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비덴탕, 특히 산수이의 때밀이 인기는 이제 하늘을 찌를 정도로 높아졌다.
그녀는 몸이 두 개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예약에 치여 살고 있었다.
‘헬이다! 점심밥 먹을 시간조차 없어!’
신분에 상관없이 철저히 예약 손님만 받아 가며 운영하고는 있지만.
웨이팅 리스트가 점점 길어지면서 고객들은 급기야 예약 없이 무작정 목욕탕을 방문해 죽치고 그녀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산수이가 잠시 커피라도 마실 참으로 방에서 나오면, 그 앞에서 기다리던 고객들은 산수이에게 쏜살같이 몰려들어 매달렸다.
그렇게 산수이는 몇 날 며칠 동안 밤낮없이 때를 밀었다.
그러던 어느 늦은 저녁.
산수이는 드디어 한 주 동안 예약되어 있던 모든 고객님의 때를 밀어드린 후 오랜만에 쉴 수 있게 됐다.
손님들이 떠나시고 적막만이 남은 비덴탕 안.
산수이는 옷을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로 향했다.
때밀이를 위해 맞춤 제작된 타이트한 원피스를 벗기 위해서였다.
원래는 속옷만 입고 때를 밀려고 했지만, 유모가 자신이 죽는 꼴을 보고 싶냐며 한사코 그것만은 말린 결과였다.
그러나 땀과 물로 질척이는 원피스는 오늘따라 그녀의 몸에 달라붙어 쉬이 벗겨지지 않았다.
‘원피스를 새로 제작해야겠어. 쉽게 입고 벗을 수 있는 단추가 달린 것으로. 아니면 차라리 티셔츠에 바지를 만들어 입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드레스를 몸 위로 추켜올리려던 순간, 갑자기 그녀의 머리로 피가 쏠렸다.
“……어?”
핑—
산수이는 그만 정신을 잃고 뒤로 넘어졌다.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면 머리를 부딪쳐 즉사했을지도 모른다.
마치 원래 세계에서 그렇게 사망했던 것처럼.
하지만 산수이를 맞이한 건 차가운 바닥이 아닌 얀피르의 넓고 따뜻한 품이었다.
‘주인의 숨소리가 평소보다 거칠어서 혹시나 했는데…….’
아까 잠시 산수이와 마주쳤던 얀피르는 그녀의 몸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래서 설마 하는 마음에 탈의실 밖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정신을 잃은 채 얀피르의 품에 안긴 산수이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상태였다.
물에 젖어 몸에 꽉 끼는 원피스가 괴로웠는지 자꾸만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이게 문제였군.’
얀피르는 망설임 없이 그녀가 입고 있는 원피스를 손으로 잡아 찢어버렸다.
촤악—
가슴을 조이던 원피스가 풀어지자 산수이는 숨을 한 번 크게 토해내곤 안정을 되찾아 그대로 잠이 들었다.
얀피르는 산수이의 코끝에 자신의 손가락을 갖다 댔다.
그녀의 숨결이 확인되자 얀피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털썩.
그는 산수이를 품에 안은 채 탈의실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이 아가씨야, 자기 몸 좀 생각해 가면서 일하라고 제발.”
하지만 그것도 잠시, 찢어진 원피스 사이로 드러난 산수이의 살결이 얀피르의 눈에 들어왔다.
순간 그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쿵쾅쿵쾅.
얀피르는 산수이에게 천천히 다가가 평소대로 그녀의 뺨을 핥으려 했다.
그때 얀피르는 무의식적으로 일전에 산수이가 했던 말을 떠올려버렸다.
‘인간은 말이야, 다른 성별끼리 몸을 보여주는 걸 부끄럽게 생각하거든.’
고뇌하던 그는 결국 힘겹게 제 입술을 거뒀다.
‘하아…… 참자.’
하지만 코끝을 간질이는 그녀의 향기 때문에 얀피르는 더 이상 견디기 힘들었다.
그렇게 얀피르가 산수이에게서 멀리 떨어지려던 찰나.
“으음……”
정신을 차린 산수이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얀피르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이 상황이 무엇인지 파악하지 못한 채 눈만 끔뻑끔뻑할 뿐이었다.
“어……?”
“괜찮아? 걱정했잖아, 주인.”
“야, 얀피르?”
