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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세신사 영애님-29화 (29/150)

29

아무도 없는 새벽의 비덴탕 안.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산수이를 기다리고 있는 얀피르를 향해, 곧 양손을 높게 치켜든 산수이가 다가왔다.

최고급 때수건을 두 손에 야무지게 둘러 감은 채.

산수이는 대리석 판 위에 엎드려있는 얀피르를 보며 미소 지었다.

‘어차피 나한테 때 한 번 밀리고 나면 뭐든 말할 거면서 튕기긴.’

이제 얀피르는 알아서 비밀을 털어놓게 될 것이다.

왜 갑자기 성체가 된 건지.

산수이는 얀피르의 등을 밀며 넌지시 떡밥을 던져보았다.

“그래서 얀피르, 갑자기 왜 성체가 된 거야아?”

마침내 그의 입에서 산수이가 원하던 대답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건 말이지……. 내가 주인 널 너무 원하게 됐기 때문이야.”

“으, 응?”

그러나 산수이가 그 뜻을 깨닫기도 전.

그녀를 바라보는 얀피르의 황금색 눈동자가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매섭게 빛나기 시작했다.

마치, 그녀를 잡아먹기라도 할 것처럼.

산수이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서, 설마…… 드래곤은 성체로 자라나면 인간을 잡아먹는 건가?!’

온전한 성체가 되기 위해선 인간 제물이 필요하다거나?

잘못된 오해가 스멀스멀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럼 나 이제 얀피르한테 잡아먹히는 거야?’

그때였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얀피르가 산수이를 향해 그르렁댔다.

“크르르, 주인!”

“꺄아악! 얀피르, 정말 나 잡아먹으려는 건 아니지? 그치?!”

“대체 무슨 소리야? 그보다, 으윽……!”

거센 숨을 몰아쉬는 얀피르의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어? 얀피르, 너 갑자기 열이 왜 이렇게……?”

하지만 얀피르는 그녀의 손목을 스르르 놓아버리고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얀피르에게.

번식기가 찾아온 것이었다.

곧이어 온몸에 열꽃이 피어나며, 그가 고통에 몸부림치다 낮게 울었다.

“크르르르…….”

드래곤 종족의 번식기.

이것은 드래곤이 성체로 자라난 직후 곧바로 찾아오는 흔한 증상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즉시 욕구를 해소해줘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곧 극심한 통증 때문에 이성이 맛이 가 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얀피르 역시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안 돼, 주인의 마음은 아직 나랑 다르니까.’

그는 혀를 깨물며 통증을 견뎌냈다.

입안에서 비릿한 피 맛이 올라왔다.

가까스로 이성을 되찾은 그가 산수이에게 말했다.

“흐으윽, 주인. 지금 당장 나한테서 떨어져. 저택으로 돌아가.”

“왜, 대체 무슨 일인데!”

“위험하니까, 어서!”

위험하다고?

왜? 정말로 드래곤이 인간을 잡아먹기 때문에?

하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얀피르의 눈을 보고 있노라면, 확신할 수 있었다.

그가 절대 자신을 해칠 리 없다고.

그때 산수이는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성체. 맞아, 얀피르는 성체가 되었다고 했어.’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산수이는 원래 세계에서 ‘즐거운 동물농장’을 즐겨보던 애청자였다. 그래서 지금 이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그녀 역시 잘 알았다.

‘그렇구나. 얀피르의 본체는 드래곤이니까 그, 그 시기가 찾아온 거야!’

어쩌지?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산수이는 빠르게 머리를 굴려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떠올려 보았다.

‘안정, 일단 안정을 시켜야 해!’

고양이라면 캣닢. 그럼 얀피르에게는 뭘 갖다 줘야 하지?

‘육포?’

하지만 지금 얀피르가 무엇을 먹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렇게 고민하는 사이 얀피르는 또 한 차례 고통 속에 울부짖었다.

“크르르르-!”

‘아, 어쩌지. 너무 힘든가 봐.’

어떻게 하면 얀피르를 진정시킬 수 있지?

그런 것이.

‘……딱 한 가지 있긴 하지.’

