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세신사 전문학교 설립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이미 비덴탕의 위상이 높아져 있었기에 세신사를 지원하는 사람들도 많았고.
얀피르 역시 선생님으로서의 역할을 훌륭하게 해냈다.
덕분에 산수이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수도로 향할 수 있게 됐다.
드디어 황궁에 찜질방을 짓는 것이다.
건설 기획부터 공사까지, 긴 일정이 될 터였다.
중간중간 수도와 비덴비덴 남작령을 오가긴 하겠지만.
그래도 황궁에서 당분간 머물 예정이다 보니 짐을 싸긴 해야 했다.
유모는 열심히 각종 장신구와 화려한 드레스들을 날라다 짐가방 안에 집어넣었다.
하지만 산수이가 그것들을 보이는 족족 빼내 버렸다.
마침내 분통이 터진 유모가 산수이에게 소리 높여 애원했다.
“아가씨……! 황궁에 가시는 것이잖습니까. 제발 이번만큼은 이 유모의 말을 듣고 예쁜 드레스를 몇 벌이라도 챙겨가세요. 네?”
“하지만 이건 프릴이 너무 주렁주렁 달려서 활동하기에 거추장스럽다고요!”
유모가 이번만큼은 질 수 없다는 듯 목소리를 드높였다.
“이 옷 입고 때를 미실 건 아니잖아요! 때밀이복도 따로 만드셨으면서. 더군다나 이제 황궁엔 황태자 저하도 계신다구욧!”
“황태자 저하가 계신 거랑 예쁜 드레스 들고 가는 게 무슨 상관인데요!”
“아니 왜 상관이 없어요, 아가씨. 잘하면 황태자비가 되실 기회라고요!”
“황태자비라니, 으악! 생각만 해도 끔찍한 소리 하지 말아요, 유모.”
일전의 원치 않던 목욕탕 청혼이 생각난 산수이는 질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산수이를 보며 유모가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였다.
“왜요, 아가씨. 황태자 저하가 마음에 들지 않으세요? 제가 보기엔 아주 훤칠하시고, 게다가 조시…… 흡!”
유모는 조신남이라고 말할 뻔하다 서둘러 고쳐 말했다.
일전에 집사와 함께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다는 걸 절대 들켜서는 안 됐다.
“소, 소문과는 달리 황태자 저하께서는 성군의 자질이 보이는 훌륭한 분이시던걸요.”
“그쵸, 훌륭한 분이시죠. 그렇지만 전 별로 관심 없어요.”
이 말에 유모가 산수이에게 가까이 다가와 팔꿈치로 그녀를 슬쩍 건드리며 물었다.
“왜요. 그럼 누가 마음에 드시는데요, 아가씨? 이 유모한테만 얼른 살짝 털어놔 보세요.”
“그런 사람 없어요, 유모.”
하지만 이미 신난 유모를 말릴 방법은 없었다.
“호옥시 에데카나 공작니임?”
“관심 없다니까요.”
“그러엄…… 설마 얀피르 겨엉?”
“아 진짜, 아니라니까요!”
산수이는 버럭 큰 소리를 내고 말았다.
깜짝 놀란 유모가 벌렁거리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말했다.
“아이고 깜짝이야! 그냥 아니라고 하시면 되지, 왜 소리를…….”
“미, 미안해요, 유모…….”
미안한 마음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산수이를 보며 유모가 말을 덧붙였다.
“그렇게 미안하면 이 유모한테만 살짝 말씀해 보세요. 정말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
“……유모.”
“네, 아가씨. 얼른 말씀해 보세요.”
산수이가 유모의 귓가에 나지막이 말했다.
“저는 목욕탕과 결혼했어요.”
“아가씨이!”
그 말을 끝으로 산수이는 가방 안에 있는 온갖 장신구들을 다시 옷장 안에 집어넣어 버렸다.
그런 산수이를 보며 유모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제국에서 제일 잘생긴 세 분을 눈앞에 갖다 놔도 성에 안 차시는 건가. 대체 눈이 얼마나 높으신 거지, 울 아가씨?’
유모는 손으로 이마를 부여잡고 고뇌했다.
하루빨리 아가씨가 결혼하셔야 할 텐데. 그래야 이 가문도 유지될 것이 아닌가.
