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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세신사 영애님-22화 (22/150)

22화.

비덴탕으로 들어오던 얀피르는 때밀이 요금표를 보고 절망에 빠진 휘온을 발견했다.

실실 쪼개며 다가온 그가 휘온의 어깨에 팔을 휙 둘렀다.

“요금표 봤구나? 너 앞으로 주인한테 때 밀 때마다 5천 에우로씩 내야 되더라?”

“……꺼져라.”

하지만 얀피르는 휘온에게 딱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어쩌냐……. 난 부탁할 때마다 주인이 공짜로 때 밀어주는데.”

“꺼지라고 했다.”

휘온은 간신히 분노를 참고 있었지만, 얀피르는 더더욱 크게 미소 지으며 선심 쓰듯이 말했다.

“돈 없으면 나한테 와서 밀어달라고 해. 내가 너는 특별히 공짜로 밀어줄게.”

“뭐, 돈이 없……? 감히 이 휘온 에데카나를 뭘로 보는 거냐!”

“에이, 그렇게 방심하다간 너 곧 파산한다?”

“이 자식이……!”

휘온은 주먹을 꽉 쥐었다.

이 굴욕감을 절대 잊지 않으리라 다짐하면서.

그때, 휘온을 맞이하러 산수이가 다가왔다.

“에데카나 공작님-! 오셨군요.”

휘온은 짐짓 태연한 척 산수이에게 말을 건넸다.

“오셨습니까, 영애. 오늘부터는 저도 요금을 지불하고 때를 밀어야겠군요.”

“네에. 원래는 지난번 방문하셨을 때부터 받으려고 했는데, 제가 특별히 한 번 더 서비스해드렸던 거예요. 제가 했던 말 기억하시죠?”

산수이가 상큼하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뭐, 뭐라고?!’

그제야 휘온은 그들이 공작저에서 처음 만났던 날 산수이가 했던 말을 기억해냈다.

‘……딱 오늘 하루만 때밀이 무료 체험을 하실 기회를 드립니다. 지금 바로 선택하세요!’

그랬다. 분명히 딱 오늘 하루만 무료 체험이라 했었다.

휘온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하! 산수이 영애, 이 여자 진짜…….’

하지만 그다음 이어진 생각은 휘온 자신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참 가관이었다.

‘……볼수록 맘에 들어 미치겠군. 제멋대로지만 그렇다고 원칙에서 크게 어긋나지 않는 것도. 그냥 다 너무 좋다.’

휘온은 자신이 미친 것임에 틀림없다 여기면서도 참을 수 없이 사랑스러운 눈길로 산수이를 바라봤다.

그러나 산수이는 휘온의 따가운 시선에 약간의 죄책감이 들었다.

‘으음……. 아무리 그래도 명색이 투자자님인데 내가 너무 정이 없었나. 그래, 역시 한국인은 정이지.’

그녀는 다시 영업용 미소를 장착하며 한마디 덧붙였다.

“하지만 에데카나 공작님께 한해서는 특별히 지난번에 해드렸던 오일 마사지를 매번 추가해드릴 거니까요.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 말을 들은 얀피르가 외쳤다.

“주인?! 얘한테는 오일 마사지도 해 줬어? 왜 이 자식만 해 줘?”

“그날 네가 공작님의 등을 너무 세게 박박 밀어놔서 안 해드릴 수가 없었거든?”

반면 그 말을 들은 휘온의 가슴은 빠르게 두방망이질 치고 있었다.

쿵.

‘정녕 나에게만 해 줬던 서비스란 말인가?’

그는 지금이 바로 그 타이밍이라고 느꼈다.

지난번부터 산수이에게 꼭 부탁하고 싶었던 그것.

그가 산수이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산수이 영애, 그럼 제가 한 가지 더 청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별로 어려운 부탁은 아닐 겁니다.”

‘휘온 공작이 나에게 청을?’

때밀이도, 오일 마사지도 아니면 도대체 그가 자신에게 부탁할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혹시 새로운 사업 구상에 관한 건가?’

그런 거라면 언제든 환영이지.

산수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무엇이든 말씀해 주세요.”

물론 들어보고 결정하겠지만.

그러나 휘온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외의 것이었다.

