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의 세신사 영애님-30화 (30/150)

30화.

산수이가 보낸 서신을 받아 든 휘온이 사용인을 다그쳐 물었다.

“그동안 왜 전서구를 보내지 않았던 건가! 산수이 영애와 호위 기사 사이에 정말 별다른 일이 없었나?!”

“공작님, 단 한 줄도 보고드릴 내용이 없었습니다, 정말입니다! 오히려 두 분 사이가 전보다 안 좋아진 것 같았습니다.”

“사이가 안 좋아졌다고?”

“예, 그렇습니다. 그 호위 기사란 자가 갑자기 하루 동안 잠적하질 않나, 게다가 요즘은 싸우기라도 하신 건지, 서로 가까이 있기는커녕 말도 안 섞으시던걸요.”

싸웠다고? 게다가 가출?

“그런 일이 있었다면 진즉 내게 보고했어야지 않나!”

“소, 송구하옵니다! 공작님께서 그저 둘 사이에 핑크빛 기류가 흐를 때 전서구를 날리라 하시어!”

휘온은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

둘이 싸웠다는데도 이상하게 찝찝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럴 리가 없어. 그자는 산수이와 싸울 위인이 못 돼. 분명 둘 사이에 뭔가 있는데…….’

이 행간에 숨은 의미를 읽어내야 한다.

휘온은 머리를 굴리고 또 굴렸다.

얀피르가 산수이를 멀리한다.

그것도 성적 각성이 이뤄진 것으로 의심되는 찰나에.

도대체 왜?

한참을 머리 싸매던 휘온은 두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들이댔다가 대차게 까였거나, 아니면…… 지켜주려는 것이로군.”

어느 쪽이든 간에, 휘온 역시 이대로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

비덴탕 경영은 순항 중이었다.

목욕탕을 찾는 고객님들도 점진적으로 늘고 있었고.

때밀이 예약과 이태리타월 판매가 서로 시너지 효과를 내며 매출도 올랐다.

게다가 탐폰 생산 건 역시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샘플을 미리 받아 사용해 본 고객들의 반응이 폭발적이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월경 중에도 여길 올 수 있겠네요. 너무 기대됩니다, 영애님!”

“제가 가장 먼저 달려와서 구매할 거라고요!”

이렇게 사업적인 측면으로만 보자면 모든 것이 완벽했다.

‘자꾸만 날 피하는 얀피르만 빼면 말이지.’

얀피르는 그날 이후 계속해서 산수이를 피해 다녔다.

정확히 말하자면 멀리서만 지켜본다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예전에는 산수이의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다가, 인적이 드문 곳에만 가면 그녀의 목덜미를 핥아댔지만.

지금의 얀피르는 마치 그림자처럼 인기척을 철저히 지우고, 산수이의 눈에 보이지 않도록 몰래 쫓아다니면서 호위를 하고 있었다.

가끔씩 산수이가 위험에 처할 때만 아주 잠깐 나타났다가.

“얀피르! 거기 있었구나?”

사삭—

그녀가 아는 척만 하면 다시 빛의 속도로 사라져버리니, 정말 환장할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아 도대체 이유가 뭐냐고!’

그렇게 둘 사이가 삐거덕거릴 때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휘온이 다시 부리나케 남작령으로 내려왔다.

‘드래곤 놈이 산수이 곁에 없는 지금이 기회다!’

휘온은 탐폰 생산을 핑계 삼아 비덴비덴 남작령에 죽치고 머물기로 했다.

공장도 방문하고, 목화솜 재배지도 구경하면서 산수이와 한시도 떨어지지 않으려 했고.

그렇게 점점 얀피르의 빈자리를 대체해갔다.

그런 휘온을 멀리서 바라보는 얀피르는 딱 죽을 맛이었다.

“저, 저 갈아 마셔도 시원찮을 휘온 놈!”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직은 산수이의 향기만 맡아도 정신을 놓을 것만 같았으니까.

‘며칠만, 딱 며칠만 더 지나면 이 지긋지긋한 열감도 가시겠지…….’

