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페니아에서 벌어졌던 일들은 카데베르 제국에 전해지지 않았다. 양쪽 다 그날의 사건을 암묵적으로 함구한 채 나중을 기약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산수이와 함께 파견되었던 사절단들 역시, 당시 회의를 마치자마자 인근 지역으로 꽃놀이를 떠났던 터라 그날의 요란한 소동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아니 왕궁 한쪽 벽면이 왜 저렇게……?”
“간밤에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비덴비덴 남작 영애님은 어디에?”
“급한 일이 있으시다며 먼저 제국으로 복귀하셨습니다.”
헤슬리히 국왕이 성 안의 사용인들에게 단단히 입단속을 시켜뒀던 터라, 사절단들은 그의 말을 믿고 넘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헤슬리히로부터 모든 사건의 전말을 전해 들은 황후는 산수이의 소재를 파악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영애는 도대체 어디에 숨은 거야!’
황후는 그간 여러 차례 사람을 풀어 비덴비덴 남작저 근처를 샅샅이 뒤졌으나 산수이의 코빼기도 찾을 수 없었다.
그녀는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해졌다.
물론 산수이가 그들 두 사람의 치명적인 증거를 확보해 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황실의 스캔들이라 함은 본디 한번 퍼지기 시작하면 겉잡을 수 없는 것. 과거 무수한 역사 속 사례들만 보더라도, 황가의 혈통이 한 번 의심을 받기 시작하면 딱히 증거가 없어도 보통 파국적인 결말을 초래하지 않던가.
황후는 파르르 떨리는 제 손을 물어뜯었다.
도대체 그 영애는 언제 어떻게 나타나서 자신의 목을 옥죄려 들 것인가.
그 생각만 하면 밤에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지경이었다.
‘하루빨리 그 영애를 찾아서 없애야 해. 하지만 어떻게……?’
그에 대한 묘안은 오래지 않아 헤슬리히 국왕에게서 나왔다.
***
사절단이 제국으로 돌아온 후,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페니아의 전령이 카데베르 제국을 찾아왔다.
헤슬리히 국왕의 서신을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대부분의 사항들은 사절단이 참석했던 회담에서 이미 어느 정도 결정된 후였기 때문에, 이렇게 갑작스럽게 추가로 도착한 서신에 제국 귀족들의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페니아의 전령은 제국의 황제 앞에서 서신을 읽어내려갔다.
“……이에 제국의 때밀이 문화에 깊게 감명받은 페니아 왕국은, 카데베르 제국의 이태리타월과 페니아의 바나나를 맞교역하길 희망하는 바입니다.”
그 말을 들은 모든 귀족들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쩍 벌렸다.
“바, 바나나라니!”
제국 황제의 얼굴이 활짝 핀 것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바나나라 하면 그간 페니아를 어떻게 설득해도 왕가의 오랜 보물이라며 결코 내주지 않던 진귀한 과일이 아니던가.
제국이 오랜 세월 동안 페니아로 무수히 많은 외교관들을 파견 보내봤지만, 바나나 교역을 성공하고 돌아온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 어려운 일을, 심지어 귀족 작위도 없는 남작가의 영애 혼자서 해내고 돌아온 것이었다.
“이제 정녕 그 바나나라는 과일을 먹어볼 수 있다는 말이더냐!”
그날 밤, 기분이 좋아진 황제는 자신의 침소로 황후를 불러들였다.
황후는 미리 준비한 대로 황제에게 안겨 교태롭게 속살거렸다.
“경하드리옵니다, 폐하. 그간 제가 오라버니께 아무리 부탁드려도 바나나 교역만큼은 허가해주지 않으셨었는데……. 그 산수이란 영애가 참으로 인물은 인물인가 봅니다.”
황제 역시 기분 좋게 웃으며 끄덕였다.
“참으로 현명하고 담대한 영애 아니오? 그런 총명한 아이가 프리트의 반려가 되면 좋으련만.”
황후는 불편한 기색을 감춘 채 부드럽게 웃으며 베갯머리 송사를 계속 이어갔다.
“하오나 폐하, 제가 사교계에서 들은 바에 의하면 그 산수이라는 영애는 한 사내의 반려가 되기에는 너무나 독립적이라고 하더군요.”
“독립적이다?”
