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그것이…….”
“애를 감당할 수 없다고 했나? 그러면 내게 보내게! 내가 감당할 테니!”
“예?”
“감당할 수 없는 자식 낳아만 놓고 방치하지 말고, 내가 돌볼 테니 내게 보내라고 했네!”
그러자 소르본 백작이 놀라서 외쳤다.
“메이를 보내라니, 설마 입양을 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내가 내 딸로 잘 돌볼 테니 내게 보내게!”
이게 무슨 소리람!
소르본 백작은 당혹스러움에 외쳤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너무 갑작스러우십니다!”
“자네 딸이자 내 누이의 딸이 공격을 받았네. 그런데 자네는 딸의 안전과 자네의 안위 중 무엇이 우선이었나?”
“그, 그건…….”
“정말로 자네는 메이를 끝까지 잘 책임질 수 있나? 나보다도?”
“…….”
말문이 막힌 소르본 백작이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여기서 메이를 보내게 되면, 후일 후계자로 삼을 아들은 공평함을 핑계 삼아 다른 가문에서 아이를 보내려 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 말인즉, 그의 둘째 아들이 후작가에 양자로 가 후작이 되는 일은 요원해질 가능성이 높았다.
‘우리 가문에 후작위가 넘어오는 일이라고. 포기할 수 없어…….’
백작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러다 그는 아주 단순한 돌파구를 떠올렸다.
‘……둘을 한 번에 보내면 되잖아!’
메이와 막내를 모두 후작가에 보내면 메이의 이번 사건도, 소르본 백작가의 안위도, 소르본가에 후작위를 끌어 온다는 계획도 모두 해결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소르본 백작이 입을 열었다.
“그, 그렇다면 저희 막내도 함께 데려가 주십시오. 어차피 가문 내에서는 장자에게 밀려 적당한 자리나 얻어 나가야 할 아이입니다. 제 누나를 누구보다 잘 따르니 함께 가면 조금이나마 안심이 되겠지요.”
“자네 생각이 정말 그러한가?”
“예.”
아발란쉬 후작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저렇게 속내를 훤히 보이다니. 애들 교육에 좋지 않겠어.’
아직 양자의 계승권에 관련한 법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되는지를 잘 모르니 저것으로 제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 것이다.
“알겠네. 페리윙클 따위 아주 뼈도 못 추리게 만들어 주지.”
후작이 승낙하자 소르본 백작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입양 절차는 어떻게 밟습니까?”
“그건 내가 공증인이 될 겁니다.”
케이든이 나서서 말했다.
“양측 동의만 확인된다면 내가 공증을 서도록 하지요.”
“감사합니다.”
소르본 백작은 후작이 말을 철회할까 싶어 얼른 말했다.
“그렇다면 바로 서류 작성을 하지요.”
“바로? 부인이나 아이들의 의견은 묻지 않아도 상관없습니까?”
케이든이 묻자, 소르본 백작은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어리둥절한 얼굴로 반문했다.
“예?”
“가문의 일을 결정하는데 다른 구성원들의 의견은 묻지 않느냐는 물음입니다.”
“제가 가주인데 무엇을 또 물어야 하는지…… 전하께서 하시는 말씀이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아니. 되었습니다.”
아발란쉬 후작이 왜 딸에게 제 모든 것을 쥐여 주려고 하는지, 케이든은 어렴풋이 알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손을 내저었다.
* * *
아발란쉬 후작령 사람들의 얼굴에는 근래 웃음꽃이 피었다.
황태자의 식량 자선 사업에 선정되어 식량 지원을 받은 것도 웬 떡인가 싶었는데, 갑자기 영주 가문에서 후계자가 생겼다며 성대한 파티를 연 것이다.
물론 성대하다고 해도 수도에서 열리는 파티의 규모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규모였다.
하지만 그것을 핑계로 풀린 영주의 금고가 그들의 생활을 급속히 윤택하게 만들어 주었기에, 체감되는 삶의 질은 오히려 급속히 올라갔다.
