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비덴비덴 남작 가문의 영애가 직접 작위를 물려받아 가주가 된다는 것은 카데베르 제국 역사상 전례 없는 파격적인 일이었다.
그동안 결혼을 통해 귀족 가문의 데릴사위로 들어온 자가 장인의 작위를 대신 물려받는 경우는 흔했지만, 귀족 여식이 제 아비의 작위를 직접 물려받은 일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이 엄청난 소식에 제국 전체는 연일 떠들썩했다.
게다가 수여식 당일, 산수이는 작위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으로 또 한 번 모두의 시선을 끌었다.
바로, 황궁의 대전에 남성복 차림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이, 이게 무슨!’
‘지금 저 영애, 정말 바지를 입고 나타난 것인가?!’
물론 찜질복이라는 이름하에 이제는 목욕탕 안에서 반바지를 입는 여성들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였다.
하지만 이렇게 목욕탕 밖에서, 그것도 제국의 모든 귀족들이 참석한 공식 석상에 여인이 바지를 입고 등장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산수이는 어깨에 금색 술이 달린 새하얀 제복과 검은색 팬츠를 입은 모습으로 당당하게 황궁 안으로 들어섰다.
화려한 금장이 달린 검은 구두와, 제 매력 포인트인 물빛 머리를 포니테일로 높게 치켜올린 모습은 그녀의 매력을 한층 더 배가시켜주고 있었다.
수많은 귀족 남성들이 그녀의 차림새를 보며 불쾌하다는 듯 수군거렸다.
“어디 감히 여인이 사내들의 의복을 입는단 말인지!”
하지만 이와는 다르게 산수이를 바라보는 귀부인들의 얼굴엔 점점 홍조가 번져나갔다.
세련된 차림으로 당당하게 걸어가는 산수이를 보며 그녀들의 마음속에 동경심이 피어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산수이의 모습은 이제까지 제국의 어떤 여인에게서도 볼 수 없었던 시크한 매력을 풍기고 있었으니까.
특히나 귀족 영애들은 머리라도 얻어맞은 듯한 표정으로 넋을 놓은 채 산수이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솔직히 너무 멋있다.’
‘나도 입어보고 싶어!’
주변에서 들려오는 긍정적인 반응들에 산수이는 뿌듯하기도 하고 머쓱하기도 한지 제 코끝을 쓱 훔쳤다.
‘역시 클래식은 진리지!’
이날은 그녀에게도 의미가 있었지만, 제국 최초로 여성이 작위를 물려받는 역사적인 날이기도 했다.
산수이는 그런 날에 흔하고 뻔하게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입고 싶진 않았다.
‘가슴을 옥죄는 코르셋도 영 답답하고, 암튼 별로야.’
그렇게 산수이는 모두의 주목을 받으며 앞으로 걸어나가 황제의 옥좌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모습을 눈앞에서 지켜보고 있던 황제와 황후 역시 놀란 표정이었다.
황후가 불편한 듯 얼굴을 찡그렸다.
‘차림새만 봐도 보통내기가 아니겠어.’
이윽고 황제가 산수이를 향해 명했다.
“산수이 비덴비덴은 고개를 들라.”
산수이가 벅찬 마음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곧이어 황제가 검을 빼들고 산수이의 양어깨에 검을 번갈아 올리며 말했다.
“이번 사절단 파견 기간을 통해 이태리타월과 바나나의 맞교역을 성공적으로 이뤄낸 바, 이에 카데베르 제국 황제의 이름으로 그대에게 남작위를 내리노라.”
“황제 폐하의 하해와 같은 은혜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모두가 이 역사적인 순간을 숨죽여 지켜보았다. 황제의 앞에 선 그녀의 모습은 한 명의 늠름한 기사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윽고 시종 하나가 남작위 브로치가 놓인 비단 쿠션을 들고 걸어왔다. 황제로부터 직접 브로치를 하사받은 산수이는, 이를 제 가슴에 소중히 달았다.
곧이어 황제가 대전에 참석한 모든 이들에게 크게 선포했다.
“이로써 카데베르 제국 황제의 이름으로 산수이 비덴비덴이 남작 작위를 잇게 되었음을 선포하노라!”
