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아직 해도 뜨기 전의 추운 새벽.
비덴비덴 남작저 뒤편의 비덴산에는 수많은 영애들이 담요를 뒤집어쓴 채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아무리 춥고 힘들어도, 오랜만에 얀피르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이런 절호의 기회를 결코 놓칠 수는 없었다.
현재 그에게 때밀이 예약을 넣는다는 건 거의 기적에 가까운 확률을 뚫어야만 가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대체 그가 몇 시에 나타날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혹시라도 그를 놓칠까 염려되어 꼭두새벽부터 이곳에서 진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 그들에게는 든든한 물주이자 회장님이 있었다.
사생크 패니는 가문의 기사들을 대동하여 새벽 내내 얀사모 회원들의 안전을 책임졌다.
또한 각종 담요와 커피 등을 제공하며 그녀들의 체온이 떨어지지 않게 보살폈다.
그렇게 기다리기를 몇 시간.
드디어 아침 해가 떠오르며, 저 멀리서 비덴산을 향해 걸어오는 얀피르가 보였다.
“……!”
사생크 패니가 외쳤다.
“자, 모두 준비한 걸 꺼내세요!”
“네!”
그녀의 지휘 아래, 수많은 영애들이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얀피르의 시야에 그들이 들어오던 순간.
“꺄아아아아-!”
“야니 오빠아악-!”
그녀들은 얀피르의 이름이 한 땀 한 땀 새겨진 각종 퀼트와 자수를 머리 위에 치켜들고 흔들어댔다.
눈앞에서 물결치는 자신의 이름을 본 얀피르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야, 야니 오빠?’
귀를 찢을 듯한 비명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오빠 사랑해요! 아아악!”
“한 번만 웃어주세요!”
대부분 끽해야 이제 갓 데뷔탕트를 치렀을, 아주 어린 영애들이었다.
하지만 가운데 서서 그들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건.
아마도 산수이와 비슷한 연배일 것으로 생각되는, 사생크 패니 백작 영애였다.
다른 건 몰라도, 얀피르는 저 주황 머리 영애의 목소리만큼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눈을 가리고 때밀이실로 향하고 있을 때 일부러 몸을 부딪쳐 오는 것은 물론이요.
조금의 휴식 시간이라도 생기면 귀신같이 알고 찾아와 귀찮게 해 댔으며.
게다가 얼마 전엔, 남의 예약 시간에 몰래 때밀이실에 숨어있다가 얀피르한테 딱 걸리는 사건까지 발생하고 말았다.
얀피르는 길게 한숨을 내쉰 후, 저를 향해 천 조각을 흔들고 있는 어린 영애들을 향해 말했다.
“영애님들? 여기 엄청 위험한 곳인 건 알아? 부모님께는 말씀드리고 온 거야?”
“아니요!”
“꺄악, 말 걸어 주셨어!”
그 말을 들은 얀피르가 경악해 소리쳤다.
“뭐? 다들 정신 차려! 나는 너희들의 인생을 책임져 주지 않아!”
하지만 그럴수록 그녀들의 함성은 더욱더 커져만 갔다.
“지금 야니 오빠가 우리 걱정해 주신 거야? 어떡해-!”
“꺄아악! 다 이뤘어! 당장 죽어도 좋아!”
도대체 이 애들을 진정시킬 방법이 떠오르질 않았다.
그때였다.
갑자기 사생크 패니 영애가 그에게로 다가왔다.
“이제야 저희에게 말을 붙여주시네요, 얀피르 님.”
그녀가 싱긋 웃으며, 서늘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항상 산수이 영애님하고만 대화하시잖아요.”
산수이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그녀의 표정이 섬뜩했다.
그러자 여태껏 침묵을 지키던 얀피르가 처음으로 그녀에게 입을 열었다.
“너 대체 뭐야?”
그러자 그녀가 분노에 가득 차 웅얼거렸다.
“몇 번이나 알려드렸잖아요! 제 이름은 사생……!”
“네가 날 괴롭히는 건 다 참을 수 있어, 그런데.”
“괴, 괴롭히다뇨? 제가 언제!”
“그것도 모자라, 감히 그 입에다 주인 이름을 담아?”
이윽고 황금빛으로 빛나던 그의 눈동자에 전에 없던 살기가 어렸다.
그 모습을 본 사생크 패니는 너무 놀라 다리에 힘이 풀릴 지경이었다.
‘오, 오빠 눈이……!’
눈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몸 전체에서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위압감이 뿜어져 나왔다.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제 눈앞의 이 아름다운 남자가, 이전의 그가 맞는지조차 헷갈릴 지경이었다.
얀피르가 그녀에게만 들릴 목소리로 낮게 그르렁대며 경고했다.
“너, 얘네들 다 집에 돌려보내 주고. 오늘 이후로 다시는 내 눈에 띄지 마.”
사생크 패니는 거의 거품을 물기 직전이었다.