둘이 밀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시원함.

제아무리 까다로운 사람도 엄지를 들어 올리게 되는 궁극의 기술!

그것은 바로 자신의 때밀이였다.

산수이가 얀피르를 향해 눈을 빛내며 때수건을 치켜들었다.

“얀피르, 조금만 참아. 내가 도와줄 테니까, 알겠지?”

“주, 주인 너 설마 계속 내 때를 밀려고?!”

얀피르는 사색이 되었다.

이 상태로는 산수이가 자신의 몸에 손가락 하나만 갖다 대도 바로 이성이 날아갈 것 같았으니까.

‘더 이상은 안 돼. 그랬다간 정말 참을 수 없을지도…….’

그가 힘겹게 말했다.

“이, 이미 충분히 밀었어. 그러니까 빨리 저택으로 돌아…….”

“충분하긴 뭐가! 자 얼른 빨리 다시 엎드려 봐.”

“정말 괜찮다니까!”

하지만 이미 그녀는 얀피르의 살갗 위로 손을 올린 후였다.

“크, 크아아……!”

그 경이로운 손맛에 얀피르는 잠시간 집 나갔던 이성을 되찾았다.

‘여, 역시 이건 정말…… 너무 시원해!’

산수이는 장인 정신으로 무장한 채, 열과 성의를 다해 때를 밀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얀피르를 도와주는 게 아니었다.

때밀이의 시원함도 결코 그를 진정시켜 줄 수 없었다.

지금 그는 산수이를 보기만 해도 힘이 들었으니까.

‘주인, 제발 이제 그만……!’

얀피르는 그야말로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기분이었다.

그가 입안을 깨물어가며 참아내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곧 얀피르의 입에서 붉은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대로 이성을 잃을 수는 없었다.

‘뭐, 뭐라도 붙잡아야……!’

얀피르는 있는 힘을 다해 자신이 엎드려있는 대리석 판을 콱 쥐었다.

콰드득.

그의 커다란 손 아래 놓인 대리석 판에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이내 목욕탕 바닥으로 새하얀 대리석 가루가 떨어져 내렸다.

후드득.

“응? 얀피르. 방금 뭐 부서지는 소리 들리지 않았어?”

“……”

이제 대리석 판도, 그의 입안 점막도 모두 거의 남아있지 않다시피 했다.

산수이의 때밀이 기술조차 그에겐 도움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끝내 이성의 끈을 붙잡아냈다.

“끄, 끄으으…….”

털썩.

“다 했다!”

마침내 세신을 끝낸 산수이가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닦아내며 말했다.

“어때, 얀피르. 시원했지?”

하지만 이미 장렬히 전사…… 아니, 혼절한 얀피르에게선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

다음 날.

예약 고객을 기다리던 산수이는 손안의 탐폰을 만지작거리며 고민에 빠져있었다.

그날의 때밀이 이후, 얀피르가 자신에게 했던 질문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주인, 대체 그건 무슨 소리였어? 나보고 널 잡아먹을 거냐니?”

“아. 그, 그거…….”

갑자기 돌변하는 얀피르를 보고는 말도 안 되는 오해를 했었지.

잠시나마 그를 의심했던 산수이는 양심이 콕콕 찔렸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그가 얼굴을 들이밀며 물었다.

“설마 그 잡아먹을 거냐는 질문이…… 문자 그대로의 뜻을 의미했던 건 아니겠지?”

“그, 그게.”

“정말이었어?!”

얀피르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그때 꺄악-하고 소리를 지른 거였구만? 주인은 대체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얀피르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이 여자와 갈 길이 까마득했던 것이다.

그가 말했다.

“하아, 오해하는 거 같아서 확실히 말해두는데. 우리 종족은 인간은 안 잡아먹어. 아니, 오히려 같은 편이라고.”

“인간…… 은? 그럼 다른 건?”

“뭐, 휘온 그놈은 인간 같지도 않으니까 사냥해도 괜찮으려나.”

“사, 사람을 해치면 안 된다니까!”

“농담이야. 줘도 안 먹어. 그 새끼 고기는 분명 맛도 없을 거야.”