혹시라도 자신이 이성을 잃고 산수이를 다치게 하면 어떡하지.

그럴 바엔 차라리 죽는 게 나았다.

그렇게 얀피르는 입술을 꽉 깨물며 먼발치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와는 정반대로 휘온은 어떻게 하면 산수이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까 고민했다.

‘지난번 내 섣부른 고백 때문에 분위기가 이상해질 뻔했지. 아직 산수이는 나뿐 아니라 그 드래곤 놈에게도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조심스럽게, 하지만 최대한 빠르게 다가가자. 이 여자에게 내가 남자라는 걸 어필하자…….’

하지만 어떻게?

사실 휘온과 산수이와 얀피르는 모두 연애에는 젬병이었다.

휘온은 사랑을 글로만 배웠고, 산수이는 그림과 영상으로만 배웠으며, 얀피르는 아예 못 배웠다.

어쨌든 휘온은 자신이 가진 지식을 총동원해서 그녀에게 어필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바로, 이 끝없이 펼쳐진 눈꽃 같은 목화밭에서-

“크흠, 산수이. 목화밭이 정말 아름답지 않습니까? 꼭 당신의 눈부신 피부색처럼…….”

산수이가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죠, 정말 하얗네요. 갖다가 탐폰으로 만들면 혈이 아주 쭉쭉 잘 흡수되겠어요.”

하지만 휘온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 목화솜의 부드러운 감촉…… 꼭 당신의 머릿결 같군요.”

“그러니까요. 탐폰 사용할 때 상처가 날 일은 없겠어요.”

휘온은 이제 울고 싶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이 여자의 마음을 동하게 할 수 있는 건데!’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가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아직 휘온은 모르고 있었다.

***

그들은 목화밭과 공장을 모두 돌아본 후 남작저로 돌아왔다.

그런데 저택 내에 평소와는 다른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특히 산수이를 바라보는 사용인들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무슨 일이 생겼나?’

산수이는 서둘러 집사를 찾았다.

이윽고 산수이에게 달려온 집사의 표정은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뒤따라온 유모 역시 울먹이는 모습이었다.

“다들 왜 그래요?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요?”

유모가 산수이의 손을 붙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고했다.

“아가씨, 큰일 났습니다! 저희 이태리타월이……!”

그 말을 전하는 유모의 손이 어찌나 떨리던지 산수이는 그녀의 손을 꽉 붙잡고 진정시키며 물었다.

“괜찮으니까, 침착하게 말해봐요, 유모.”

“저, 저희 이태리타월을 사용하신 크랑크 자작 부인의 몸에 정체불명의 알레르기 반응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뭐라고요……?”

이는 비덴비덴 남작가의 사용인이 물자를 구매하기 위해 수도를 방문했다가 듣고 온 긴급한 소식이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크랑크 자작 부인이 지인에게 이태리타월을 선물받았고.

그걸로 때를 밀자 피부가 벗겨지면서 끔찍할 정도의 발진이 일어났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산수이는 아연실색했다.

‘이태리타월로 때를 밀었는데 피부가 벗겨졌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사건은 제국 내에서 삽시간에 퍼지며 이태리타월의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히게 되었다.

산수이의 눈앞엔 환불을 요청하는 수십 통의 서신들이 쌓여있었다.

그녀는 편지 하나를 집어 들고 창백한 표정으로 읽어내려갔다.

“안전성이 입증되지 않은 제품을 판매하다니 비덴비덴 남작가에 크게 실망했습니다. 지금까지 구매한…… 모든 이태리타월에 대해 환불을 요청합니다.”

유모가 덧붙여 말했다.

“게다가 피해를 입으신 크랑크 자작 부인께서 치료비 전액 보상을 요구하셨습니다…….”

산수이가 답했다.

“물론 우리 제품 때문에 발생한 일에 대해서는 모든 책임을 져야죠. 하지만 뭔가 이상해요. 분명 이태리타월은 충분한 테스트를 거쳤는데?”

***

남작저 내에 비상 회의가 열렸다.

현재 쌓여있는 이태리타월 재고를 전수 조사했지만 별다른 문제점이 발견되지 않았다.