산수이는 제 눈앞에 있는 얀피르의 얼굴을 보고 볼이 발그레해졌다.
그러다 자신의 가슴 아래 처참하게 찢어져 있는 원피스를 보곤 깜짝 놀랐다.
“헉! 이게 왜…….”
“내가 그랬어, 주인이 숨을 못 쉬길래.”
당황한 산수이는 빠르게 가슴께를 손으로 가렸다.
얀피르가 그런 산수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걱정 마. 나 안 봤어.”
“으, 으응?”
얀피르가 그녀를 바라보며 다정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네가 허락하기 전까진 절대 안 건드릴게.”
“?!”
물론 허락해주는 순간 바로…….
얀피르는 뒷말은 삼킨 채 말을 이었다.
“아무튼 주인 아까 정말 위험했어. 그대로 바닥에 부딪힐 뻔한 거 내가 구했다고. 나 잘했지? 그러니까 빨리 상 줘.”
상이란 아마도 자신을 핥는다는 거겠지.
“그래.”
산수이는 알겠다며 끄덕였다.
이윽고 얀피르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져 왔다.
하지만 산수이의 볼에 닿은 건 평소 익숙했던 감각이 아닌.
쪽—
얀피르는 그녀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귀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내가 원하는 상은…… 주인이 때밀이 예약을 좀 줄이는 거야.”
그녀를 바라보는 얀피르의 눈빛이 평소와는 다르게 매우 진지했다.
산수이는 자신을 안고 있는 얀피르의 손에 힘이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산수이에게 다그쳐 물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무리해서 때를 미는 거야, 주인? 이제 비덴탕을 찾는 손님들도 많아졌잖아. 주인이 그렇게 무리하지 않아도 이 목욕탕은 알아서 잘 굴러갈 거라고.”
얀피르 말이 맞았다.
이제 단골손님들도 생기고, 떠났던 고객들도 상당수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집사로부터 전해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멈출 수 없었다.
그것은 아무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한 가지 사실 때문이었다.
바로 목욕의 신 사우나스와의 약속.
‘목욕탕 경영이 잘되고 있다는 건 나도 알아. 하지만 사우나스 님이 강림하시지 않는 걸 보면, 아직 뭔가 부족한 거라고.’
그리고 사우나스가 다시 나타나야만 그녀의 간절한 소원이 이뤄질 수 있지 않겠는가.
‘나는……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으니까.’
물론 이곳에서의 생활이 아주 싫은 건 아니었다.
아무리 몰락한 남작가라 해도 귀족은 귀족.
21세기 현대사회에선 경험하지 못한 호사를 꽤 많이 누리며 지내고 있었다.
‘심지어 이렇게 예쁜 영애의 몸에 빙의되고 말이지.’
게다가 주변엔 그녀를 아껴주는 사람들도 많고. 또…….
산수이는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얀피르의 얼굴을 새삼 찬찬히 뜯어보았다.
황금빛 눈동자와 흑단 같은 머리칼, 자신을 안고 있는 이 다부진 근육에.
위험한 페로몬을 뿜어대고 있는 저 요망한 마성의 얼굴까지.
‘얀피르가 정말 잘생겼긴 하지…….’
게다가 휘온은 어떤가.
그 부드러운 은발과 베일 듯한 턱선, 차가운 회색 눈동자 속에 감춰진 귀여운 비밀.
하지만 이런 미남자들이 옆에 있어도, 산수이는 원래의 세계가 못내 그리웠다.
그곳에서만 먹을 수 있는 마늘과 고추장 팍팍 들어간 한식들. 요일마다 챙겨서 보던 드라마.
덕질하던 아이돌 그룹의 신규 앨범도 릴리즈 됐을 거고, 분명 구독하던 너튜브에 새로운 영상도 올라왔을 텐데.
전기와 인터넷과 대중문화와 한식이 없는 삶이라니.
여태 참아온 것만으로도 용했다. 이제 금단 현상이 생길 지경이었다.
‘물론 내 최애보다 더 잘생긴 사람, 아니 드래곤이 바로 눈앞에 있긴 하지만…….’
그러나 이세계에서 살아가기엔 그녀는 너무나 첨단 문물과 대중문화에 길든 사람이었다.
산수이는 얀피르의 가슴을 가볍게 밀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왜 이렇게까지 무리해서 때를 미느냐고?”