“아, 부디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폐하. 산수이 영애에겐 다른 상을 내리시는 게 더 맞다고 생각하여 주제넘게 그만…….”
“다른 상이라? 괜찮으니 어서 말해보시오, 황후.”
황후가 예쁘게 웃으며 대답했다.
“듣자 하니 그 영애의 아비인 비덴비덴 남작이 사망한 지도 벌써 몇 해가 지났으나, 그녀가 아직 미혼인지라 남작위를 물려받을 자가 없다더군요.”
그 말을 들은 황제 역시 이제야 기억났다는 듯 되뇌었다.
“맞아, 비덴비덴 남작은 정말로 유능한 인재였지. 이대로 가면 그 가문은 대를 잇지 못할 터……. 그래서 황후가 생각한 상이 무엇이오?”
“산수이 영애를 황궁으로 불러들여 직접 남작위를 내리시는 건 어떻습니까? 그런 인재는 분명 이 제국에 크나큰 힘이 될 것입니다, 폐하.”
“호오…… 그 영애에게 직접 작위를 내린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참으로 현명한 생각이오, 황후.”
“과찬이십니다.”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 황제를 보며, 황후는 속으로 안도했다.
‘제국의 황제가 직접 작위를 하사하는 자리에까지 나타나지 않을 순 없겠지, 비덴비덴 영애. 일단 토끼굴에서 널 끌어내기만 하면, 그다음엔…….’
그녀는 살기 어린 미소를 지은 채 황제의 품에 안겨들어 갔다.
***
비덴비덴 남작저에 황제의 칙서가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것은 당연히 산수이의 작위 수여에 관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산수이가 남작저에 없다는 것.
대리인은 황제의 명을 받을 당사자가 저택에 없다는 것을 알고는 당황했다.
“황명을 받아야 할 자가 자리를 비우다니! 산수이 비덴비덴 남작 영애는 대체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인가?”
안 그래도 페니아와의 이태리타월 교역 때문에 제국 전체가 산수이를 주목하고 있는데, 그녀는 아직까지도 남작저를 비운 채 서신으로만 제 가솔들과 연락을 주고받고 있던 터였다.
그리고 마침내 황제의 대리인이 남작저에 헛걸음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만 것이다.
‘아가씨, 이러다가 황제 폐하께서 직접 행차하실 지경입니다. 대체 어디에 계신 겁니까?’
집사가 땀을 뻘뻘 흘리며 황제의 대리인에게 대신 답했다.
“산수이 아가씨께서는 페니아와의 교역을 위해 고품질의 이태리타월을 개발하신다며 잠시 저택을 비우고 여행 중이십니다.”
“출타 중이란 말인가? 황명을 받들어야 하니, 당장 영애에게 기별이 닿을 수 있도록 하라!”
“분부 받들겠사옵니다.”
그렇게 황제의 대리인이 떠난 후, 집사는 울먹이는 눈빛으로 얀피르를 바라보았다.
얼마 전, 황태자가 얀피르를 만나겠다며 남작저를 찾아왔던 날.
멀쩡히 대화를 나누던 두 남자가 갑자기 저택 밖으로 미친 듯이 달려 나가고 난 뒤로부터 무언가 이상하긴 했다.
그러고 나서 며칠 후 돌아온 얀피르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말을 전했다.
산수이가 혼자서 여행을 떠났다는, 말도 안 되는 소식을.
‘아가씨가 얀피르 경의 호위도 없이 여행을 가셨다고? 게다가 경께서 웬일로 그걸 허락하셨고? 아가씨가 혼자 산책만 나가셔도 강아지처럼 졸졸 따라나서시는 저 얀피르 경이?!’
분명 얀피르는 산수이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전하는 그의 눈이 너무나 무섭게 빛나서, 집사는 차마 더 물어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이유야 어쨌든 얀피르가 눈을 까뒤집고 뛰어나가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보건대, 산수이가 딱히 위험한 상황에 놓여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제 황제의 대리인까지 칙서를 들고 찾아온 마당에 두 다리 뻗고 마냥 기다리기만 할 수는 없었다.
대리인이 떠나자마자 유모가 얀피르에게 다그쳐 묻기 시작했다.
“얀피르 경! 산수이 아가씨가 어디에 계신지 사실은 알고 계신 거죠?”
얀피르는 짐짓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다.
