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이제 떨어져 죽을 걱정은 없으니 다시 말하지요.”
아, 이런.
엘렌은 제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자신은 지금 도망치는 데 실패했음을 깨달았다.
천천히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는 자신을 더없이 다정한 눈빛으로 보고 있는 한 남자가 있었다.
“사랑합니다. 진심이에요.”
타닥, 타닥.
모닥불에서 불티가 튀는 소리가 났다.
저쪽 멀리에서 병사들이 떠드는 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왔다. 뺨을 스쳐 가는 바람이 더웠다.
한 마리 말을 같이 타고 다정하게 전장을 누빈 두 남녀는 그렇게 잠시간을 침묵 속에 있었다.
어떡하지. 당장이 급급해서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는 생각하지 않았어. 아니, 어차피 혼인할 거잖아? 그러면 내 대답 따위 어찌 되든 상관없는 것 아닌가? 아니야. 하지만 저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은걸. 안 돼. 그런 어리석은 것에 정신을 팔지 마. 봐, 벌써부터 이렇게 이성이 흐려지고 있잖아. 아직 마무리되지 않은 일들이 그렇게나 많은데도.
엘렌의 머릿속에서는 초 단위로 이런저런 생각들이 휙휙 지나갔다.
무게추는 이쪽을 향해 기울었다 저쪽을 향해 기울었다 난리가 났다. 머릿속에서 정신없는 싸움을 이어가던 그녀는 결국 스스로 항복을 선언했다.
그녀가 다시 얼굴이 불처럼 타올라서는 입을 열었다.
“아, 그러니까…….”
말을 꺼낸 것은 좋은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녀가 발개진 뺨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자, 케이든은 장소와 어울리지 않는 맑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그대는 당황하면 말문이 막히는 편이군요.”
“…….”
빛을 반사해 영롱히 빛나는 자수정의 눈동자가 갈 곳을 모르고 빙글빙글 돌았다.
어떡하지. 웃으면 안 될 것 같은데 너무 귀여워.
케이든은 그리 생각하면서도 결국 웃고 말았다. 도무지 입꼬리가 내려갈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어쩔 수 없었다. 자신으로서는 이렇게 엘렌의 표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을 본 것은 처음인데, 저런 모습마저 사랑스러운 것을 어쩌란 말인가.
케이든은 제가 생각해놓고도 제 생각이 조금 우스워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전에도 한 번 보고는 퍽 신기하게 여겼었는데. 기억합니까? 그때는 아마 내가 화를 냈을 겁니다. 그대의 무신경함에 데여서.”
케이든이 아주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엘렌은 자신마저 달콤하게 녹여버릴 듯한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아마 목소리나 시선에 형태라는 것이 있다면, 저것은 분명 부드러운 솜사탕 같은 감촉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한 번 삼켰다.
저 깊은 푸른 눈.
한밤중을 품은 듯 폭풍전야처럼 요동치는 바다를 품은 듯 일렁이는 저 머리칼과 눈동자.
그게 참 슬퍼 보였던 날도, 순수하게 빛나는 빛에 차마 마주보기 어렵다고 생각했던 날도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 어떤 것도 아니었다.
평온하게 잔잔한 듯하면서도 세찬 급류가 되어 쏟아져 내릴 듯 바르르 떨고 있는 저 눈에서는, 마치 저 허공을 건너 자신의 마음속까지 너울져 들어올 듯 거센 파도가 일고 있었다.
그녀가 그렇게 한참 보고만 있자 케이든이 그녀가 대답하기 곤란해한다는 것을 알아챈 듯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굳이 무언가 대답하려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대가 대답을 해도 하지 않아도 우리의 관계는 바뀌지 않을 테니까요. 그대와 나는 혼인식을 올릴 것이고, 우리는 서로의 약속을 지킬 겁니다.”
그의 배려 가득 담긴 말에 엘렌은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을 해 주고 싶은데.
하지만 그의 말마따나 말문이 막히니, 그녀로서도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말문이 막히는 이유는 알겠는데 도대체 해결책을 모르겠다.
일단 자신이 하고 싶은 바가 명확해야 하는데 마음과 이성의 저울이 제멋대로 요동을 치고 있었다. 그러니 당장의 방향성부터가 잡히질 않아, 대답도 나오지 않는다.
이걸 어쩜 좋아.
그를 받아주고 싶어.
하지만 벌써부터 이렇게 이성이 마비되는 내가, 이런 나를 믿을 수가 없어.
또 어리석은 일을 저지르고 말지도 몰라. 하지만 그때는 다시 시간이 돌아간다는 보장도 없지…….
엘렌의 시선이 흔들렸다.
케이든은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보다, 천천히 다가가 그녀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며 나직이 말했다.
“물론 그대가 받아준다면 아주 기쁘겠지요. 하지만 그대가 받지 않는다고 하여 내 마음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난 그저 내 마음을 그대에게 전한 것뿐입니다.”
그는 그녀의 손을 들어 그 손등에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손등에 느껴지는 말캉한 감촉과 뜨거운 체온. 마치 직접 입술을 나누기라도 하는 듯 짙게 이어진 키스였다.
가늘게 뜬 눈이 그녀를 향했다. 부드러운 호선 사이로 보이는 아콰마린이 지금 이 순간은 가장 뜨거운 불꽃처럼도 보였다.
그렇게 그녀의 손등 위에 데인 듯 화상 자국을 남긴 그는 그대로 또 한 번의 고백을 남겼다.
“사랑합니다.”
한동안 지그시 그녀를 응시하던 그는 주먹을 한 번 쥐었다 펴고는, 그대로 뒤돌아 승전 파티를 나누고 있는 병사들을 향해 돌아갔다.