그녀가 두 발로 단단히 서서 얀피르를 향해 말했다.
“그야 나는…… 돈을 많이 벌고 싶으니까!”
“……돈?”
“그래, 돈! 한번 몰락했던 적이 있어서 그런가, 벌어도 벌어도 계속 벌고 싶네? 하하! 나는 아직도 돈에 목마른가 봐.”
이것이 그녀가 생각해낼 수 있는 최선의 핑계였다.
‘나는 다른 세계에서 왔고, 빨리 여길 떠나고 싶어서 그런다고 말할 순 없잖아…….’
얀피르는 몸을 일으켜 산수이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진짜 돈 때문만이야?”
“그, 그럼. 진짜지.”
“하지만 지금 주인 목소리가 미묘하게 떨려.”
산수이는 얀피르의 예리한 지적에 몸을 움찔하면서도, 동요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썼다.
“떠, 떨리긴 뭐가 떨린다고 그래.”
“혹시 주인, 나한테 뭐 숨기는 게 있어?”
역시 동물……. 짐승의 촉은 무서운 거구나.
하지만 산수이는 짐짓 태연한 척 웃으며 말했다.
“숨기긴 뭘. 그냥 돈 밝히는 거 부끄러워서 그러지. 너무 속물 같아서 실망했어?”
“아니 난 주인이 뭘 하든 상관없어. 돈을 쓸어 모으는 게 주인 소원이면 그렇게 해.”
얀피르가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
“다만 지금처럼 계속 무리해서 때를 미는 건 안 돼. 돈이 그렇게 좋다면 공작 놈한테서 더 뜯어내면 되잖아? 걔한텐 때 밀어줄 때마다 10만 에우로씩 받아내자니까?”
다시 말하지만 10만 에우로는 1억 원이다.
***
얀피르의 말이 맞긴 했다.
이대로 계속 지금과 같은 스케줄로 때를 밀었다간 목욕의 신이 강림하기도 전에 산수이의 장례를 치르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고 손님을 가려서 받을 수도 없고…….’
산수이는 고민하며 저택 내 복도를 걷고 있었다.
그때 산수이의 눈앞으로 이태리타월이 수북이 담긴 대야를 든 하녀 한 명이 지나갔다.
위생을 위해 고객마다 각기 다른 이태리타월로 때를 밀어드리고 있었기 때문에, 하루가 멀다고 빨랫감이 한 무더기가 나오곤 했다.
산수이는 그 이태리타월 무더기를 보고 눈을 반짝였다.
‘저거다!’
모든 고객을 다 밀어줄 수 없다면.
그들이 직접 자기 몸을 스스로 밀게 하면 되는 일이 아닌가?
다음 날, 산수이는 얀피르와 함께 우테를 만나러 갔다.
***
“대량…… 생산이요?”
“그렇습니다. 이태리타월을 대량으로 생산해서 비덴비덴 영지 특산품으로 판매할 예정이에요.”
산수이는 준비해 온 디자인 도안을 우테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그래서 제가 이태리타월 디자인을 몇 개 더 생각해 봤는데, 이런 장갑 모양은 어떨까요? 사용하기도 편리하고.”
그리고 원래 세계에선 때르메스라 일컬어지며 불티나게 팔렸던, 때수건계의 명품이었지.
‘죄송합니다, 때르메스 특허 보유자님……! 다른 세계에서 갖다 쓰는 거니까 한 번만 봐주세요.’
산수이는 마음속으로 잠시 기도를 올렸다.
우테는 산수이가 가져온 디자인 도안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런 디자인이라면 어르신들도 혼자서 쉽게 때를 미실 수 있겠어요. 하지만…….”
“무슨 문제가 있나요?”
“사실 저 혼자서는 이 생산량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물레도 턱없이 부족하고요.”
산수이는 우테를 향해 엄지를 척 들어 보이며 기운차게 말했다.
“아! 그런 거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에겐 휘온 물주…… 아니, 공작님의 지원이 있으니까요!”
그 무렵.
휘온은 자신의 서재에서 집무를 보다가 알 수 없는 한기를 느꼈다.
‘뭐, 뭐지, 이 한기는?’
뒤를 돌아봤지만, 당연히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왜 이렇게 불길한 예감이 들지……?’
그리고 며칠 후 산수이에게서 서신을 받은 휘온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