‘하아. 나라고 주인이 휘온 그놈 집에 가 있는 게 좋겠냐고.’
유모는 이제 그의 어깨를 붙잡고 애원하기 시작했다.
“남작 작위 계승은 우리 아가씨의 오랜 꿈이었습니다. 아가씨가 이 사실을 아시면 분명 기뻐하실 거라고요!”
“주인의 오랜 꿈……?”
“예. 그러니까 어서 아가씨께 돌아오시라고 전해주세요.”
유모는 흔들리는 얀피르의 동공을 놓치지 않고 바라보았다.
***
결국 산수이와 세 남자는 이 사태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에데카나 공작저에 모였다.
모두가 작금의 상황이 석연치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갑자기 뜬금없이 이태리타월과 바나나를 맞교역하자니, 그것부터가 영 심상치가 않았는데 이제는 한술 더 떠서 작위를 주겠다질 않나.
“남작 작위라.”
휘온이 생각에 잠겼다.
헤슬리히 국왕과 제국의 황후가 어떤 수를 써서라도 산수이를 동굴 안에서 끌어내려 할 것이라곤 예상했지만, 이런 강력한 수를 던질 줄은 몰랐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저, 남작위 받으러 황궁 다녀올래요.”
산수이가 결코 거절할 리 없는 매력적인 제안이었으니까.
‘제길, 남작위는 내가 먼저 선사하고 싶었던 건데!’
프리트가 속으로 이를 갈았다.
걱정스런 표정의 세 남자를 향해, 산수이는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헤슬리히 입장에선 그날 있었던 일을 크게 키우고 싶지 않은 모양이죠. 교역을 핑계로 저를 페니아로 불러들여 해치겠다는 생각 역시 하지 못할 거고요. 우리 쪽에 누가 존재하고 있는지 이미 다 봤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산수이는 얀피르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헤슬리히가 정신이 나가지 않고서야 직접 산수이에게 다시 손을 댈 리는 없어 보였다. 그랬다간 바로 바비큐 통구이가 될 게 뻔하니까.
산수이가 그들을 향해 말을 이었다.
“사실은 그날, 헤슬리히 국왕이 다 봤거든요. 제가…… 바나나를 좋아하는 걸요.”
그것도 엄청 정신 나간 듯이 먹어치워 버렸지.
산수이가 조금 멋쩍은 듯 헛기침을 하더니 말을 이었다.
“그걸로 제 입막음이라도 하고 싶었나 보죠 뭐. 제 입장에서는 겸사겸사 교역도 하고, 작위도 받을 수 있으니 일석이조 아니겠어요?”
그러자 프리트가 미쳤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지금 적의 본진으로 머리를 집어넣겠다는 거야, 영애? 황후가 또 무슨 계략을 세워놨을지 모르는데?”
휘온 역시 옆에서 거들었다.
“그렇습니다, 산수이. 게다가 굳이 수여식에 참석하지 않아도 작위는 받을 수 있어요.”
얀피르도 말을 보탰다.
“내가 대신 받아올게, 주인. 그러니까 조금만 더 여기 숨어 있어.”
“하지만 무섭다고 언제까지 피하고만 있을 순 없잖아요? 게다가 황제 폐하께서 직접 작위를 내려주시는 자리에 어찌 감히 불참할 수 있겠어요.”
산수이가 모두를 안심시키며 말했다.
“걱정 마세요. 설마 폐하께서 눈앞에 계시는데 별일 있겠어요? 황후 마마와 단둘이 있는 상황만 피하면 되잖아요, 그렇죠?”
누가 이 여인이 하겠다는 일을 말릴 수 있겠는가.
결국 그들은 산수이를 설득하기를 포기한 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작위를 직접 하사받는 순간, 프리트가 황제의 옆에서 두 눈 시퍼렇게 뜨고 황후를 감시할 것이고.
얀피르는 그녀의 호위 기사로서 함께 대동할 것이며.
휘온 역시 그 영광스러운 날을 축하하기 위한 수많은 귀족들 중 한 명으로 그 자리에 참석할 것이다.
여섯 개의 눈이 죄다 산수이만 향해있는데 아무렴 별일 없을 거라고.
그렇게 되뇌며, 세 남자는 황후가 짜 놓은 함정에 걸려들지 않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아니, 그렇게 믿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