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산수이는 결국 프리트와 함께 마차를 타고 남작저로 향했다.
그녀의 굳은 표정을 빤히 바라보던 프리트가 입을 열었다.
“나랑 같이 가는 게 그렇게 불만이야, 영애?”
“불만이라기보단, 대체 공사다망하신 저하께서 왜 굳이 남작령까지 따라오시는지 궁금한 겁니다.”
“그 미모세라는 여자, 정말로 제정신이 아니라니까? 그대를 다짜고짜 공격할지도 모른다고.”
“귀부인께서 설마 그러시겠습니까.”
“응, 설마 그래. 그러니 내가 그대를 지키러 함께 가는 거고.”
“그래서 아까 휘온 공작이 대신 저와 함께 가겠다 했었잖아요.”
프리트가 산수이와 같은 마차에 올라타는 바람에, 휘온은 지금 다른 마차를 타고 열심히 그들을 쫓아오고 있는 중이었다.
“쯧, 휘온. 할 일이 많은 것으로 아는데 이렇게 쓸데없는 걸음으로 시간을 낭비하다니. 에데카나 공작가의 앞날도 캄캄하군.”
“제가 보기엔 카데베르 제국의 앞날이 더 캄캄한데요……?”
“영애는 어째 한마디도 지질 않아?”
“틀린 말은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 내가 그래서 영애를 좋아해. 그러니 나랑 결혼해 줘.”
“제 의사는 안 물어보시고요?”
“영애는 낭만도 없어? 어렸을 때 왕자님이랑 결혼하는 꿈 같은 거 안 꿔봤냐고?”
“꿔봤죠. 하지만 상상 속의 왕자님이 이런 집착남은 아니었는데요.”
산수이와 프리트의 설전은 끝날 줄 몰랐다.
하지만 프리트는 전혀 심기가 불편해 보이지 않았다.
되레 이 상황이 즐거운 듯 미소를 띠며 산수이에게 물었다.
“볼수록 신기하다니까. 그대는 정말 내가 안 무서워?”
“제가 저하를 무서워하길 바라세요?”
사실 산수이는 제 주머니에 이태리타월이 들어 있는 한, 아무것도 무서울 게 없었다.
‘어차피 때 한번 밀어버리면 다들 얌전해지는데 뭐.’
오히려 산수이의 그런 모습이 프리트의 마음을 더 흔들어 놓고 있었다.
저를 무서워하지 않고, 그냥 인간 프리트 폰 카데베르 자체로만 봐주는 여인.
지독한 피 냄새에 사로잡혀 살아가던 그를 어둠 속에서 꺼내준 유일한 구원.
저를 계속해서 튕겨내는 모습까지도 사랑스러웠다.
이렇게 계속 결혼하자고 세뇌하면 결국 넘어오게 되리라.
“아니. 계속 지금처럼만 해, 딱 좋으니까.”
어느덧 마차가 비덴비덴 남작저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
“미모세 백작 부인께서, 다른 고객님의 때밀이 예약 확인증을 대신 들고 오셨다고요?”
남작저에 도착해 유모에게서 전말을 듣게 된 산수이는 깜짝 놀랐다.
미모세 백작 부인이 방문했다기에, 당연히 자신에게 예약 없이 때를 밀러 온 것이겠거니 했다.
그녀가 본 예약 명단 중 어디에도 미모세의 이름은 없었으니까.
산수이는 곧 그녀의 진짜 목적을 눈치챘다.
‘얀피르를 지명하고 싶으셨던 거구나.’
오늘은 얀피르의 마지막 여성 고객 예약이 있던 날이니까.
‘이미 얀피르의 예약이 꽉 차서 오늘이 지나면 만날 수 없으니까. 그래서 이런 방법을 써서 방문하신 거였어!’
산수이는 알 수 없는 불편함을 느꼈다.
저런 극성 고객들 때문에 얀피르가 여탕에 더는 들어가고 싶지 않아 했던 것인데.
그 사교계의 중추라고 불리던 미모세 백작 부인에게 저런 면이 있었을 줄이야.
‘얀피르는 괜찮은 건가?’
산수이의 낯빛을 본 유모가 말을 이었다.
“슬슬 끝날 때가 되었으니, 곧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한편 산수이와 유모의 대화가 끝나길 기다리며 응접실에 앉아있던 할 일 없는 두 남자.
프리트와 휘온 역시 대충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한 후였다.
