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느닷없이 튀어나온 정체를 알 수 없는 물건에 모두의 이목이 쏠렸다.
“이건……?”
바로 옆에 앉아 있던 테리어드 또한 그녀가 들고 있는 것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그렇게 잠시간 쳐다보던 그는, 이윽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챘는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외쳤다.
“아…… 이게 그!”
“네. 아마 경께는 엘시어가 말을 전달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엘렌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탁자의 앞쪽으로 걸어 나간 그녀가 들고 있던 종이를 펼쳐 케이든의 앞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것은 제가 크렘벨 공작에게서 갈취한, 전대 크렘벨 공작과 후궁 벨라테스 이스타지오가 주고받았던 편지입니다.”
“전대 크렘벨 공작과 벨라테스……?”
갑작스레 튀어나온 이름에 케이든이 의아하게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는 제 앞에 놓인 종이를 들어 위에서부터 찬찬히 훑기 시작했다.
<크렘벨 공. 내 제안은 생각해 봤나요? 난 그대가……>
일단 좋은 펜을 썼는지 아주 부드럽게 지나간 펜선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종이 끝이 살짝 변색된 것으로 보아 이 편지는 작성된 지 꽤나 오래된 것이 분명했고, 그럼에도 번지지 않은 것을 보면 종이와 잉크를 꽤나 고급으로 분류되는 물건을 썼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좋지 않은 의미로 익숙한, 매년 황실 행사마다 보았던 꼴도 보기 싫은 벨라테스 이스타지오의 필체.
그는 떨리는 손으로 편지의 나머지 내용을 읽어 내리기 시작했다.
<그대가 망설이는 건 내가 황후궁의 보안을 뚫을 수 있을지, 그 확신이 없어서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난 실행할 자신이 있답니다. 아무리 철통같은 보안을 자랑한다 한들, 그곳도 어쨌든 사람이 드나드는 곳이지요……>
그의 눈길이 미친 것은 딱 거기까지였다.
케이든은 제가 들고 있던 편지를 끝까지 읽지 못한 채 버스럭, 종이를 구겨버렸다.
“이게…… 벨라테스의 편지라고?”
물어보는 그의 뺨이 분노로 파들거렸다. 엘렌은 착잡한 눈으로 보다 대답했다.
“……네. 확인해 보시면 알 수 있으실 겁니다.”
엘렌의 차분한 긍정에 케이든이 한숨을 내쉬었다. 한차례 마른세수를 한 그는, 후 거친 숨을 내뱉고는 그대로 뒤에 겹쳐져 있는 종이들을 휙휙 넘기기 시작했다.
<황후궁의 시녀를……>
황후궁. 모친이 머무르던 궁.
<말라냐의 싹이……>
말라냐. 모친을 살해한 독초의 이름.
케이든은 결국 그것들을 더 보지 못하고 쾅, 책상 위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그는 그 편지들을 모리스가 있는 방향으로 밀어내며 말했다.
“자네가 읽어보게. 난 도저히 더 못 읽겠군.”
그의 명령에 모리스가 편지들을 가져와 앞장부터 차례차례 넘기기 시작했다.
그는 한 문장도 허투루 넘기지 않기 위해 깊이 집중해 읽었고, 그래서인지 그의 입이 열린 것은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나서였다.
“……일단 내용과 서명으로 봐서는 크렘벨 공과 벨라테스 이스타지오 간에 주고받은 편지가 맞는 것 같습니다. 더 정확한 것은 필적 대조를 해 보아야 알 수 있겠군요.”
그의 말에 케이든이 짓씹듯 덧붙였다.
“내가 볼 땐 벨라테스 이스타지오의 필체가 맞다. 그 같잖게 공들인 글씨를 알아보지 못하기도 어렵지.”
속이 이글이글 끓어오르는지 그의 잇새로 앓는 듯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의 긍정에 장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케이든이 두 손으로 제 눈가를 가린 채 말했다.
“……벨라테스는 솔직히 모를 수가 없었지. 그런데 거기에 전대 크렘벨 공작도 가세했었다고.”
“정황상 그리 생각합니다만, 사실 크렘벨 공작의 답신이 없어 확언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벨라테스의 계획을 알고도 방조한 것은 확실하니 어쨌든 반역죄는…….”