“우와아-!”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로써 산수이는 제국 최초의 여성 남작이 된 것이다.
산수이는 저를 향해 박수를 치는 제국민들을 벅찬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지금 이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단 한 명뿐이었다.
그것은 당연히, 목욕의 신 사우나스였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간절히 사우나스를 불렀다.
‘보고 있으신가요, 사우나스 님? 이제 비덴비덴 남작 가문을 직접 이을 수 있게 됐어요! 가문의 대가 끊길 걱정 없이 목욕탕 사업에만 몰두할 수 있다고요. 그러니 이제 제발 좀 강림해주세요.’
하지만 사우나스의 대답이 들려올 리 만무했다.
‘뭐, 사실 기대도 안 했다.’
이미 예상은 했던 터라 산수이는 싱겁게 웃었다.
이제부터 시작인 것이다.
직접 가주까지 되었으니 이 기세를 몰아 목욕탕을 더 번창시키면 되는 일 아니겠는가.
‘뭐 어찌 됐건 페니아와의 교역에도 성공했으니까. 이태리타월도 수출하고, 바나나우유도 만들고 나면 앞으로 돈 쓸어 담을 일만 남았지, 뭐!’
한편 세 남자 역시 그녀를 보며 무한한 축하의 박수를 건넸다. 산수이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시울이 촉촉하게 붉어져 갔다.
‘역시 내가 고른 미래의 황태자비다워. 제국에서 가장 위대한 여성이다.’
‘거기서 더 멋있어지면 정말 어쩌자는 겁니까, 산수이? 제 심장 떨리게…….’
‘주인 네가 행복하게 웃으니까 나도 기분 좋아. 오늘 밤엔 축하의 의미로 입을 맞춰주겠다고 해 봐야지!’
세 남자는 각자의 자리에서 저마다 다른 꿈을 꾸며 진심으로 그녀를 축하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황후에 대한 경계를 늦추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
그날 황궁에서는 제국 최초의 여성 남작이 된 산수이를 축하하는 피로연이 이어졌다. 전례 없는 작위 수여식이었던 만큼 성대하고 화려하게 준비된 파티에서 모두가 즐겁게 먹고 마시며 떠들어댔다.
물론 이 와중에 파티를 제대로 즐길 수 없는 이들도 있었다.
얀피르, 휘온, 그리고 프리트 이 세 남자는 모든 주의를 산수이에게 쏟아부었다.
그들은 산수이가 파티를 즐길 수 있게 배려하면서도 한시도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셋이 번갈아 가며 산수이를 지켜봤다가, 황후를 감시했다가 하는 시간들이 이어졌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황후에게서는 별다른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다.
마침내 참다못한 프리트가 내뱉었다.
“제기랄! 여기서 이렇게 연회를 즐기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저 마귀 할망구가 무슨 함정을 파 놓았을 줄 알고. 안 되겠어, 칼부림을 내서라도 이 연회를 파투 내야지.”
그 말을 들은 얀피르 역시 끄덕였다.
“나 역시 슬슬 한계에 도달했던 참이야. 사람들이 없는 쪽으로 불을 지르면 되겠지?”
프리트가 흡족한 표정으로 답했다.
“역시 이럴 땐 네놈하고 말이 통하는군, 드래곤. 칼부림보다야 그게 빠르고 깔끔하겠어. 그럼 사람이 비어있는 동관으로 함께 가서 불을…….”
이 셋 중에서 그나마 정상적인 사고가 가능한 것은 휘온 한 사람뿐이었다.
두 남자의 말을 듣고 있던 그가 얼굴을 찡그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산수이의 한 번뿐인 작위 수여식 연회를 망칠 생각이십니까? 제발 이성적으로 생각하십시오.”
그때였다.
산수이가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어쩐지 그녀의 얼굴은 살짝 붉어져 있었다.
“저기…… 세 분? 제가 지금 어딜 좀 잠깐 다녀올까 하는데요.”
그러자 얀피르와 프리트가 차례대로 손을 들었다.
“어디 가게, 주인? 내가 같이 갈게.”