휘온이 먼저 입을 열었다.
“보아하니 미모세 백작 부인이 이곳에 때를 밀러 온 목적이 따로 있었군요. 아마도, 그…….”
휘온은 차마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프리트가 태연하게 그가 하려던 말을 이어받았다.
“새로운 남첩을 만들러 왔다고? 쯧, 그래봤자 그 얀피르란 놈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을 것 같던데.”
프리트의 입에서 나오는 경박한 말을 들은 휘온이 난감하다는 듯 말했다.
“저하, 언어 선택을 좀 황족답게 하심이.”
“아무튼 미모세의 방문 목적이 산수이 영애는 아니었으니 됐어.”
다행이라며 끄덕이는 프리트와는 다르게, 휘온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상념에 잠겼다.
‘제 사람을 첩으로 삼으려는 걸, 산수이가 분명 보고만 있지는 않을 텐데.’
***
약 한 시간 전.
얀피르는 탈의실에서 제 눈에 안대를 둘러 감으며, 조금 전 유모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미모세 백작 부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으신 건 이해합니다. 하지만 저분은 산수이 아가씨께서 예전부터 꼭 비덴탕의 고객으로 모시고 싶어 하셨던 분입니다.”
“뭐? 그게 진짜야?!”
산수이의 뜻이 그렇다면 때 한번 밀어주는 건 일도 아니었다.
‘뭔가 기분 나쁜 인간이지만, 알 게 뭐야. 난 산수이가 원하는 대로 해주면 그뿐.’
어쩌면 제 마지막 여성 고객이 저 미모세라는 인간이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산수이가 그토록 모시길 원했다던 손님이질 않나.
그런 중요한 손님의 때를 잘 밀어서 보내드리면, 그녀에게 칭찬받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보는 얀피르였다.
게다가 유모의 말에 따르면, 백작 부인의 때밀이가 끝날 때쯤 산수이가 이곳에 도착한다고 했다.
‘때 다 밀고 나면 주인한테 상 달라고 해야지.’
한번 꽉 끌어안아달라고 할까? 아니면 역시, 입을 맞추…….
얀피르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럼 분명 주인은 도망가겠지. 그럼 뭘 부탁해야 하나?’
그렇게 얀피르는 행복한 고민에 잠긴 채 때밀이실로 향했다.
한편, 미모세 백작 부인은 대리석 판 위에 엎드린 채 얀피르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오늘 얀피르를 유혹할 생각이었다.
여태껏 그녀가 권력과 재산을 바탕으로 다가갔을 때 거절했던 사내는 한 명도 없었다.
이 제국에서 미모세를 뒷배로 둘 수 있다는 건 엄청난 일이었으니까.
이윽고, 때밀이실의 문이 열리고 얀피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눈가에 검은색 비단 끈을 칭칭 동여매고 나타난 얀피르를 본 미모세는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트렸다.
“하……!”
그녀가 얀피르를 향해 명령하듯 말했다.
“지금 눈을 가리고 세신을 하겠다는 거야?”
하지만 얀피르는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제 손에 이태리타월을 돌려 감으며 답했다.
“눈 가려도 때를 미는 데는 아무 지장 없습니다. 그리고 아까 분명 말 짧게 하지 마시라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그 말에 미모세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너 설마, 내가 누군지 모르니?”
아까 분명 유모가 얀피르에게 미모세 백작 부인의 이름을 말해주긴 했었다.
하지만 그 쓸데없는 정보는 이미 그의 대뇌 속에서 지워진 지 오래였다.
그가 관심 없다는 듯 말했다.
“알아야 합니까?”
그런 얀피르의 태도가 오히려 그녀의 마음에 불을 지폈다.
곧 얀피르는 때수건을 손에 모두 감고 제 손바닥을 짝짝 쳐 보였다.
그러자 그의 팔과 가슴 근육들이 요동쳤다.
그 모습을 본 미모세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점점 더 마음에 드네.’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그럼 어디 한번 밀어보렴. 네 솜씨 좀 보자꾸나.”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그렇게 얀피르는 그녀의 몸에 손을 올려 세신하기 시작했다.
사실 미모세는 다른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얀피르는 정말 열심히 때만 밀 뿐이었다.
참다못한 미모세가 얀피르의 손을 덥석 잡아 제 몸에 갖다 대려던 순간.
이를 먼저 눈치챈 얀피르가 재빨리 몸을 피하며 물었다.
“뭡니까?”