게다가 때를 밀고 나서 발진이 일어났다는 점도 이상했다.

산수이가 휘온을 향해 말했다.

“물론 이태리타월 겉면에 이물질이 붙어있었다면 생채기가 날 수는 있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극심한 알레르기 반응이 일어났다는 것은 석연치가 않아요.”

휘온은 갑자기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혹시 제국 내에서 비덴비덴의 이름을 사칭한 이태리타월이 판매되고 있는 건 아닐까요?”

놀란 산수이가 말했다.

“그럴 수도 있겠어요……! 충분한 테스트를 거치지 않은 섬유로 가짜 이태리타월을 만들었다면, 충분히 피부 발진이 일어날 수 있죠.”

휘온은 속으로 자책했다.

황실 정기 회의를 마치자마자 수도를 떠나 이곳에만 머물렀던 것이 화근이었다.

‘평소대로였다면 수도 내 모든 상권 동향을 꿰고 있었을 텐데. 명백한 내 실수다. 이렇게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는 것이 아니었어…….’

그렇다면 범인은 아마도 휘온에 대해 잘 아는 자일 것이다.

그가 현재 이곳에 오랜 기간 머물고 있다는 것을 알만한 자.

그렇다면.

“제 동선을 잘 알고 있는 자들 중 범인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혹시 최근에 이상한 낌새를 가진 고객은 없었습니까?”

휘온의 말에 산수이는 일전에 이태리타월을 무더기로 구매해갔던 허름한 차림새의 사내를 떠올렸다.

하지만 그는 정당한 값을 치르고 제품을 구매해가지 않았나.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전혀요. 특히나 최근엔 때밀이 단골손님들뿐이었고요.”

“으음…….”

머리를 맞대 봐도 누구의 소행인지 짐작 가는 바가 전혀 없었다.

마침내 산수이가 입을 열었다.

“우선 그 입원하셨다는 고객님을 만나러 가 봐요. 고객님의 치료비는 전액 모두 비덴비덴 남작가의 이름으로 지원하고요.”

휘온이 놀라 물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제품이 잘못됐다고 시인하는 꼴이 될 텐데요.”

“우선은 고객님의 마음을 풀어드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제품에 대한 신뢰도를 회복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고요. 대신 그 의심스러운 이태리타월 구매처 정보를 여쭤보는 거예요.”

산수이의 말에 휘온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나의 산수이,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

***

크랑크 자작저로 향하는 마차 안에는 산수이와 휘온 단둘만 앉아 있었다.

평소와는 다르게 얀피르가 마부 옆에 앉아서 가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래. 가라, 가!’

산수이는 얀피르에게 내심 섭섭했지만, 겉으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달리는 마차 안에서 산수이는 창가에 턱을 괴고 하염없이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여러 가지 사건이 한꺼번에 터져 심경이 복잡했다.

그런 산수이를 보며 휘온이 말했다.

“많이 걱정됩니까.”

“어쩐지 요새 너무 일이 잘 풀려나간다 했어요. 이럴 때일수록 조심했어야 했는데…… 제가 경솔했죠, 뭐.”

“산수이 그대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설마 당신의 옆에 누가 있는지 잊은 건 아니겠지요?”

“누가 있는데요?”

“이거 섭섭한데요. 제국 최고의 사업가라 불리는 이 휘온 에데카나가 있지 않습니까.”

“아하하, 그러네요.”

산수이가 웃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휘온이 말을 덧붙였다.

“……자꾸 잊으시는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 건데, 저 되게 비싼 남자입니다. 이렇게 저와 매일같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건, 이 제국에서 오직 산수이 그대 하나뿐이라고요.”

그 말에 산수이가 또 웃었다.

휘온은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그래, 지금은 그냥 저 여자가 웃는 걸 보는 거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윽고 마차는 목적지에 도착했고, 산수이는 휘온과 함께 크랑크 자작 부인의 병상을 찾았다.

그러나 단순 알레르기 증상이라고만 생각했던 그녀의 상태는 세간에 알려진 것보다 더 심각한 것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