방금 전 꿨던 꿈을 기억해내려고 할 때마다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왔다.
하지만 곧 산수이는 제 손바닥에 맞닿아오는 따뜻한 감촉을 느꼈다.
그쪽으로 힘겹게 고개를 돌렸을 때 그녀의 눈에 들어온 건.
제 손을 꼭 맞잡은 채 잠들어있는 얀피르였다.
이윽고 그녀의 시선이 방 전체로 향했다.
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는 프리트가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고.
맞은편 테이블에는 휘온이 약초학 서적을 읽다 말고 엎어져 잠이 들어있었다.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산수이는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움찔거렸다.
“!”
그 감촉에 잠에서 깨어난 얀피르의 동공이 순식간에 커졌다.
“어……?”
마침내 다시 눈을 뜬 산수이가 그를 향해 힘겹게 입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윽, 머리 아파……. 얀피르, 나 얼마나 이렇게 누워있던 거야?”
“주인!”
얀피르는 산수이를 제 품에 와락 끌어안았다.
그가 흐느끼며 속삭였다.
“고마워, 주인. 깨어나줘서 고마워…… 으흑.”
그 소리에 프리트와 휘온 역시도 눈을 번쩍 뜨고는 그녀의 곁으로 헐레벌떡 달려왔다.
“깨어난 건가, 산수이 남작!”
“산수이, 정신이 드십니까?!”
“네……. 으윽, 머리야.”
산수이는 제 몸을 힘겹게 일으켜 침대 머리에 기대앉았다.
그녀가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한 세 남자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들 모두가 침대에 얼굴을 묻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프리트가 산수이를 향해 물었다.
“그대가 쓰러지기 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황후였나? 그 여자가 결국 그댈 공격했어?!”
“그게 아무것도 기억이 나질 않…….”
그때, 무언가 산수이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날카롭게 빛나던 은색의 무언가. 그리고 이어서 들려오던 사우나스의 목소리.
‘그 독바늘에 찔린 부위가 머리가 아닌 손이라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마침내 모든 것이 기억난 산수이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입을 열었다.
“바늘…… 을 봤어요.”
***
산수이는 세 남자에게 그동안 있었던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얀피르는 이제야 그때 산수이에게서 맡았던 꺼림칙한 향수 냄새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래, 맞아. 나에게 때를 밀러 왔던 그 음흉한 여자의 냄새였어!’
왜 진즉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분노한 그의 입에서 짐승의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옆에서 눈이 뒤집힌 프리트 역시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로 외쳤다.
“당장 미모세의 목을 따러 가겠다!”
얀피르 역시 앞으로 나섰다.
“귀찮게 칼질할 필요 없어. 이번에야말로 내가…….”
다행히 한 가닥 이성이 남아있던 휘온이 중간에 끼어들어 두 남자를 말렸다.
“제발, 일단 산수이가 편히 쉬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둘 다 좀 진정을…….”
휘온은 두 망아지를 진정시켜 의자에 앉혀놓고는 산수이에게 고개를 돌렸다.
“산수이, 그 머리빗의 끝부분에서 바늘이 떨어지는 걸 봤다고 했죠? 그걸 마지막으로 사용한 곳이 정확히 어디였습니까?”
“제 방 침대 옆이었어요.”
휘온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일단 당신은 여기서 좀 더 쉬고 있어요. 나머진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그렇게 얼마 후.
휘온이 흰 천 위에 크리스털 머리빗과 가느다란 바늘을 감싸 쥔 채 돌아왔다.
“이런 고가품을 취급하는 공방은 흔치 않은 터라, 쉽게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다만…….”
그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역시나 주문 의뢰서는 이미 빼돌린 후였더군요.”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던 산수이 역시 입을 열었다.
“사실 미모세 백작 부인이 딱히 제게 개인적인 앙심을 품을 리는 없잖아요? 분명 배후에 황후가 있겠죠.”
“그, 그야 그렇긴 하지만…….”
무심결에 프리트와 눈이 마주쳐버린 휘온이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산수이는 이미 그 둘 사이에 흐르는 비밀스러운 분위기를 눈치챈 후였다.
“뭐예요, 두 사람? 설마 제가 모르는 뭔가 또 있는 거예요?”
“사, 산수이 그것이…….”
휘온은 당황하며 화제를 돌리려 했지만, 이미 프리트의 입에서 모든 진실이 가감 없이 튀어 나간 후였다.
