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얀피르의 때밀이 예약 시간이 끝날 무렵, 산수이는 빠르게 비덴탕으로 달려갔다.
그녀가 입구로 들어서던 찰나, 마침 모든 일정을 마친 얀피르가 건물 안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는 맞은편에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산수이를 보곤 환하게 웃으며 외쳤다.
“주인-!”
얀피르는 산수이에게 달려가 몸이 부서지도록 꽉 끌어안았다.
조금 전 씻고 나와서인지 그에게서는 청아한 비누 향이 났다.
산수이가 그의 등을 걱정스럽게 어루만져주며 물었다.
“얀피르, 오늘 고객님들 중에 혹시 널 불편하게 한 사람은 없었어?”
산수이의 질문에 얀피르는 잠시 멈칫하다, 이내 다시 미소 지으며 답했다.
“없었어.”
“정말……?”
“응.”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얀피르의 모습을 보며 산수이는 안도했다.
‘미모세 백작 부인에 대한 건 지나친 기우였나.’
그런 산수이를 보며 얀피르가 웃었다.
“주인 너, 지금 나 걱정한 거야? 왠지 기분 좋은데.”
“오늘이 네 여탕 때밀이 예약 마지막 날이잖아. 그래서 혹시나 했지.”
“음…… 그럼 나 그동안 수고했으니까 상 줘.”
산수이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어. 이번엔 내 어디가 핥고 싶은데?”
“아니 이번엔 핥는 거 말고.”
“그럼?”
얀피르가 제 볼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씩 웃었다.
“여기, 여기에다 뽀뽀해 줘.”
“뭐어?!”
그 말에 산수이는 그의 등짝을 찰싹 때렸다.
“뽀뽀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아야! 내가 그동안 얼마나 고생했는데, 이 정도도 못 해줘?!”
“뽀뽀 받으려고 일하냐? 노동은 신성한 거야. 돈으로 줄게.”
“아악, 그런 게 어딨어! 내 월급 다 까고 대신 뽀뽀로 줘, 빨리!”
산수이는 떼를 쓰는 얀피르를 보며 미소 지었다.
다행히 별일은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느라 산수이는 건너편 여탕 입구에서 미모세 백작 부인이 자신들을 매서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
불과 몇 분 전.
미모세 백작 부인은 온탕 안에서 몸을 녹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머리는 차갑게 식어갔다.
얀피르를 손에 넣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지 계속 고민이 되었으니까.
곧 제게 넘어오도록 만들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아무리 제 잘난 맛에 사는 젊은 애들이라 해도 미모세가 가진 부와 권력을 싫어하는 놈은 단 한 명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아까, 그자는 산수이라는 이름이 나올 때마다 크게 동요했다.
‘설마, 산수이 영애와 특별한 사이인 건가?’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는 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목욕을 마친 미모세가 여탕 밖으로 나왔을 때.
저 멀리 비덴탕 입구 앞에 서 있던 얀피르의 표정이 모든 걸 설명해주고 있었으니까.
그의 앞엔 물빛 머리카락을 흩날리는 작고 흰 여인이 서 있었다.
미모세는 그 아름다운 머리 색만 보고도 그녀가 산수이 비덴비덴이라는 사실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산수이 영애? 자리를 비웠다더니?’
하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건 산수이를 향한 얀피르의 눈빛이었다.
남작저에 도착했을 때 저를 향해 날을 세우던 그 사나운 인상은 온데간데없고.
지금의 얀피르는 그저 한없이 달고 부드러운 눈빛으로 제 앞의 작은 여인을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까의 그 짐승 같은 기운은 그에게서 더는 뿜어져 나오지 않았다.
저기 멀리 서 있는 것은 그저 한 마리의 꼬리 흔드는 대형견일뿐.
같은 사람이 저렇게까지 달라질 수 있다는 걸 본 미모세의 심기가 뒤틀렸다.
‘저 잘난 놈이 이런 촌구석에서 더럽게 때나 밀고 있던 이유가, 정말로 저깟 계집애 때문이었어?’
꽉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뭐라 말할 수 없는 질투와 패배감이 미모세의 마음속에서 뒤섞였다.
제 나이보다 스무 살은 더 어린 젊은 영애.
게다가 제국 내에서도 손꼽히는 미인으로 불리는 산수이 비덴비덴.
어찌 보면 미모세 역시 무의식적으로 짐작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얀피르라는 세신사가 저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던 이유를.