“방조. 방조라.”
애써 차분히 말했지만 제 속에서 끓는 분기까지 숨기진 못한 목소리였다.
모두가 이해는 했다. 단순히 숨통을 끊어놓는 것에 집중하기엔 전대 크렘벨 공작은 이미 죽어버린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 분노를 풀 길은 사실을 제대로 밝혀 그의 명예를 끝까지 더럽히는 것밖에 없는데, 이래서야 전대 크렘벨 공작은 그저 겁 많고 불운한 방조자로서 남게 될 뿐이다. 비겁하고 야비한 반역자의 얼굴은 영영 가려지는 것이다.
10년 전 황태자의 분노를 알고 있는 그들은 그의 위태로운 모습을 어찌하지도 못하고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케이든이 물었다.
“하나같이 아주 황가를 해하지 못해 안달이군. 대체 무슨 원한이 있어서 이러는 거지?”
질문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정확히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분노였다.
그것을 알아챈 모리스는 제 상관의 안색을 흘끗 살폈다.
온 얼굴이 경직되다 못해 창백할 지경이었다. 스스로를 진정시키기 위함인지 몇 차례 심호흡을 하는 것도 보였다.
중심을 잘 잡으셔야 할 텐데.
모리스는 이런저런 걱정이 뒤섞인 채로 입을 열었다.
“……일단 이 편지에 따르면 대공위를 주어 공국으로 분리해 나갈 권리를 주겠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새로운 왕가를 만드는 겁니다.”
“왕가? 전대 크렘벨 공작이 그 정도의 야심가였나?”
“저도 그 부분까지는 무어라 드릴 말씀이…….”
모리스가 말끝을 흐리자 케이든이 퍽 자조적인 웃음과 함께 말했다.
“하긴. 알았다 하더라도 별수 있었을까. 길리언 크렘벨을 눈앞에 두고도 몰랐는데 말이야.”
모리스가 어찌 대답할 바를 모르고 침묵하다 테리어드를 쳐다보았다.
테리어드는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어 보였다. 저도 모르겠다는 뜻이었다.
그때 무거운 한숨과 함께 케이든의 입술이 열렸다.
“어쨌든…… 전대 크렘벨 공작은 당장의 급선무가 아니니 일단 넘어가고. 그러니까 후작이 이야기하는 건 이것으로 크레센트를 확실하게 보내 놓자. 이런 것이겠지요?”
“예. 2황자와 그 모친인 후궁 벨라테스, 그리고 그들을 뒷받침하는 핵심 세력인 바로크 후작을 한 번에 모두 처리할 수 있습니다. 다만…….”
엘렌이 그를 보며 걱정스레 말을 흐렸다.
이곳에 있는 이는 너나 할 것 없이 온통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제가 중심을 잡아야 할 때임을 느낀 케이든은 쓰린 미소를 지으며 그 뒤를 받았다.
“크레센트나 바로크 후작은 그저 벨라테스의 계획에 희생된 이들처럼 남겨진다는 이야기겠지요. 괜찮습니다.”
그가 애써 마음을 다잡는 듯하자 엘렌도 설핏 마주 웃으며 말했다.
“그러시다니 다행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전하께서 조금만 기다리신다면 충분히 다 밝혀낼 수 있습니다.”
그럴 리가.
케이든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형편 좋은 일이 언제나 일어날 리가 없다.
그는 엘렌의 말이 저를 위로하기 위해 나온 것인 줄 알고는 재차 말했다.
“괜찮습니다. 내 개인적인 바람을 위해 억지를 부리지는 않을 테니 걱정 마세요. 당장의 희생을 줄일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아니요. 밝혀낼 수 있습니다.”
그녀가 딱 잘라 말했다. 그러자 그제야 그 말이 진심이었음을 알아챈 케이든이 물었다.
“정말……이었습니까?”
“예. 다만 그것은 이클립스 황녀를 살려두어야만 가능합니다.”
갑자기 언급된 황녀의 이름에 그가 어리둥절한 낯으로 물었다.
“황녀? 그녀의 증언을 활용할 셈입니까?”
확실히 그렇다면 일이 쉬워지겠지만.