“그 밝힘증 환자가 저 드래곤 놈을 남첩으로 삼으려 했다는 걸, 정말 몰랐단 말이야?”
그 말에 놀란 산수이가 외쳤다.
“나, 남첩이요?!”
이런 미친!
산수이는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노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감히 얀피르에게 남첩이라니!
산수이가 화가 난 얼굴로 얀피르를 돌아보며 말했다.
“얀피르, 너 정말 그런 얘기를 들었어?”
하지만 얀피르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했다.
“그딴 개소리 신경 써서 뭐 해?”
하지만 산수이는 달랐다. 그녀가 참을 수 없이 분노하며 소리쳤다.
“그런 일이 있었으면 나한테 말했어야지!”
산수이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그녀의 얼굴은 미모세에 대한 분노와, 얀피르에 대한 미안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난 그런 것도 모르고 너한테 때밀이나 시키고…….”
“그게 왜 네 탓이야? 그 정신 나간 인간이 제멋대로 예약증을 바꿔 가지고 왔는데 어쩌겠어. 걱정하지 마, 난 괜찮았으니까.”
“그래도, 그래도……!”
얀피르는 침대로 다가가 산수이를 조심스레 끌어안고는 머리를 쓰다듬었다.
산수이가 계속해서 울먹이며 소리쳤다.
“감히 누구더러 남첩이래, 감히!”
“난 그딴 건 별로 신경도 안 썼어. 문제는 그 인간이 주인 널 해치려 했다는 거야. 그건 절대 용서 못 해.”
그때 휘온이 끼어들어 헛기침을 했다.
“크흠! 저기 여러분? 미안하지만 방금 전에 나눈 대화 덕에 저에게 좋은 아이디어가 하나 생각났는데요.”
그 말을 들은 산수이가 휘온에게 고개를 돌렸다.
“뭔데요? 어서 말해봐요, 휘온.”
“대신, 절대 화내지 않겠다고 약속해 줘요, 산수이.”
휘온은 세 명에게 제가 떠올린 묘안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다.
그 말을 들은 산수이가 경악하며 외쳤다.
“미모세 백작 부인한테 얀피르가 남첩이 되기로 결심했다는 편지를 쓰자고요?”
“네, 그렇습니다.”
“휘온, 제정신이에요?!”
“산수이 진정하시고. 정말로 그러자는 게 아니라 이 상황을 역이용하자는 것 아닙니까.”
“하지만……!”
프리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은 생각이야. 지금쯤 미모세는 그대가 사경을 헤매고 있다고 생각할 테니 아무런 의심조차 하지 않고 저 드래곤 놈을 받아들일 거라고.”
얀피르 역시 동의했다.
“난 뭐 아무래도 상관없어. 그 인간에게 복수만 할 수 있다면.”
“그래도…….”
망설이는 산수이를 향해 프리트가 말을 이었다.
“어차피 미모세는 잔챙이일 뿐이야. 이 독 묻은 빗을 들고 재판에 넘겨봤자 대가리는 잡지 못하게 된다고.”
휘온이 끄덕였다.
“우리가 섣불리 움직였다간 그녀가 증좌를 인멸하려 들 겁니다. 얀피르를 보내 그녀가 방심한 틈을 노려야 합니다.”
프리트가 덧붙여 말했다.
“지금 미모세의 대문을 가장 안전하게 넘을 수 있는 건 저 드래곤 놈밖에 없으니까.”
얀피르가 문제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 본체로 난입해서 다 부숴버려도 되긴 하는데. 다들 그런 걸 원하진 않는 거잖아?”
휘온이 얀피르의 어깨에 손을 턱 올리며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이 일의 적임자는 얀피르 너뿐이다. 부디 증인도, 증거도 손상시키지 말고 잡아 와라. 화가 나더라도 죽이거나 하면 절대 안 돼.”
“나를 저 황태자 놈하고 동급으로 보지 마라, 휘온.”
옆에서 듣고 있던 프리트가 발끈했다.
“아니 근데 이 드래곤 놈이?”
그렇게 잘생겨서 죄 많은 남자 얀피르는 미모세 백작 부인에게 직접 서신을 보냈다.
***
산수이 남작이 원인 모를 중병에 걸려 며칠째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소식이 온 수도에 퍼졌다.
얼마 전 그녀를 문병하고 온 프리트 황태자와 휘온 공작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는 목격자들도 속출했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작전에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었는데, 지금 미모세에게는 믿을 수 없는 한 통의 서신이 추가로 도착해 있었다.
