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이걸 위한 입법이었나.’
갑자기 아발란쉬가 황제파의 안건에 찬성한다 싶었더니.
‘애초에 아발란쉬와 같이 짠 판이었던 거군.’
크레센트가 이를 빠득, 갈았다.
“인사드리겠습니다. 메이 아발란쉬입니다.”
메이는 앞으로 나와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그러면 오늘 준비된 파티, 재밌게 즐겨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메이의 말이 떨어지고, 후작이 손짓하자 준비된 악공들이 음악을 켜기 시작했다.
음악이 흐르는 홀.
한 손에는 깁스를 하고 있어 드레스 자락을 잡을 수 없는 메이를, 후작은 직접 에스코트해 단상을 내려왔다.
엘렌과 스파니엘은 그녀가 내려올 곳으로 마중을 나갔다.
“영애.”
“와 주셔서 감사해요, 두 분.”
메이가 환히 웃었다.
“축하해요. 이젠 후작 영애로군요.”
“어머, 나는 그러면 이제 후작 인맥이 생기는 건가요? 세상에.”
스파니엘이 호들갑을 떨며 웃자 메이도 마주 웃으며 말했다.
“다 여러분들 덕분인걸요.”
그런데 소르본 백작이 빠른 걸음으로 그녀들에게로 다가오며 외쳤다.
“메이!”
“……아버지?”
순식간에 메이의 앞까지 다다른 백작은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물었다.
“제이는? 제이는 어찌 되고 네가 후계자라는 게냐?”
“아버지. 축하를 해 주실 수는 없으신 건가요?”
“아니, 일단 이 상황을 내게 좀 설명해다오.”
그가 손까지 떨며 말하자, 그것을 씁쓸한 눈으로 물끄러미 보던 메이가 입을 열었다.
“……제가 되나 그 애가 되나, 소르본가에는 그다지 다를 게 없잖아요.”
“다를 게 없긴! 네가 후계자가 되면 그 애는 무엇을 한단 말이냐!”
“무슨 자리든 얻어 가문을 나가겠죠.”
“그래. 그러니 그 애에게 자리를 양보했어야지!”
후작이 흥분해서는 말했다.
“네 어머니는 영락없이 제이가 후계자가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단 말이다!”
“아버지. 그 애는 법적으로 후계자가 될 수 없어요.”
“뭐?”
“양자는 14세 이상이 되기 전에는 정당한 계승권을 가질 수 없어요.”
“아니, 그게…… 그게 무슨 소리냐.”
백작은 진심으로 당황했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뜻인지 제대로 곱씹어 볼 틈도 없이 곧바로 이어지는 메이의 말을 들어야 했다.
“그리고 후계자 자리를 얻지 못하면 가문을 나가야 하는 것은 저도 마찬가지예요, 아버지.”
“넌 혼인을 해야 하니 당연한 것 아니냐!”
“그 애는 혼인을 시키지 않으실 생각이셨나요?”
“가문의 이름을 계승하는 것이 그 애 아니냐. 그러니 그 애는…….”
백작의 말을 듣고 있던 메이가 이 이상은 힘들었는지, 그의 말을 자르고는 말했다.
“아버지. 가문의 이름을 계승하는 것은 후계자예요. 그 애가 아니라.”
메이의 일침에, 백작은 그제야 제가 간과하고 있던 맹점을 깨달은 듯 눈을 커다랗게 떴다.
“아발란쉬의 이름은 제가 계승합니다. 그리고 저 또한 제 혈육인 소르본에 그만큼의 대우를 할 것이며, 제이가 가문을 나간다고 하면 그만큼의 지참금도 챙겨 줄 생각입니다.”
“…….”
“그러니 걱정 않으셔도 돼요, 아버지. 저 잘할 자신 있어요.”
소르본 백작은 그런 제 딸을 넋 놓은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렇게 잠시간.
이내 두어 발 뒷걸음질을 친 그는 무겁게 입술을 열었다.
“……그래. 알겠다.”
“…….”
“잘 지내려무나.”
“……예. 아버지.”
메이는 복잡한 눈으로 제 아비를 바라보다, 이내 등을 돌렸다.