젊음, 젊음, 젊음……!
항상 그놈의 젊음이 문제였다.
아름다움이란 꽃도 세월이 지나면 다 시들어버리기 마련이었다.
제가 남첩으로 삼았던 수많은 사내 중, 뒤로는 그녀 몰래 젊고 어린 여자를 만나고 있던 이들이 가끔 있었다.
미모세는 돈도, 집도, 권력도, 사랑까지도 모조리 다 그들에게 갖다 줄 수 있었지만.
결코 싱그러운 젊은 육체만큼은 줄 수 없었다.
더는 젊지 않다는 것.
그것은 미모세에게 지독한 콤플렉스와도 같았다.
***
한편 이런 상황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산수이는 자꾸만 제게 뽀뽀해달라고 조르는 얀피르를 단념시키느라 여념이 없었다.
“뽀뽀는 안 돼!”
“주인, 우리 웬만큼 할 거 다 해본 사이잖아. 근데 뽀뽀는 왜 안 돼?”
그 말을 들은 산수이의 동공이 커졌다.
“할 거 다 했……? 우리가 언제?”
얀피르가 진지한 눈빛으로 하나하나 짚어가며 말을 이어나갔다.
“같이 잠도 잤고, 서로 등도 밀어줬고, 그리고 함께 하늘도 날아봤고……?”
틀린 말이 하나도 없긴 했다.
“무, 무슨……! 그렇게 말하면 남들이 오해하잖아!”
얀피르는 또다시 요망스럽게 산수이에게 얼굴을 들이대며 웃었다.
“왜, 다 맞는 말이긴 하잖아.”
“그건 그렇지만……!”
산수이는 또다시 얀피르에게 말려든 기분이 들었다.
‘어째 얀피르가 갈수록 점점 더 나를 잘 놀린다는 생각이 드는 건…… 내 착각이겠지?’
물론 착각이 아니었다.
그의 요망함 레벨은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었으니까.
“아무튼 안 돼.”
“쳇, 볼에 뽀뽀 좀 해주면 어때서. 키스해달란 것도 아니구만.”
“키, 키스는 더 안 되지!”
“……그럼 하나만 묻자, 주인.”
“뭔데?”
“황궁에 있을 때 내 생각 많이 했어?”
“얘, 얘가 뭐래. 안 했거든?”
“한 번도? 난 진짜 죽는 줄 알았는데. 매일매일 주인 네 생각밖에 안 나서.”
풀죽은 얀피르를 보며, 산수이가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어, 뭐…… 하, 한두 번쯤은 났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러자 얀피르가 씩 미소 지었다.
“거기서도 내가 준 목걸이는 계속 차고 다녔지?”
“그럼, 당연하지. 이게 어떤 선물인데.”
산수이는 제 목에 걸린 구슬을 들어 보였다.
얀피르는 안심한 듯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잘했네.”
산수이는 어째 점점 둘 사이의 포지션이 바뀌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근데 이 자식이 요새 부쩍 내 머리를 자주 쓰다듬는단 말이야……?’
원래 얀피르를 멍멍이처럼 귀여워하던 건 제 역할이었는데.
산수이는 멋쩍은 듯 제 목에 걸려있는 구슬을 만지작거렸다.
작고 검은 구슬은 그녀의 손가락 안에서 여러 가지 빛을 내며 반짝였다.
그때, 뒤에서부터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응……?’
산수이는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그녀의 눈이 여탕 앞에 서 있던 미모세와 마주쳤다.
‘저분이구나, 그 소문의 미모세 백작 부인이!’
드디어 그토록 만나 뵙고 싶던 사교계의 꽃, 미모세를 눈앞에 마주한 것이다.
산수이는 미모세를 향해 해사하게 웃어 보였다.
하지만 얀피르는 그저 차가운 시선으로 미모세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며 분개한 미모세의 속마음도 모른 채, 산수이는 그녀에게로 빠르게 다가가 예를 다해 인사를 올렸다.
“미모세 백작 부인님, 이렇게 몸소 저희 비덴탕을 찾아주시다니 큰 영광입니다.”
미모세는 뒤틀린 심기를 내리누른 채 태연하게 산수이가 건네는 인사를 받았다.
“어머,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요. 그대가 출타 중이라 들어서.”
“부인께서 저희 영지에 방문하셨다는 전갈을 받자마자 부리나케 달려왔답니다. 예전부터 부인을 꼭 저희 비덴탕에서 모시고 싶었거든요.”