게다가 그들에게는 바로 옆 영지인 오세먼의 사정이 자꾸 들려왔기에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오세먼은 황태자의 지원 사업 선정도 받지 못했을뿐더러, 그렇다고 영주 가문이 그들처럼 금고를 푸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양 영지 간에는 상대적으로 비교하는 여론이 생길 수밖에 없었고, 그러한 분위기는 오세먼령의 분위기를 침체시켜, 귀족파와 그를 필두로 하는 2황자에 대한 민심이 극으로 치닫게 만들고 있었다.
* * *
수도의 아발란쉬가 저택.
조용하기만 하던 저택에 모처럼의 활기가 세차게 돌았다.
부부 동반, 가문의 영식과 영애를 불문하고 참석 가능한 모두 올 것을 권유한 대규모 파티의 초대장이 돈 것이다.
“다들 아발란쉬 후작의 혼인에만 귀를 기울이고 있었는데, 대뜸 후계자부터 나타나는구먼!”
“그러게나 말이네. 역시 재밌는 판이야. 예상치 못한 일들이 터질 때마다 어찌나 재미있는지.”
“그거 일전의 트리발로스―마그놀리아 종전에 관한 이야기지?”
“물론.”
킬킬대며 떠드는 남성들의 무리와,
“그런데 오늘 발표한다는 후계자가 소르본가 출신이라던데. 맞나요?”
“소르본 부인이 출가하기 전 후작과 워낙에 사이가 돈독했으니 말이에요.”
“하기야, 나 같아도 그런 자리가 있으면 곧장 보내겠어요. 아직 그 집 둘째가 어리긴 하지만 그만큼 후작가에서의 적응이 빠를 것 아니에요.”
“어찌 됐든 부인이 부럽네요. 아이들에게 모두 작위와 영지를 쥐여 주었으니 말이에요.”
소르본가를 화제로 떠드는 여인들의 무리.
그리고 군데군데 그들의 은근한 눈길을 받고 있는 유력 인사들이 있었다.
“저기 입구 쪽과 벽 쪽에, 황자 전하들이신가요?”
“어머 세상에. 정말이네요. 후작 정도가 되니 후계자 공표에도 전하들께서 오시는군요.”
“아니요. 두 분이 모두 참석하신 건 이번 아발란쉬가 처음이에요.”
“세상에. 요즘 태자 전하께서 승승장구하시면서 두 분 전하 사이의 기류가 심상치 않다더니…….”
그런데 입구 쪽을 훑어보던 여인이 말했다.
“어머, 저기 크렘벨 공도 왔네요. 요즘 계속 파티 참석이 이르군요.”
“크렘벨 공이 당분간 파티에 얼굴을 내미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네요.”
“왜요? 무슨 일이 있었나요?”
“남편분께서 말씀하지 않으시던가요? 이번 전쟁으로 크렘벨 공이 아주 크게 손해를 보았던 모양이에요.”
“어머.”
“가네트 백께서 말씀하셨다고 하더라고요.”
“어, 공께서 누굴 찾으시는 것 같은데요?”
길리언을 보고 있던 이가 말하자, 근처에 서 있던 여인들이 그의 시선 끝을 확인하고는 말했다.
“저기 크라이언트 영애가 있는 곳 아닌가요?”
“맞네. 저쪽을 보고 가시는 것 같은데.”
“어머, 어머. 가네트 백의 말씀이 정말 사실이었을지도 모르겠어요.”
여인의 말에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들이 물었다.
“뭔가요?”
“……크렘벨 공이, 아직 크라이언트 영애에게 미련이 남아 있다는 이야기요.”
여인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전하듯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 * *
여름이라 가벼운 소재로 나풀거리는 치맛자락.
시원해 보이는 백금과 엘렌의 눈 색과 같은 자수정으로 장식한 드레스는, 사교 시즌에 그녀가 입고 다니던 것들과 비교하면 확실히 수수하다는 인상을 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런 그녀의 차림에 대해 지적을 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오, 엘렌. 그 머리 장식 참 예쁘네.”
“그래? 나중에 같은 공방에서 나온 것으로 한 상자 보내 줄게.”
“어머, 고마워라.”
엘렌의 연락을 받고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수도로 내려온 스파니엘이 두 손을 맞대고 웃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아직 영애가 나올 것이라 짐작하는 이는 그다지 없는 것 같은데.”
스파니엘이 중얼거리자 엘렌이 말했다.
“다들 일부러라도 쉬쉬하는 분위기니까. 가문 내에서 잡음이 생기길 바라지 않는 거겠지.”