‘얀피르 그자가 정녕 내게 오겠다고?’
서신을 들고 있는 미모세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일전에 주신 제안이 아직 유효한지요? 비덴비덴 남작의 생사가 불분명한 지금, 미모세 백작 부인께 제 몸을 의탁하고 싶습니다. -얀피르-]
미모세의 얼굴이 환희로 물들었다.
기다렸던 순간이 드디어 찾아온 것이다. 그토록 철벽을 치던 남자를 제 품 안에 넣을 수 있는 순간이!
“이렇게 금방 꼬리를 내릴 거, 왜 그동안 나를 그토록 애태웠니.”
미모세는 승리에 가득 찬 눈빛으로 얀피르에게 답신을 보냈다.
그리고 며칠 후, 얀피르는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저택 앞에 도착했다.
미모세가 한걸음에 달려가 그를 맞이했다.
“얀피르……!”
얀피르의 모습을 본 미모세의 가슴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아아, 그래. 바로 저 모습이었다. 저 색기 어린 얼굴과 넓은 가슴. 옷으로도 가릴 수 없던 단단한 근육질의 몸까지.
꿈에서도 욕망하던 남자와 드디어 마주한 미모세는 곧바로 얀피르를 와락 끌어안으려 했다.
하지만.
“그간-안녕- 하셨습-니까, 미모세-백작 부인님? 얀피르-입니다.”
그는 어딘가 경직된 모습으로 마치 국어책을 읽듯 어색하게 인사를 건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미모세는 순간 멈칫했다.
‘얘 뭐 잘못 먹었나? 왜 이래?’
얀피르는 계속해서 목각 인형처럼 뻣뻣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저를-거둬주셔서- 깊이-감사드립니다. 앞으로-잘 부탁-드립- 니다.”
하지만 미모세의 눈에는 그런 얀피르의 모습마저 사랑스러웠다.
‘분명 긴장한 것일 테지.’
미모세는 그를 끌어안으려던 팔을 거두고, 대신 얀피르의 볼을 세차게 꼬집어주었다.
“그렇게 긴장할 것 없다. 요 귀여운 것 같으니.”
‘이, 이 인간이?!’
순간 얀피르의 눈에서 또다시 살기가 피어올랐다.
하지만 여기서 일을 그르칠 순 없었다. 얀피르는 제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크윽, 조금만 더 참자.’
미모세는 그의 손을 붙잡고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미리 준비되어있던 얀피르의 방에는 온갖 금은보화며 비단옷이 가득했다.
미모세는 비단 더미에서 의복 한 벌을 집어 들어, 얀피르의 넓은 가슴팍에 대어보았다.
“이 옷이 너에게 가장 어울릴 듯하구나. 바로 씻고 와 입어보지 않으련?”
그 옷을 바라본 얀피르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옷?! 지금 이 남사스러운 망사 거적때기를 옷이라고 말한 거야?’
그건 옷이라고 부르기도 힘들 만큼 얇고 작은 천 조각에 불과했다.
얀피르는 그 해괴망측한 천 쪼가리를 들고 있던 미모세의 팔을 슬쩍 밀어버리곤, 그녀에게 더 가까이 다가섰다.
“그보다-제가 먼저-미모세 백작 부인님께-선물- 드리고-싶은 것이-있습니다.”
얀피르는 여전히 어색하기 짝이 없는 말투로 미모세에게 경어를 사용했다.
이곳에 오기 전 휘온에게 귀족 화법 에티켓 교육을 받았지만, 그는 점점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하아. 휘온 놈처럼 말하는 거, 짜증 나서 더는 못 해먹겠네.’
하지만 그런 얀피르의 마음을 알 길 없는 미모세는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선물? 나에게 말이냐?”
얀피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사지…… 를-해 드리겠-습니다.”
“그게 정말이니?!”
마사지라니!
일전에 비덴탕을 방문했을 때 그렇게나 요청해도 들어주지 않던 부탁이 아니던가.
게다가 마사지를 받는다면 제가 굳이 선물을 한 아름 안겨주지 않아도 자연스레 야릇한 분위기를 만들 수 있을 터였다.
미모세의 입장에선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좋아, 그럼 어디 우리 귀염둥이 실력 맛 좀 볼까?”
그렇게 미모세와 얀피르는 백작저 내에 딸린 개인 목욕탕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