어떻게 갑자기 이렇게 그가 두려워질 수 있는지 저조차도 의문이었다.
‘주, 죽는다. 진짜로 죽는다……!’
얀피르가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특히 산수이 건드리면, 진짜 가만 안 둔다.”
그날 이후로 사생크 패니는 남작령에서 모습을 감췄다.
하지만 제2의 사생팬이 또다시 나타나지 않을 거란 보장은 없었다.
***
응접실로 들어온 얀피르가 질렸다는 듯 의자 뒤로 몸을 젖히며 중얼거렸다.
“여성 고객님들이 계속 따라다녀서, 너무 힘들어.”
그 말을 들은 휘온과 산수이의 얼굴이 동시에 일그러졌다.
이것이 그 공감 안 된다는 유명인의 괴로움인가.
‘아주 한류스타 납셨네…….’
사생크 패니 영애 사건에 대해선 미처 알지 못했던 산수이는, 그저 불만스러운 듯 속으로 읊조렸다.
아무튼 얀피르는 그간 얼마나 시달렸는지 눈 밑에 다크서클이 길게 내려와 있었다.
그런 얀피르를 보자, 산수이는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저 지친 표정 좀 봐. 하여간 그놈의 얀사모인지 뭔지 사람을 이렇게 힘들게……!’
여기까지 생각하던 산수이는 순간 멈칫했다.
아까 휘온이 자신에게 했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이게 그렇게까지 화를 낼 일인지는 모르겠군요.’
그러게? 나 왜 이래?
‘그래. 이건, 얀피르의 건강이 걱정되니까! 얀피르 없으면 이젠 비덴탕이 안 굴러가니까, 그래서 그런 거야.’
산수이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맞은편에서 이런 산수이의 표정 변화를 조용히 관찰하고 있던 휘온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또, 또 저런 표정…….’
그가 재빨리 산수이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저에게 이 상황을 해결할 만한 좋은 방안이 있습니다, 산수이.”
휘온은 어떤 식으로든 그녀가 얀피르에 대해 의식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휘온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산수이가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
“뭔데요, 휘온?”
휘온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학교를 짓는 겁니다.”
“학교요?”
“그렇습니다. 세신사를 전문으로 양성하는 학교를 짓는 거죠. 지금 가장 큰 문제는 수요와 공급이 일치하지 않는 것이니까요.”
일리 있는 말이었다.
지금 밀려드는 고객들은 더 이상 산수이와 얀피르 두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하지만 학교를 세운다는 게 어디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인가.
“지금부터 공사에 들어간다 해도, 시간이 꽤나 걸릴 텐데요.
“건물을 새로 짓지 않아도 학교로 사용할만한 곳이 비덴비덴 남작령 안에 얼마든지 있는데, 무슨 걱정입니까.”
“이 남작령에 그런 곳이 있었어요?”
“누구보다 당신이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산수이.”
학교로 사용할만한 곳?
이 비덴비덴 영지에 세신사 양성을 위해 사용할만한 곳은…….
“아!”
산수이가 이제야 알았다는 듯 외마디를 내질렀다.
“온천수가 끊겨서 영업이 중단된 다른 사설 목욕탕 건물들을 말하는 거군요!”
“역시, 당신이라면 말하지 않아도 알 거라 생각했어요.”
“건물 소유주들에게도 좋은 제안이 되겠네요!
“그렇겠죠, 몇 년째 공실 상태였을 테니.”
게다가 이 계획대로라면 남작령 내에서 세신사라는 새로운 일자리 역시 창출될 것이었다.
산수이는 곰곰이 생각했다.
‘그래, 내가 그동안 너무 비덴탕 하나에만 집중했지. 이제 더 크게 볼 때가 됐어.’
어쩌면 여태까지 사우나스가 강림하지 않고 있는 건, 남작령 전체의 경제가 회복되지는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 비덴비덴 남작가 하나만 잘 먹고 잘살게 된다고 능사가 아니지. 균형 있는 발전, 그게 부족했던 거야.’
아무튼 휘온이 제안한 세신사 전문학교는 정말 좋은 아이디어였다.
영지 내에 존재하는 수많은 문제들을 순식간에 해결할 수 있는.
산수이가 고개를 들어 휘온을 바라보았다.
그는 산수이를 신뢰의 눈빛으로 바라보며, 그녀가 생각을 마칠 때까지 잠자코 기다려주고 있었다.
‘휘온과 사업 얘기를 하다 보면 꼭 또 다른 나와 이야기하는 것 같을 때가 있어. 이렇게 생각이 잘 맞는 사람이 또 있을까?’
그는 정말이지 최고의 사업 파트너였다.
가끔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통할 때가 많았다.
아마 그가 없었다면 목욕탕 경영은 지금처럼 순탄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산수이가 그런 휘온을 바라보며 말했다.
“휘온, 당신은 정말 최고예요.”
“과찬이십니다.”