카데베르 제국에서는 귀족이 작고했을 시, 그의 장자가 자동으로 작위를 승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딸의 경우는 달랐다.
만약 슬하에 딸밖에 없을 경우, 혼인을 통해서 데려온 데릴사위가 작위를 대신 이어야 했다.
만일 여식이 스스로 작위를 잇고 싶다면, 제국에 공을 세워서 황제의 인정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이 제국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었다.
결혼을 통해 제 남편이 작위를 잇게 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유모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만일 황태자 저하와 혼인하신다면 비덴비덴 남작가는 영영 사라지겠지만, 대신 울 아가씨는 제국의 황태자비, 더 나아가선 황후가 되실 테고.
휘온 공작님과 결혼하신다면 작위가 높은 쪽을 따르는 관례에 맞춰 아가씨 역시 에데카나 공작 부인이 되실 터.
얀피르 경과 혼인하시면 그분께서 데릴사위로 들어와 비덴비덴 남작위를 대신 이어받으실 수 있겠지…….’
어떤 선택을 하든 나쁠 것이 없었다.
그렇다면 중요한 건 산수이의 마음인데.
하지만 산수이는 사내들에겐 영 관심도 없이 저 때수건이라는 것만 가지고 놀고 있으니.
유모 입장에선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어서 아가씨한테 좋은 짝을 찾아드려야 나중에 죽어서 주인 내외분을 뵐 면목이 설 텐데. 하아.’
그때 갑자기 그녀의 방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났다.
산수이가 문을 향해 외쳤다.
“들어오세요!”
곧이어 방문이 열리고, 얀피르가 모습을 드러냈다.
“주인, 잠깐 나한테 시간 좀 내줄 수 있어?”
당연히 유모는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진즉 자리를 피해줄 준비를 하고 있었다.
***
이제 방 안에는 단둘만 남았다.
평소와는 다르게 침울해 보이는 얀피르를 보며, 산수이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얀피르, 내가 가는 게 많이 아쉬워?
“그걸 말이라고.”
“중간중간 자주 내려올 거야. 그러니까 잘 지내고 있…….”
그러나 산수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얀피르가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야, 얀피르?”
놀란 그녀를 향해 얀피르가 나직이 귓가에다 대고 속삭였다.
“이번에는 내가 같이 가주지 못하니까, 항상 몸조심해야 해.”
그의 단단한 가슴 근육에 산수이의 얼굴이 닿았다.
곧 그녀의 가슴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얀피르의 체향이 산수이의 코끝을 간질였고, 귓가에는 그의 가슴에서 들려오는 심장 박동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것은 뭔가 평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산수이는 어색한 분위기를 깨보려고 태연한 척 대답했다.
“너, 너도. 너무 무리해서 일하지는 말고.”
“내 걱정은 하지 마.”
그때, 갑자기 산수이의 목덜미에서 얀피르의 따뜻한 손길이 느껴졌다.
그가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희고 가녀린 목에 무언가를 열심히 걸어주고 있었다.
“얀피르? 지금 뭐 해?”
“……됐다.”
산수이의 목에는 짙은 밤하늘 색을 연상시키는, 작고 영롱한 구슬 목걸이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뜻밖의 선물을 받은 산수이가 놀라서 물었다.
“목걸이잖아?”
얀피르가 멋쩍은 듯 말했다.
“내가 주는 선물이야. 오늘이 지나면 이제 한동안 못 보니까.”
산수이는 얀피르가 제게 걸어 준 목걸이를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그녀의 두 눈이 감동으로 번져갔다.
“진짜 예쁘다. 고마워.”
칠흑 같은 그 구슬은 마치 자개처럼 움직이는 각도에 따라 묘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응? 그런데 이 빛깔, 분명 어디선가 본 적이.’
곧 산수이의 머리에 퍼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녀가 놀란 눈으로 얀피르를 바라보며 물었다.
“얀피르 이거 설마, 네……?”
그가 미소를 띠며 말했다.
“바로 알아보네. 맞아. 내 비늘 조각이야.”
“정말 네 비늘이라고?!”
그럼 제 살 조각을 잘라서 준 거란 말인가.
산수이는 제 목에 걸려있는 구슬과 얀피르를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비늘 떼어낼 때 안 아팠어?! 나 장신구 같은 거 필요 없는데 왜 그랬어!”