저를 보며 웃는 산수이에게서는 싱그러운 생기가 쏟아져 나왔다.
미모세는 그런 산수이가 너무도 아니꼬웠다.
“그랬군요. 그 사고 이후론 처음 보는 것 같은데, 몸은 좀 괜찮아지셨는지……? 영애에 대해 안 좋은 소문이 들려서 걱정했답니다.”
한참도 더 지난 사고 얘기를 굳이 꺼내는 이유야 다분했다.
산수이에게 치명적이었던 루머를 다시금 화제에 올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휘온 덕에 이제는 잠잠해졌지만, 한 여인에게는 치명적이었던 그 소문을.
미모세가 워낙에 크게 말한 탓에, 얀피르는 굳이 월등한 청력을 사용하지 않아도 방금 전 그 말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안 좋은 소문……?’
그가 얼굴을 찡그렸다.
하지만 산수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웃으며 답했다.
“걱정해주신 덕에 쾌차하였답니다. 보세요, 이렇게 튼튼한걸요.”
그녀는 제 팔의 알통을 손으로 탁탁 쳐 보이며 말했다.
미모세는 영애답지 않은 산수이의 행동에 깜짝 놀랐다.
‘뭐, 뭐야? 얘, 분명 이런 캐릭터가 아니었는데?’
분명 그 마차 사고 전에는 말수 적고 얌전한 보통의 영애였다.
멀리서만 보던 사이였지만 결코 이런 타입이 아니란 건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목욕탕 경영이니 때밀이니.
제국의 여성으로선 선택하기 힘든 일들을 시작했다 들었을 때부터, 산수이가 마차 사고 후 머리를 다쳐 정신이 돌아버린 건 아닌가 생각했었다.
그런데 오늘 만나보니 그녀는 성격까지 변해있는 듯했다.
그리고 그 모습이 더욱더 미모세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지금 미모세의 앞에서 산수이가 내성적인 모습을 보이며 쭈뼛댔다면 저 얀피르라는 자를 뺏어오는 건 식은 죽 먹기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생기 넘치는 산수이를 보니 미모세는 왠지 모르게 기분이 나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찰나, 산수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미모세를 바라보며 물었다.
“부인? 안색이 좋지 않으신데, 혹시 저희 비덴탕을 이용하시면서 불편하셨던 점이라도 있으신지요?”
멀리서 산수이의 말을 들은 얀피르는 약간 찔렸다.
‘때는 정말 열심히 밀어주긴 했어. 하지만 찢어 죽이고 싶은 걸 간신히 참느라, 주인이 매번 강조하는 예절과 존댓말까지는 너무 힘들었다고, 제기랄.’
얀피르 입장에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거였지만.
만에 하나라도 저 여자가 뭐라 불평을 하는 날엔 산수이가 실망할 텐데.
하지만 얀피르의 이런 걱정이 무색하게, 미모세는 산수이에게 웃으며 답했다.
“아니요. 저기 계신 세신사분이 어찌나 저를 특별하게 대해주시던지, 아주 만족스러웠답니다?”
응……?
산수이는 그 말이 묘하게 거슬렸다.
잠시 멈칫하던 그녀가 억지 미소를 지으며 미모세에게 답했다.
“……그러셨다니 다행이네요. 뭐 더 필요하신 것은 없으세요?”
“산수이 영애, 죄송하지만 제가 좀 피곤해서 먼저 들어가 봐야겠습니다.”
귀찮은 듯 내뱉는 그녀의 말에 산수이가 멋쩍은 듯 웃었다.
“아! 예, 그러셔야죠! 사용인들에게 미리 귀빈실을 정리해두라 말해놨습니다. 편안한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그럼.”
미모세가 자리를 떠나며 생각했다.
‘물가에 돌을 던져놨으니 이제 곧 파동이 일겠지.’
젊지만 불임인 여인.
비록 소문일 뿐이더라도 얀피르가 그걸 듣고 과연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
미모세는 속으로 조소하며 걸어갔다.
산수이는 미모세 백작 부인이 떠난 자리를 한참 바라보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아까 그녀가 했던 말이 묘하게 신경 쓰였다.
하지만 그 잡념은 곧 얀피르가 그녀에게 다가오는 바람에 끊겨버리고 말았다.
“주인? 안 좋은 소문이라니, 혹시 너 어디 아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