“앞으로 저를 부르실 때 공작님이란 말은 빼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휘온…… 이라고 불러주십시오.”

그 말을 하면서 휘온은 가슴이 마구 뛰는 것을 느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선 필요할 때마다 얼굴에 철판 딱 깔고 거짓말도 술술 잘만 할 수 있는데.

왜 이 산수이 영애 앞에만 서면 이렇게 안절부절못하는지 모르겠다.

휘온은 서둘러서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저 역시도 영애를 이름으로 부르고 싶습니다. 산수이…… 라고.”

이 세계에서 남녀가 서로를 이름으로 부른다는 것은 정말 가까운 사이가 아니고서야 흔한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휘온처럼 여성들에게 철벽을 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물론 미모세 백작 부인처럼 어떤 이성이든 허락 없이 이름으로 부르는 몰상식한 자들도 있지만.

적어도 휘온에게 있어선 쉽지 않은 일이었다.

휘온이 인생 처음으로 먼저 서로를 이름으로 부르자 제안한 여성이 바로 산수이였다.

사실 예전부터 휘온은 산수이가 얀피르를 이름으로 부를 때마다 속이 뒤틀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곤 했었다.

‘물론 저 녀석은 짐승이니까 인간의 예법 따위에 신경 쓰지 않았겠지. 산수이 영애 역시 저놈을 이성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에 그리 쉽게 이름으로 부른 것일 테고.’

그렇게 열심히 머릿속으로 합리화를 하면서도 휘온은 내심 부러운 마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반면 산수이는 별것도 아닌 부탁을 두고 진땀을 빼는 휘온이 왠지 귀여웠다.

‘이곳에선 남녀 간에 서로 이름을 잘 부르지 않는다고 듣긴 했어.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정중하게 부탁할 일인가?’

생각해보니 원래 세계에서도 이성끼리는 꼭 성을 붙여서 부르곤 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또 납득이 될 것 같은 산수이였다.

‘으음 그렇군. 같은 반 남자애들을 부를 땐 꼭 성을 붙이곤 했었지. 이름만 부르는 건 사귀는 사이에서나 가능한 일이었어.’

물론 이 지식이 올바른 것인지 그녀는 알 길이 없었다.

원래 세계에선 남자라곤 초등학교 때 말고는 볼 일이 없었기도 하거니와.

여중, 여고도 모자라 여탕 아르바이트까지 하면서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산수이의 입장에선 이렇게 이름으로 부르자는 것이 되레 반가운 일이었다.

사실 평생을 신분 사회에서 살아본 적 없는 그녀에게 공작이니 공주마마니 하는 지칭을 붙이는 것은 너무 어색했기 때문이다.

‘가끔 휘온 씨-이럴 뻔한 적도 있었다니까.’

아무튼 그녀는 휘온에게 웃으며 대답했다.

“전혀 어렵지 않은 부탁인데요? 그럼 앞으로 휘온이라 부를게요, 휘온-.”

“아……!”

산수이의 대답에 휘온은 입이 귀에 걸렸다.

그는 자꾸만 새어 나오는 웃음을 힘겹게 참으며 말을 이었다.

“고맙소, 사…… 산수이.”

산수이가 웃으며 덧붙였다.

“그럼 서로 이름으로 부르는 김에, 우리 아예 말도 놓을까, 휘온아?”

***

산수이는 첫 번째 예약 손님을 기다리며 아까 휘온과 나눴던 대화를 다시금 회상했다.

이름 튼 김에 말도 놓았으면 좋았을 텐데.

휘온은 산수이의 제안을 듣더니 얼굴이 새빨갛게 익어서는 그것만은 안 된다며 한사코 거절했다.

“사, 산수이 그대는 그렇게 하고 싶으면 하십시오. 하지만 저는 그럴 수 없습니다.”

“왜요?”

“사내 된 자가 어찌 여인에게 그런 무례를 범한단 말입니까? 저는 최상의 예를 갖춰 그대를 대하고 싶습니다.”

귀족들의 예절은 정말 복잡하다고 생각하는 산수이였다.

‘얀피르랑 대화할 땐 그런 게 없어서 참 편한데. 가끔 원래 세계의 사람들하고 대화하는 기분이 들어서 좋기도 하고.’