얀피르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는 걱정이 서려있었다.
그가 산수이를 안심시키며 웃어 보였다.
“하나도 안 아팠어. 걱정 안 해도 돼.”
“그래도…….”
“아, 혹시 마음에 안 들어? 안 예뻐서 그런 거면 다시 만들어…….”
“아니! 그런 거 절대 아냐. 정말로 내 맘에 쏙 들어.”
산수이는 제 목에 걸린 작은 구슬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미소 지었다.
“이게 어떻게 안 예쁠 수가 있어.”
얀피르는 그런 산수이를 빤히 바라보았다.
제 비늘로 만든 목걸이를 걸고 예쁘게 웃고 있는 그녀가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널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어.’
얀피르가 그녀에게 입을 열었다.
“주인, 나 부탁이 하나 있는데.”
“뭔데?”
그가 잠시 머뭇거리다 말을 이었다.
“그 목걸이, 황궁에 가서도 빼지 말고, 계속 목에 걸고 있어 줄래?”
산수이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게 뭐 어려운 부탁이라고. 그러지 뭐.”
“다행이다.”
“그런데 왜? 이거 뭐 부적이라도 돼?”
아니면 게르마늄 목걸이 같은 건가?
산수이는 원래 세계의 목욕탕 탈의실에서 팔던 각종 건강 팔찌며 목걸이들을 떠올렸다.
걸고 있으면 용의 기운이 솟아나는 건가.
“그런 건 아니지만.”
잠시간의 침묵 끝에 얀피르가 입을 열었다.
“이 목걸이는 내 분신이나 다름없거든. 그럼 우리가 멀리 떨어져 있어도 항상 함께할 수 있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아…….”
그렇게 말하며 저를 애틋하게 바라보는 얀피르의 눈빛에, 산수이는 뭐라 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얀피르가 산수이의 물빛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 입을 맞추곤 말했다.
“아무튼 약속했다? 절대 빼지 마. 설령 주인이 목욕을 한다 해도…… 아야!”
그 말에 당황한 산수이가 얀피르의 등짝을 때렸다.
“왜, 왜 하필 예시로 드는 게 내가 목욕할 때야! 하여간 이 변태!”
“아, 왜 자꾸 나보고 변태래! 그만큼 몸에서 떼어놓지 말라는 소리지!”
그녀가 등짝을 찰싹찰싹 때려가며 내뱉었다.
“넌 목욕할 때도 나와 항상 함께하고 싶냐!”
“그야 당연……! 아야.”
그렇게 얀피르를 타박하면서도 산수이는 왠지 마음이 뭉클했다.
그건 일평생 혼자였던 자신이 난생처음으로 받아 본 선물이었으니까.
그것도 애정이 듬뿍 담긴.
***
수도에 있는 미모세 백작 부인의 저택 안.
그녀는 거실 소파에 앉아 초조한 표정으로 자신의 사용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비덴탕에서 얀피르에게 때를 밀려고 했지만, 그가 더 이상 여성 고객을 받지 않기로 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결국 미모세 백작 부인은 웃돈을 주고 기존 예약 고객의 확인장을 구매하기로 했다.
상대는 변방의 시골에 위치한, 초라하기 짝이 없는 몰락 귀족 가문의 여식이었다.
‘도대체 비덴비덴 영애는 왜 그런 볼품없는 인간들까지 고객으로 받는 거야? 나까지 질 떨어지게.’
이윽고 사용인 한 명이 들어와 그녀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어떻게 됐어?”
“사례비와 함께 살롱 초대장을 보내드리겠다고 했더니, 예약 확인장을 흔쾌히 넘겨주셨습니다.”
“역시 그 가문의 수준을 알 만하군. 빨리 가져와 봐.”
사용인은 제가 들고 온 서신을 미모세 백작 부인의 손에 넘겼다.
그녀는 급하게 봉투를 뜯어 안에 적힌 글귀를 확인했다.
[0월 0일 00시, 때밀이 예약 확정. 담당 세신사: 얀피르]
그 내용을 확인한 미모세 백작 부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드디어 만나볼 수 있겠네. 그 소문 자자한 세신사를…….’
그녀가 입맛을 다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