“아, 아무튼 미안해, 얀피르. 네가 갑자기 무서운 표정으로 원하니 뭐니 하는 소리를 하니까 내가 오해를…….”

“하아, 주인 너 진짜 그게 무슨 뜻인지 몰라?”

하지만 산수이는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을 뿐이었다.

얀피르가 한숨을 내쉬며 산수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됐다.”

그 손길에 산수이는 다시금 놀랐다.

‘또다. 이번에도 또 얀피르가 먼저 내 머리를 쓰다듬고 있어!’

지난번에 이어 얀피르가 자꾸만 낯선 모습으로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산수이가 당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왜, 왜 이래 얀피르.”

얀피르가 몸을 숙여 산수이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걱정하지 마, 안 잡아먹어.”

속으로만 ‘아직은.’이라고 되뇐 얀피르는, 그 길로 뒤돌아 사라진 후 한동안 산수이의 곁에 다가오지 않았다.

이제 그녀의 손에 들려있는 탐폰은 거의 곤죽이 되어가고 있었다.

‘생각해보니까 그날부터 얀피르가 좀 이상해. 날 더 이상 핥지도 않고, 자꾸 피하기만 하고. 아니, 이번엔 도대체 왜?’

사실 얀피르의 입장에선 번식기가 지날 때까지 최대한 산수이를 피하려는 것뿐이었다.

그녀를 보기만 해도 참기 힘들었으니까.

하지만 산수이 입장에선 당최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혹시 이번 때밀이가 영 별로였나?’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오해를 하고 있던 찰나.

곧이어 때밀이실 문이 열리고 손님이 들어왔다.

산수이는 자신의 손안에서 처참하게 뭉개져 버린 탐폰은 몰래 쓰레기통에 버리고, 새로운 샘플을 꺼내 들었다.

여성 고객들은 처음에는 대부분 탐폰에 대해 거부감을 표했다.

하지만 산수이의 특강을 들은 이후, 대부분의 고객이 긍정적으로 돌아섰다.

게다가 이 획기적인 대용품을 쓰면 목욕이나 수영도 즐길 수 있다는 사실은 구원이나 다름없었다.

낯선 사용법을 익히는 게 문제였지만, 그것 역시 시간이 해결해 주었다.

마침내 수많은 여성 고객들 사이에서 탐폰이 화제에 올랐다.

이제 대다수의 고객은 이 제품의 정식 출시일만을 기다리게 되었다.

‘본격적으로 생산 가동을 해도 되겠어……!’

산수이는 기쁜 마음으로 휘온에게 서신을 보냈다.

***

인근에 위치한 보다폰 백작가.

백작 보좌관이 무릎을 꿇은 채 보다폰 백작을 향해 사죄하고 있었다.

“제 불찰입니다, 백작님.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태리타월 제작 기밀을 빼돌렸어야 했는데……!”

그러자 보다폰 백작이 몸을 돌렸다.

출렁이는 뱃살 때문에 그가 입고 있는 연미복의 단추가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그는 개기름이 흘러 번들거리는 얼굴을 연신 손수건으로 닦으며 말했다.

“한심한 놈. 너 때문에 비덴비덴 목욕탕 매출만 올려 준 꼴이 되었지 않았느냐!”

“주, 죽여주십시오!”

“됐고, 일전에 말한 것은 알아보았느냐?”

“예. 에데카나 공작이 또다시 비덴비덴 남작령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알아서 수도를 비워주는구만. 그 계집에 홀린 것인지, 아니면 돈 냄새를 맡고 그러는 것인지는 모르겠다만. 어찌 됐건 당장 준비해.”

“알겠습니다. 저, 그런데 백작님.”

보다폰 백작이 귀찮은 듯 답했다.

“또 무엇이냐?”

“그 남작령 출신 놈은 어쩔까요?”

“쯧. 아직은 더 쓰일 데가 있으니 살려 둬.”

“분부 받들겠습니다.”

보좌관이 방을 나선 후, 혼자 남은 보다폰 백작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뇌까렸다.

“……그때 산수이 그 계집까지 확실하게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실수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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