“가요, 두 분.”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엘렌은 그녀의 어깨에 살짝 손을 올리며 말했다.
“그래요. 이제 아발란쉬의 일원으로서 태자 전하께 인사를 드리러 가요.”
* * *
오늘의 주인공인 메이가 가는 곳으로 사람들의 이목이 움직였다.
그리고 그 길을 따라, 그 일행인 엘렌의 뒤를 쫓아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크렘벨 공?”
“2황자 전하.”
엘렌을 향해 다가가던 두 사람이 중간에 마주쳤다.
‘웃기지도 않아. 미련이 남긴 남은 모양이지?’
‘엘렌을 노리는 건가? 제게까지 가능성이 오리라고 생각하다니.’
크레센트와 길리언은 서로를 보며 비웃은 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엘렌을 향해 움직였다.
그들이 가야 할 길목 근처에 먼저 도착한 크레센트는 곧장 한 발 앞으로 나서며, 그들의 앞을 막았다.
가던 길을 방해받은 엘렌과 메이는 당황했다.
“아……. 전하를 뵙습니다.”
“영식은 이제 좀 괜찮아졌나?”
“전하께서 신경 써 주신 덕분에 많이 나아졌습니다. 약재가 참 좋은 것들이더군요.”
“신경 써서 보냈지. 그만큼 내가 영애를 높이 샀다는 거야.”
그는 씩 미소 짓고는 메이가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아발란쉬 영애. 신분 상승 축하하고. 그대는 무엇을 좋아하나?”
“감사합니다. 그런데 좋아하는 것이라면……?”
“좋아하는 활동 말이야.”
그가 제 뒤를 고갯짓하며 말했다.
“후작 영애는 영애인 동시에 후계자이기도 하니, 이런 후계자 모임에도 앞으로는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겠나.”
엘렌이 손수 그녀의 샤프롱과 같은 역할을 자처할 정도다.
둘의 친분이 상당하다 생각한 크레센트는 메이를 공략하면 엘렌도 함께 딸려 올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해, 곧장 그녀에 대한 공략을 시작했다.
“크라이언트 영애와 함께 오면 좋을 듯한데.”
“아…….”
메이가 조금 당혹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안은 감사합니다만, 전하. 후작 각하께서 주신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저는 조금 더 저 자신을 갈고 닦은 뒤 전면에 나설까 합니다.”
그 말에 자신이 획책한 계획이 어그러졌음을 깨달은 크레센트는, 애써 눈웃음을 유지하며 말했다.
“그래. 뭐, 그럴 수 있지. 하지만 이로써 크라이언트 영애도 계승권이 생긴 것 아닌가. 영애도 충분히 관심 가질 만한 모임이라고 생각하는데.”
크레센트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한번 엘렌을 타깃으로 하여 제안을 건넸다.
그런데 그때였다.
“엘렌이 참석해도 그녀가 배워서 받아 갈 정보들보다 그녀가 가르쳐 줘야 할 정보가 더 많을 겁니다.”
툭, 조금 예의 없다고 생각될 정도로 말을 던지며 들어온 것은 크렘벨 공작.
길리언 크렘벨이었다.
“크렘벨 공. 그게 무슨 소리지?”
크레센트가 이를 꽉 문 채 애써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길리언은 그런 크레센트의 눈치는 신경도 쓰지 않고 엘렌을 향해 말했다.
“엘렌. 네게는 시간 낭비인 모임 같군.”
“공. 언제부터 제게 그리 친근히 이름을 부르며 하대하셨습니까?”
엘렌이 기가 찬다는 듯 묻자 그는 태연히 대답했다.
“그래도 전 부부 아닌가. 한 침실을 썼던 사이인데 이제 와서 어찌 완벽히 남으로 돌아간단 말이지?”
그것을 옆에서 듣고 있던 스파니엘이 열받아서 입을 열었다.
“공. 이렇게 공개된 자리에서 못 하시는 말씀이 없으십니다.”
“사실 아닌가. 부부가 부부였음을 말하는데 뭐가 잘못되었다는 말이지?”