‘뭐야, 분명 앞이 보이지 않을 텐데? 대체 어떻게 피한 거지?’
당황한 채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미모세를 향해, 얀피르가 작게 한숨 쉬었다.
“다치기 싫으면 가만히 좀 있어요.”
그렇게 얀피르는 또다시 때만 밀어댔다.
‘그렇게 나오겠다 이거지.’
미모세는 얀피르를 향해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다.
“아야!”
“!”
순간 때를 밀던 얀피르의 손이 멈칫했다.
‘뭐지? 분명 살살 밀고 있었는데?’
이 고객의 몸에 생채기라도 냈다간 산수이한테서 상을 못 받을 텐데.
얀피르가 다급히 물었다.
“괜찮습니까?”
“피부가 너무 쓰라려. 이태리타월이 너무 거친 것 같아.”
미모세가 얀피르의 손에 감겨있던 이태리타월을 주욱 잡아당기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이런 건 다 풀어버리고, 그냥 마사지나 해 줘.”
“하……!”
그 말을 들은 얀피르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이런 상황에 너무나도 익숙했으니까.
‘그 사생인지 뭔지 하는 영애랑 같은 과의 인간이군. 지긋지긋해.’
그가 미모세에게서 이태리타월을 잡아끌며 말했다.
“놓으시죠.”
“아프단 말이야. 맨손으로 해 줘.”
“그럼 마사지 예약을 따로 잡고 다시 방문하시든가요.”
“그것도 좋은 생각이네. 그럼 네 밑으로 예약 넣어줄래?”
“마사지는 제 담당이 아닙니다. 비덴비덴 남작 영애님 아래로 달아드리죠.”
“지금 나보고 걔한테 마사지를 받으라는 거야?”
그러자 얀피르가 낮게 그르렁거렸다.
“걔라니. 존칭 붙이세요.”
하지만 미모세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궁금했는데. 이 때밀이 일, 산수이가 강제로 시킨 거지?”
“뭐라고요?”
“아니, 좀 이상하잖아. 너처럼 곱상한 애가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게.”
“이 일이 뭐가 어때서요?”
“그러지 말고 너, 내 첩이 되지 않을래?”
지금 대체 이 여자가 뭐라는 거야?
얀피르의 미간이 구겨졌다.
하지만.
‘참자, 산수이가 기다렸던 고객이라고 하니까.’
잠시 분노에 사로잡혔던 얀피르는 제 살갗에 피어오르는 드래곤의 비늘을 억누른 후, 계속해서 미모세의 때를 밀었다.
“관심 없습니다.”
미모세가 그를 향해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 지었다.
“잘 생각해. 내 밑으로 오면 평생 놀고먹을 수 있어. 산수이 같은 몰락한 가문의 거지 계집 밑에 있어봤자 득이 될 게 하나도 없…….”
결국 얀피르는 눈이 뒤집혔다.
“야.”
얀피르의 말이 갑자기 짧아지자 미모세는 크게 당황했다.
“뭐, 뭐라고?”
“너 말조심해, 그리고.”
그가 이어서 내뱉었다.
“아까부터 자꾸 산수이, 산수이 하는데. 주인 아니었으면 넌 이 때밀이실에 들어오지도 못했어, 알아?”
“뭐?! 너!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지금 이러는……!”
“하아, 네가 누군진 전혀 관심 없다니까.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남의 예약까지 가로챘으면, 닥치고 조용히 때나 밀고 가.”
“너, 감히!”
분개한 미모세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얀피르가 그녀의 등을 가볍게 눌러버렸다.
“꺄악!”
그러고는 서둘러 때를 밀기 시작했다.
그녀의 때를 미는 얀피르의 손길이 점점 더 빨라졌다.
얼른 해치우고 이 인간을 내보내고 싶다는 마음으로.
물론 그러면서도 산수이에게 상 받을 생각은 포기하지 않는 얀피르였다.
‘최대한 빠르게 끝내자. 하지만 빼먹는 곳 없이 구석구석, 상처 하나 없이.’
한편 미모세는 자존심이 상해 견딜 수가 없었다.
정말이지, 자신에게 이토록 관심이 없는 사내는 처음이었으니까.
‘어디 두고 보자. 너도 결국은 다른 사내들처럼 내 것이 되고 말 테니까.’
점점 더 탐이 났다.
자신의 앞에서 겁 없이 구는 이 사내가, 날뛰면 날뛸수록 더욱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