“영애가 나오면 볼만하겠네.”
스파니엘이 기대된다는 듯 짓궂게 웃자, 엘렌이 피식 마주 웃었다.
“어쨌든 오늘은 여러모로 소르본 영애, 아니 이제는 아발란쉬 영애지. 그러니까 아발란쉬 영애는 공격을 받기 쉬운 위치야. 너도 긴장하고 있어야 해, 스위니.”
“걱정 마. 솔직히 여성들의 사교계는 너보다는 내가 더 잘 알걸.”
그러자 엘렌이 웃으며 말했다.
“그건 그래. 그래서 네게도 도움을 청했잖아.”
“아, 후작이 올라가네. 이제 시작되려나 봐.”
고개를 돌리자 아발란쉬 후작이 단상으로 이어진 계단을 올라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저희끼리 떠드는 소리로 떠들썩거리던 파티 홀의 목소리들이 불이 꺼지듯 하나둘씩 잦아들었다.
단상 위에 오른 후작이 입을 열었다.
“오늘 이 자리에 와 주신 여러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벽에 반사된 후작의 목소리가 제법 크게 웅웅 울렸다.
“하하. 항상 결혼이 문제였는데, 어떻게 제가 아내도 얻기 전에 후계자부터 얻었습니다.”
그가 웃으며 말하자, 조용하던 사람들 사이에서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제가 이번에 제 소중한 조카들을 제 아들딸로서 데려왔다는 이야기는 많이들 들으셨을 겁니다. 둘 모두 제게는 과분할 만큼 예쁜 아이들이었지요.”
후작이 살짝 몸을 틀어 제 뒤로 팔을 뻗으며 말했다.
“오늘의 이 자리는 그 아이들을 소개하기 위해 마련한 것입니다. 소개하지요. 메이 아발란쉬와 제이 아발란쉬. 제 아이들입니다.”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두 사람이 전면에 나서자, 사람들은 박수를 쳤다.
한참 홀을 울리던 박수 소리는 후작이 잠시 손을 들자 곧 잦아들었다.
“그리고 제 후계자도 이 자리에서 공표할 생각입니다.”
후계자.
단상 아래에 있는 소르본 백작의 시선이 열망으로 물들었다.
습관적으로 오른손을 내밀던 후작의 손이 공중에서 멈칫했다.
오른손을 다시 아래로 내린 후작은 곧 뚜벅뚜벅 걸음을 옮기며, 소르본가의 둘째 공자를 지나쳤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밑에서부터 번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후작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깁스를 하고 있는 메이의 왼손을 지나쳐, 단상의 끝인 그녀의 오른편으로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제 딸, 메이 아발란쉬가 장차 가문을 물려받게 될 제 후계자입니다.”
아주 어색한 장면이었다.
평소 여인들을 에스코트하는 오른손 대신 반대편의 왼손.
남녀가 서 있는 위치도 뒤바뀌었고, 애초에 그 자리에 여인이 서 있다는 것 자체도 믿기질 않았다.
“의문을 가지신 분들이 많은 듯해 덧붙이자면, 이제부터는 여인들의 가문 승계가 가능해졌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제 딸 메이로 하여금 제 뒤를 잇게 할 생각입니다.”
지금 이 파티장에는 없던 계승권이 생김으로 인해 상황이 달라질 이들이 즐비했다.
가문 내 발언권으로 갈등을 겪고 있던 이들, 틀어진 부자 관계로 새로이 권력을 다질 방안을 모색하던 이들, 후계가 없는 가문의 작위를 노리고 있던 방계들…….
그야말로 온 귀족 사회가 들썩일 만한 일이었다.
“축하해 주십시오, 여러분.”
후작의 말에 웅성이던 장내에서는 뒤늦은 박수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소리 사이에 섞여 있는 저마다의 소리까지 가라앉힐 수는 없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전혀 몰랐던 거지요?”
“회의 결과는 공후 회의에서 결정되니까요. 그들이 은폐하며 슬쩍 지나가려 하니 그리된 것 아니겠어요?”
“세상에. 이런 일을 그렇게 넘어가려 하다니…….”
사람들은 숙덕였고, 그 사이에서 크레센트는 눈을 번쩍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