그 태도에 외려 기가 막혀 정말로 말문이 막혀 버린 스파니엘이 하, 허, 하는 소리만 내뱉자,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크레센트가 말했다.
“공. 공은 참석도 해 본 적 없는 자리에 대해서 너무 많은 걸 아는 체하는군.”
크레센트는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이마에 핏대가 서 있는 것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말씀하신 모임이 저기 저 인원들을 데리고 하는 것이라면, 예. 보지 않아도 알 만하니 하는 말입니다.”
“……그대가 언제부터 이렇게 말을 못 가리게 되었지? 투자 한 번 제대로 망하더니 그대로 넋도 같이 놓은 건가?”
“적어도 저 갓 스무 살 근처나 되었을 아이들의 가문 운영과 사업 수완이 엘렌보다 나을 리가 없다는 건 사실이니 말입니다.”
“근래 공의 새로운 모습을 참 많이 보는군. 누군가의 뒤를 쫓아다닐 줄도 알고, 이렇게 시비도 걸 줄 알고 말이야.”
크레센트가 파들거리는 입매로 말했다.
그러자 엘렌이 끼어들었다.
“두 분. 그만하세요.”
“…….”
“저는 말씀하신 모임이, 적어도 저기 페리윙클 공자가 있는 곳이라면 참석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나온 또 새로운 이야기에 크레센트가 고개를 돌렸다.
“그게 무슨 소린가, 영애?”
엘렌은 멀찍이 케이든이 서 있는 곳을 보았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고, 무언의 신호가 오갔다.
“제 동생의 사고를 사주한 이가, 바로 저 공자이기 때문입니다.”
엘렌이 손가락을 들어, 밀러 페리윙클을 가리켰다.
* * *
“뭐?”
크레센트가 휙 뒤돌아 밀러 페리윙클을 보았다.
“무슨 말씀이신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밀러는 태연히 말을 받으며 앞으로 나왔다.
“사고를 사주하다니요. 무서운 소리를 하십니다.”
그러자 그 사달을 구경하고 있던 길리언이 엘렌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미 그녀는 자신의 사고를 직접 사주해 자작극을 벌인 경력이 있었던 탓이었다.
여기서 엘렌에게 유리한 쪽으로 편을 들어 주면 이야기를 나눌 짬이 생길까.
길리언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중, 엘렌이 입을 열었다.
“모르겠다니요. 그에 관해서는 이미 증언까지 확보가 되어 있는데요.”
그녀가 싸늘한 눈빛으로 말하자, 밀러 페리윙클이 하, 하며 코웃음을 쳤다.
“확보한 증언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후작 영애 후계자 공표장에서 확실치도 않은 은원으로 파티를 어지럽히시다니. 너무 감정적이시지 않습니까.”
그러자 그 뒤에 서 있던 후계자 모임의 일원들이 저희끼리 킬킬대기 시작했다.
“영애께서도 아직 배워야 할 점이 많으신 듯합니다.”
뒤에 서 있던 이들이 길리언을 향해 말하자, 그가 피식 비웃음과 함께 입을 열었다.
“아직 덜 배웠군. 몰라도 너무 몰라.”
“……무엇을 말입니까?”
파들, 그의 비웃음에 자존심이 상했는지 밀러 페리윙클의 볼이 떨렸다.
“저 여자가 이렇게 공개적으로 나설 때는 그럴 만하니까 하는 거라는 사실 말이다.”
길리언은 그의 앞으로 몇 발자국 다가가, 우월한 체격과 날이 선 눈매로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카데미나 오가며 실패가 허용되는 삶을 살아온 너희와는 행동에 나서는 때 자체가 다르다는 것을, 아직 모르니 너흰 어린 거다.”
“어디 행동할 때가 된 그 증언, 한번 들어나 보지요.”
밀러 페리윙클이 곧 죽어도 지고 싶지는 않았던 듯 지레 당당히 말했다.
“그래. 말로만 이렇다 저렇다 하지 말고, 제대로 된 증거를 꺼내 보지.”
크레센트까지 그의 말에 동조하고 나서자, 엘렌은 알겠다며 씩 웃고는 근처의 시종을 불러 자신의 클러치를 들고 올 것을 지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