하지만 말은 그렇게 해도, 휘온의 속마음은 달랐다.
‘최고라니! 그것도 정말 최고라고 했다고!’
곧이어 휘온의 머릿속에서 행복한 상상들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결혼식장에서 산수이가 자신에게 최고라고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이어서 두 사람 사이엔 엄마와 아빠를 반반씩 닮은 예쁜 딸이 태어났으며.
노년의 두 사람은 손을 맞잡은 채 지는 석양을 함께 바라보…….
그러나 휘온의 망상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저기, 휘온?”
산수이가 그의 얼굴 앞에 손을 휘휘 저어 보였다.
얼굴이 새빨개진 휘온이 빠르게 정신을 차리며 답했다.
“크, 크흠! 그게 무엇입니까.”
“사실, 일전에 황태자 저하가 찾아오셨을 때 한 가지 제안을 드렸거든요. 황궁 안에 찜질방을 열자고.”
산수이는 휘온에게 찜질방이 무엇인지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주었다.
두뇌 회전이 빠른 그는 산수이가 어떤 것을 계획하는지 설명만 듣고도 머릿속으로 청사진을 그릴 수 있었다.
“그렇게 황궁에 찜질방을 열고 나면, 그걸 그대로 비덴탕 2층에도 지어볼까 해요.”
돈 냄새를 맡은 휘온이 눈을 번쩍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굉장하군요. 확실히 때밀이만큼이나 인기를 끌겠…….”
아니 잠깐.
황궁에 찜질방을 연다는 건.
‘산수이가 황태자 저하와 같이 있어야 할 시간이 늘어난다는 거잖아!’
얀피르를 너무 의식하느라, 휘온은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다.
짐승만큼이나 위험한 그의 존재를.
하지만 휘온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 산수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찜질방 사업의 성공을 기대하고 있어요. 그렇게 되면 제가 이곳을 자주 비워야 하는데…….”
“하, 하지만 황궁에 너무 자주 가 계신다면, 세신사 학교 수업에 차질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휘온은 어떻게 해서라도 산수이가 프리트와 함께 있는 시간을 줄이고 싶었다.
한편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얀피르는 그들 사이에 흐르고 있는 훈훈한 분위기가 영 못마땅했다.
휘온은 그녀가 곤란해할 때마다 상황을 타개할만한 해결책을 쉽게 쓱쓱 내어놓곤 했다.
그러니 산수이가 저리 좋아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워낙에 영민하다고 소문난 놈이 아닌가.
얀피르가 감히 따라 하려고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이제껏 제 나름대로 산수이를 위해 열과 성의를 다해왔다고 생각했는데.
괜스레 자신이 작아지는 느낌이었다.
‘사실 나는 주인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저답지 않게 그런 마음이 들었다.
초조했다.
이러다가 산수이를 놓쳐버리는 건 아닐까.
내가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역시 아무리 생각해봐도 답은 결국, 그거 하나였다.
“주인.”
“응?”
“그 세신사 교육이란 걸, 내가 하면 어때?”
그 말에 산수이가 놀라 외쳤다.
“얀피르…… 네가?”
“응. 너한테서 배운 걸 그대로 전수해 주면 되는 거 아냐?”
확실히 괜찮은 의견이긴 했다.
직접 가르쳐 본 결과, 얀피르는 우수한 학생이었으니까.
그냥 우수한 것도 아니고, 아주 빼어나게 뛰어난.
물론 때밀이 실습 중간중간 자신에게 엄청나게 들이대긴 했지만.
고민에 빠진 산수이에게 얀피르가 덧붙였다.
“그렇게 하면 네가 계획한 대로 황궁에 다녀올 수 있잖아.”
“그러게. 확실히 좋은 방법이긴 하네.”
얀피르의 제안을 들으며, 산수이는 생각에 잠겼다.
‘보통 목욕관리사 교육 프로그램이 2-4주쯤 걸리지. 그 정도면 얀피르에게 맡겨봐도 괜찮지 않을까?’
산수이가 얀피르를 향해 물었다.
“얀피르, 정말 괜찮겠어……?”
“당연하지. 애초부터 널 도와주려고 배운 기술이니까.”
“정말 고마워!”
그녀가 해사하게 웃었다.
아이처럼 해맑은 미소에, 얀피르의 입꼬리도 저절로 따라 올라갔다.
물론 그 세신사 교육이라는 게, 쉽지만은 않을 것이었다.
기억을 잃기 전, 대체 제가 무슨 일을 하던 드래곤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세신사나 선생님이 아니었던 건 분명했다.
하지만.
‘어떻게든 해보지 뭐. 나는 주인 네가 웃는 걸 보는 게 좋으니까.’
자신이 비록 휘온처럼 사업 수완이 좋지는 못하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너를 사랑할게.’
그렇게 생각하며 얀피르는 산수이를 향해 미소 지었다.
그 옆에서 휘온이 불안한 표정으로 말없이 두 사람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