“무슨 소리? 내가 동행하도록 하겠다.”
“아…… 저 그게 아니라.”
그때 산수이의 속내를 알아챈 휘온이 멋쩍은 듯 연신 헛기침을 했다.
“크, 크흠! 그녀에게 잠시 혼자 있을 시간을 주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만?”
하지만 휘온이 말하려는 바를 여전히 눈치채지 못한 얀피르와 프리트는 계속해서 서로를 향해 그르렁댔다.
“내가 같이 간다니까!”
“넌 여기 남아서 황후나 감시하고 있어!”
결국 산수이는 옥신각신하는 두 남자 사이에 서서 큰 소리로 외치는 수밖에 없었다.
“그만! 화장실, 저 화장실 가고 싶다고요-!”
“!”
이미 산수이의 의중을 눈치채고 있던 휘온은 그냥 한숨을 내쉰 채 고개를 돌려버렸다.
산수이가 부끄러운 듯 말했다.
“화, 화장실 앞까지 따라와 주시는 건 괜찮지만, 아무래도 그 안까지는 좀.”
“……수상한 자가 접근하진 않는지 밖에서 지켜보고 있도록 하겠다.”
그렇게 산수이는 세 남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홀로 화장실로 향했다.
‘좀 걱정되긴 하지만, 금방 돌아가면 별일 없겠지.’
그렇게 볼일을 마친 그녀가 손을 씻고 있던 찰나.
저벅—
갑자기 화장실 안쪽에 자리한 여성 휴게실에서 누군가 걸어 나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산수이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안에 누가 있었어! 설마 황후?!’
곧이어 그녀의 시선에 들어온 것은.
“어머? 산수이 영애…… 아니다, 이제 남작님이라 불러야겠죠?”
바로 미모세 백작 부인이었다.
“미, 미모세 백작 부인님?!”
지난번 남작저에서 마주쳤을 때의 냉랭한 표정은 온데간데없어진 미모세가, 친근한 미소로 산수이를 바라보며 숨김없이 호감을 드러냈다.
산수이는 서둘러 인사한 후 자리를 피하려 했지만, 이미 미모세가 그녀의 손을 꽉 다잡은 후였다.
“남작위를 이어받으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선대 비덴비덴 남작님께서도 분명 자랑스러워하고 계실 거예요.”
“백작 부인님, 감사합니다. 그럼 전 이만…….”
하지만 그녀는 산수이를 쉬이 보내주려 하지 않았다.
“아 참, 지난번 남작저에서는 제가 경황이 없어 미처 말씀드리지 못한 게 있는데요.”
“……무엇인가요?”
“혹시 때를 밀러 비덴탕에 또다시 방문해도 될까요?”
산수이가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제 손을 빼내며 답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이제 얀피르 경은 남성 고객님의 때밀이만 담당하고 있습니다.”
“어머! 그런 게 아니에요, 남작님!”
미모세 백작 부인은 놓았던 산수이의 손을 다시금 덥석 잡으며 촉촉한 눈가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 그런 오해를 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예약드리고 싶은 세신사는 바로 산수이 남작님인걸요!”
“예?”
“그날도, 제가 딱히 얀피르 경을 세신사로 지목했던 것은 아니었어요. 그저 제 오랜 친우가, 하도 예약증이 아깝다며 저라도 대신 가 달라고 사정을 해서.”
그런 미모세를 바라보며 산수이는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뭐야, 정말인가?’
산수이의 표정 변화를 미묘하게 살피던 미모세 백작 부인이 다시 생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남작님, 사실 제가 준비한 게 하나 있는데.”
“예?”
산수이는 경계하는 눈빛으로 미모세를 바라보았다.
일전에 비덴탕에서 보았던 태도는 자신이 오해한 것이라 쳐도, 어쨌든 미모세 역시 황후의 사람이 아니던가.
하지만 미모세는 그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제 품에서 작고 붉은 상자를 하나 꺼냈다.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제 마음이 담겨있는 작은 선물이랍니다.”
그렇게 말하며 미모세 백작 부인은 산수이를 향해 붉은 상자의 뚜껑을 열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