케이든은 가볍게 계산을 해 보았다.
황녀를 활용한다면 증거물들을 가지고 벌어질 지리멸렬한 공방 시간이 극적으로 단축된다. 크레센트의 명분을 단박에 지워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효과가 가장 큰 것은 아직 황위 다툼이 내전으로 번지기 전인 바로 지금.
‘하지만 수도 안에, 그것도 크레센트의 영향력 아래 있을 그녀와 접촉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을 텐데.’
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하기라도 한 듯 엘렌은 곧장 말을 이었다.
“예. 이클립스 이스타지오 황녀는 저희들의 협력자입니다. 그녀가 저와 엘시어를 도왔지요. 그녀가 없었다면 저희가 그렇게 적시에 도착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그랬습니까.”
그는 얼마 전 수도의 점령과 봉쇄 소식을 들었었던 때를 떠올렸다. 정말 미치기 직전이라고 해도 될 만큼 걱정이 됐었고, 그녀가 직접 이곳에 나타났을 때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기뻤다.
‘그런데 그게 그 황녀가 도운 것이었나.’
케이든은 생각에 잠겼다.
사실 그의 복수심의 대상에 황녀는 딱히 들어있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본래대로라면 바로크의 핏줄인 그녀까지 숙청에 휩쓸려 나갔을 가능성이 높았지만―
‘하지만 이 사람을 내게 보내준 게 그 황녀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그는 빠르게 결정을 마쳤다.
“좋습니다. 그녀를 통해 다른 증거들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고.”
그가 한층 안정된 모습을 보이자 엘렌이 비로소 안도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자 케이든도 방금 전까지의 분노는 잠시 접어두고 말했다.
“그럼 크레센트를 치울 근거는 생겼으니 이제 의논해야 할 것은 앞으로의 행보인데. 나는 가능한 빨리 출발했으면 좋겠군.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지?”
“최대한 빨리 움직여야 합니다.”
테리어드가 긍정하고 나섰다.
그 말에는 모두가 동의하는 바였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한 가지 있었다.
“하지만 아직 리넥스가 점령 상태입니다.”
모리스가 말했다. 그러자 그들의 대화를 쭉 듣고 있던 슈탓트펠트 경이 입을 열었다.
“어차피 그곳에 있는 것은 대부분의 병력을 잃은 트리발로스의 잔당들에 불과합니다. 큰 위협이 될 수 없으니 수도의 상황부터 정리하심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잔당이지만 추가 원군이 있을 경우 곤란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리넥스를 거점으로 마음대로 상륙할 수 있고 없고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곧장 반박이 나올 줄은 몰랐던 슈탓트펠트 경이 쯧, 혀를 찼다.
확실히 모리스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그 선택이 반드시 옳다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더 늦었다간 전하를 지지해 줄 귀족이 남아나지 않을 겁니다.”
말을 꺼내고 나선 건 아발란쉬 후작이었다. 그러자 제 말에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고 생각했는지 슈탓트펠트 경이 말을 받으며 나섰다.
“맞습니다. 당장 이번만 하더라도 에덴버 후작의 기지가 없었다면 우리는 이곳에서 죽었을 겁니다. 원군이 없어서 말이지요.”
“……그건.”
모리스의 말문이 막혔다.
그 또한 확실히 그랬다. 만약 그녀가 오지 않았다면, 저희는 지금쯤 생각할 머리도 여유도 없었을 것이다.
모두의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시선이 하나둘 엘렌에게로 모이기 시작했다.
은근히 제게 쏠리는 눈길들에 결국 엘렌도 입을 열고 나섰다.
“……저도 수도로 향하시는 것을 권합니다. 상대측에서 원군이 올 것을 예상한다면 더더욱 말이지요.”
“수도로?”
“예. 그들의 원군이 우리보다 병력이 적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가 없고, 만약 문제가 일어나도 이번처럼 대응에 필요한 최소 시간은 확보할 수 있을 테니까요. 제 움직임이 제한되었던 건 크레센트 황자 휘하의 수도지, 트리발로스가 아닙니다.”
그녀는 케이든을 직시하며 말했다.
“그러니 전하께서는 원하시는 대로, 곧장 수도를 향해 가시면 됩니다. 제가 함께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