물론 대외적으론 산수이 그녀가 얀피르보다 신분이 높고, 얀피르는 외국에서 왔기 때문에 제국어가 서툴다는 설정이라 가능한 일이었지만.

‘휘온하고도 편하게 지내고 싶은데…….’

혼자서 이런 생각에 잠겨있을 때쯤, 때밀이실의 문이 열리며 첫 번째 예약 손님이 들어왔다.

“처음 뵙겠습니다, 산수이 비덴비덴 남작 영애.”

긴 수건으로 몸을 가린 채 때밀이실로 들어선 건 중년의 뉴텔 자작 부인이었다.

우아한 걸음걸이만 봐도 그녀가 얼마나 기품 있는 여성인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뉴텔 자작 부인. 이쪽에 엎드리시지요.”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자작 부인은 처음 방 안으로 들어설 때를 제외하곤 거의 입을 열지 않았다.

‘말수가 적은 분이시군.’

자작 부인이 대리석 판에 눕자 산수이는 그녀의 수건을 풀고 조용히 때를 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중년의 자작 부인은 역시나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신의 속 얘기를 줄줄 늘어놓기 시작했다.

“산수이 영애, 내 이런 얘기는 생전 처음 해 보는 것입니다만…….”

“네에, 괜찮습니다. 말씀해보세요.”

“그게 실은…….”

뉴텔 자작 부인은 자신의 속에만 꼭꼭 숨겨두었던 이야기를 펼쳐놓았다.

사연은 복잡한 듯 간단했다.

자신의 딸이 요새 갑자기 엄마 말을 안 들어 처먹는다는 것이었다.

“후우…… 원래부터 그런 애는 아니었는데. 어느 날부턴지 제 얘기가 듣기 싫다며 고성을 버럭 지르지 뭡니까. 이러다가 밖에 나가서도 가문의 위상을 떨어뜨리지는 않을지 걱정이…….”

산수이는 계속해서 때를 밀며 대답했다.

“어떤 대화를 나누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아, 딸애한테 남편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한 것뿐이었습니다. 평소처럼요.”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산수이가 입을 열었다.

“흐음. 실례지만 혹시 그 이야기라는 게, 남편분의 험담이었나요?”

“아니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리고 아래로 아드님이 한 분 더 있다고 하셨죠?”

“네. 그렇습니다만……?”

“남편분 험담은, 아마도 아드님 앞에선 안 하셨을 테고요.”

뉴텔 자작 부인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산수이는 알 것 같다는 표정으로 끄덕이며 말했다.

“남편분께 화가 나실 때마다 그 한풀이를 오로지 따님만을 붙잡고 하셨군요.”

“아아 맞습니다, 맞아요! 그이가 술집에 다녀온 흔적이 발견된 날이면, 딸애를 붙잡고 울면서 욕을 하곤 했어요……!”

뉴텔 자작 부인이 허를 찔렸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엔 그다지 반성하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투덜거림뿐.

이에 산수이가 그녀에게 대답했다.

“뉴텔 자작 부인, 차라리 살롱에 가서 친구분들에게 남편 욕을 하세요. 지금처럼 따님을 붙잡고 하시면 안 됩니다.”

“어떻게 그런……! 그러다 소문이 나면 어떡하라고요!”

“따님이 계속 저런 반응을 보이신다면, 어차피 소문나는 건 시간문제예요. 정 안 되겠다 싶으시면…….”

산수이가 상큼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저한테 때 밀러 오셔서 욕하세요. 비밀 보장해드릴게요.”

산수이는 뉴텔 자작 부인을 향해 윙크를 찡긋해 보였다.

“하소연은 어른들끼리 해야죠. 어찌 됐건 따님께는 자작님이 하나뿐인 아버지시잖아요? 이러다간 따님이 엇나가실지도 몰라요.”

“!”

그것은 경종을 울릴 정도의 깨달음이었다.

그때부터였다.

뉴텔 자작 부인이 떠난 이후에도 산수이는 몇 차례 때밀이 예약 손님들을 더 받았고.

이후 비덴탕이 여성들 사이에서 심리 상담 살롱으로 불리게 된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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