타닥.
불티가 날리는 소리가 들렸다.
* * *
승전의 기쁨을 즐기는 병사들을 한 시간여 돌아다니며 격려한 지휘관들은 밤늦게 다시 성채의 회의실로 모였다.
당장의 위기는 모면했지만, 장기적으로 그들은 2황자의 반역을 해결해야 했던 탓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 회의는 엘렌과 케이든 역시 참여해야만 했기에 두 사람은 곧장 다시 얼굴을 마주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엘렌, 웬일로 네가 이렇게 때를 딱 맞춰 오지? 너도 늦는 날이라는 게 있구나.”
답지 않게 회의 시간에 딱 맞춰 온 엘렌에게 테리어드가 장난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피곤해서요. 테드.”
엘렌은 적당히 아무 변명이나 가져다 붙이고는 털썩 자리에 앉았다.
그녀가 케이든이 있는 곳을 힐끔 쳐다보았다. 혹시나 자신이 그의 고백을 신경 쓰다 마지막의 마지막에 후다닥 들어왔다는 것을 들킨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의 표정을 제대로 읽어내기도 전, 엘렌은 제 옆에서 터져 나온 시끄러운 잔소리에 곧 그것이 잘못된 선택이었음을 깨달았다.
“피곤해? 내가 그러게 뭐랬니. 아무리 너라도 전장을 누비는 건 위험하다고―”
언제나 밖에서는 그녀의 걱정으로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다니는 테리어드의 잔소리가 시작되었다.
변명을 잘못 선택했다.
곧바로 후회한 엘렌은 황급히 웃으며 그에게 소곤소곤 귓속말을 건넸다.
“테드, 이제 회의가 시작하는 모양이에요.”
“그 상처만 하더라도…… 에휴, 그래. 나중에 이야기하자꾸나.”
“알았어요. 걱정하게 해서 미안해요.”
엘렌은 일단 겉으로나마 웃으며 말했다.
이제는 정말 회의에 집중해야지.
그런 생각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그만 케이든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
엘렌은 얼른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그는 무언가 못마땅한 듯 테리어드를 흘겨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돌아가는 그녀의 고개에 시선이 움직인 모양이었다.
케이든은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그런데 그것이 또 아까 던져놓고 간 고백들을 떠올리게 해, 그녀는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고 말았다.
제 얼굴에 홧홧하게 열기가 오르는 것을 느낀 엘렌은 생각했다.
봐. 그 이후로 도저히 자신의 페이스라는 것을 찾을 수가 없잖아.
이성과 냉철이라는 단어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지금과 같은 때에, 특히 판단 하나하나가 중요할 자신의 위치에서 그것은 정말 독과 같은 일.
‘마음 단단히 먹어야 해. 당장은 눈앞의 일에 집중해야지. 모든 게 마무리되면 천천히 생각해 두었다가, 그때 대답해주면…….’
그러면 되는 일이야.
하지만 그녀는 스스로 한 결심이 무색하게도, 자꾸 한 사람의 얼굴이 눈에 밟혀 다시 생각을 제자리로 돌리고 말았다.
그의 마음을 듣고도 모른 척할 셈이야?
스스로의 양심이 묻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모르겠어.’
당장 내가 어떻게 하고 싶은지조차 분명치 않아.
“……엘렌, 엘렌!”
그때 옆에서 저를 부르는 작은 목소리에 그녀가 화들짝 놀라 옆을 보았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테리어드였다. 엘렌이 영 회의에 집중하지 못하자, 그녀의 옆에 있던 테리어드가 그녀를 부른 것이다.
그는 아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너 오늘 왜 이래?
그 의미는 아마도 저런 것일 테지만, 엘렌은 그저 싱긋 애매한 미소만 날리고는 정면을 보았다.
회의는 서부에서 군사를 이끌고 왔던 아발란쉬 백작이 제 담당지에서 있었던 일을 보고하는 중이었다.
그간 왔다 갔다 서로 대강의 이야기는 나누었지만, 이렇게 전원이 모여 근황을 나눌 시간은 없었기에 먼저 각각의 보고를 나누기로 한 것이다.
그의 보고가 끝나자 수도에서부터 내려온 엘렌과 엘시어, 크라이언트 백작의 설명이, 그리고 마지막으로 현재 심문을 통해 알아낸 리넥스에 주둔 중인 인원과 트리발로스의 정확한 침략 일정, 의도에 관한 보고가 이어졌다.
“정말 다행히도 전체적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지만 골라서 넘어왔군. 유일하게 걸리는 것이라면 폐하께서는 어떠하실지, 그 부분인데…….”
케이든이 고심하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자 테리어드가 나서서 말했다.
“전하께서는 저를 보내셨지만, 저는 제 판단으로 수도를 치는 것보다 국경 정리가 먼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이유는?”
“엘렌, 아니, 에덴버 후작의 전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엘렌에게로 향했다.
엘렌은 푹 한숨을 쉬고는 입을 열었다.
“황자는 아직 폐하를 해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애초에 무언가 목적이 있어 두고 있다는 것이고, 아마도 그것은 반역이 성공한 후 자신의 정당성을 보이는 것이겠지요.”
“적어도 내가 이곳에서 건재한 지금은 아니라는 뜻이군.”
“네. 지금 섣불리 그리했다간 외려 전하께 명분만 줄 가능성이 높아지니까요. 게다가 제게는 이런 것이 있습니다.”
그녀는 품속에서 정갈히 접힌 오래된 종이 조각들을 꺼내었다.
수도의 상황을 뒤집을 마지막 카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