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자, 그럼 도장 찍으세요-61화 (61/128)

<61화>

“페리윙클 말입니까?”

“그래. 크라이언트 영애가 증언을 확보했다고 하더군.”

“예? 무슨 증언 말씀이십니까?”

“페리윙클 영식이 마차에 손을 댔다는 증언.”

그러자 모리스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대체 그런 건 언제…….”

“나와 함께 아카데미를 들렀을 때.”

케이든이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어쨌든, 그러니 동향을 잘 살피다 슬쩍 던져 주라고. 알았지?”

“예.”

“그럼 다음 건으로 넘어가서…….”

그는 쥐고 있던 다음 서류철을 열었다.

“오, 초석 광산을 찾았다고?”

“정확히는 추정되는 단서를 몇 군데서 잡았는데, 조사대를 일시 파견하고 싶으니 인원 차출을 허용해 달라는 이야기입니다.”

“음…….”

동봉된 지도를 보던 케이든이 신음을 흘렸다.

“위치가 애매하군.”

“예. 이중 벨레니오스와의 국경 지대에 위치한 곳을 유력하게 보고 있습니다.”

“이곳으로는 슈탓트펠트 경을 보내지.”

“그리 전달하겠습니다.”

명령을 적은 서류에 날짜와 함께 서명을 하던 케이든은 펜을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날짜를 다시 한번 확인한 뒤 모리스에게 물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오늘은 체셔 경이 근무하는 날 아니었나? 왜 경이 와 있지?”

그러자 모리스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원활히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 것 같지 않기에 제가 근무를 바꿔 주었습니다. 혹 체셔 경에게 따로 지시하실 일이 있으셨습니까?”

“아니,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나저나 체셔 경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케이든이 순수하게 물었다.

“크라이언트가에 청혼이 들어갔다는 말 때문이겠지요.”

“뭐?”

한숨과 함께 답하는 모리스를 케이든이 아연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지?”

“그냥 제 생각입니다. 하는 행동이 그래서 말이지요.”

“아니, 아니. 청혼 말이야.”

“예?”

“크라이언트가에 청혼이 들어갔다고? 누구지? 누가 그런 간 큰 짓을 했어.”

“한둘이 아닙니다만…….”

“그럼 체셔 경이 머리를 싸매게 만든 건 누구지?”

“아, 그러니까…… 플란넬 백작입니다.”

모리스의 대답을 들은 케이든이 흥, 콧방귀를 뀌었다.

“그 얼굴만 번지르르한 인간 말인가? 얼마 전까지 유부녀와 염문설이 났던?”

“예. 맞습니다.”

“하. 이제 와서 그동안 흠모해 왔다든가 하는 개소리는 하지 않을 것이고. 저의는 뭐지? 우리 쪽으로 붙고 싶다는 건가?”

“그리 봐도 무방하지 싶습니다.”

“전혀 몰랐군. 내가 모르는 사이에 그런 일이 있었어.”

케이든이 기가 막힌다는 듯 큰 소리로 하! 하며 코웃음을 쳤다.

“청혼서는 며칠 전 보냈고, 오늘 크라이언트 저에 들른다고 합니다.”

“가지가지 하는군.”

그가 들고 있던 펜으로 가지가지 같은 말들을 꾹꾹 눌러쓰며 말했다.

“전하. 플란넬 백작이 못마땅하긴 하나 적당한 패이긴 합니다.”

모리스의 말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케이든은 얼굴을 팍 찌푸리고는 일갈했다.

“코엔하임 경. 나는 적당한 방법이 아니라 가장 안전한 방법을 택할 거야. 그건 영애와 나의 혼인이고.”

생각 외로 강경한 그의 태도에 모리스가 움찔하자, 케이든은 그의 어깨를 툭툭 토닥였다.

“어쨌든, 이 소식을 크라이언트가에 전달할 사람이 필요하겠군.”

“예. 전령을 보내시겠습니까?”

“아니. 내가 가지.”

“전하께서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런 상관의 태도에서 테리어드를 떠올리고 만 모리스는,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참으며 고개를 숙였다.

* * *

요즘 왜 이렇게 사소한 재난이 자주 찾아올까.

“제게는 크라이언트 영애와 같은 이가 필요합니다. 전부터 흠모해 오고 있었습니다. 부디 절 받아 주시지요!”

플란넬 백작이 제 얼굴만 한 꽃송이들로 채운 꽃다발을 내밀었다.

‘……이걸 어쩐담.’

엘렌은 조금 곤란한 듯 애매한 얼굴로 그 꽃다발을 받아 들었다.

황태자와 재혼 예정이란 사실을 밝히지 않았을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었지만.

‘예상만 하던 때와 그것을 현실로 맞닥뜨렸을 때의 느낌은 또 다르단 말이지…….’

“마음은 감사합니다. 하지만 백작께서는 저를 왜 필요하다 하시는지요?”

그녀의 질문에 플란넬 백작이 마른침을 한 번 꿀꺽 삼켰다.

“저는 결합을 통해 제 가문에 힘을 실어 줄 가문이 필요합니다.”

그는 엘렌의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크렘벨 공은 아마 다시 백작가나 자작가의 젊고 아름다운 영애를 들이려 할 겁니다.”

“그렇겠지요.”

엘렌이 그의 말을 긍정하자, 그는 언제 제가 긴장했었냐는 듯 자신 있게 제 어필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영애께서도 젊고 아름다운 배우자를 들이셔야지 않겠습니까? 전 아직 어리고, 부끄러운 말이지만 외모로도 정평이 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장 자신 있어 하는 제 옆얼굴이 보이도록 고개를 살짝 틀어 숙이며 말했다.

“신분을 생각한다면 백작위 이상을 소유한 이와 연을 맺으셔야겠지요. 하지만 지금 그런 이들 중에 여인의 재가를 받아 줄, 그것도 초혼의 귀족은 저뿐일 겁니다.”

“……확실히 그런 귀족이 흔치는 않을 테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그저 젊고 아름답기만 하면 제 배우자에 적격이라는 말씀이신가요?”

“그런 뜻으로 드린 말씀은 아닙니다. 그저 영애께서는 이미 웬만한 것을 다 갖추고 계시고, 현재 후작가 이상의 귀족들 중 혼인 시장에 뛰어든 이들이 없으니, 그렇다면 곁에 둘 것으로는 백작위와 함께 영애의 옆을 빛내 줄 아름다운 제가 최적 아니겠습니까.”

준비해 온 것들을 모두 풀어놓은 그는, 이제부턴 그녀의 마음에 드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에 제 몸매가 잘 드러나도록 가슴을 쫙 폈다.

그런데 그때였다.

“아니. 나를 두고 어찌 그대가 최적의 선지란 말이지? 그거 정말 어불성설이로군.”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웬 남자가 들이닥쳤다.

한참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던 플란넬 백작은 저를 방해한 남자를 돌아보았다.

“저, 전하?”

“어머, 전하.”

“갑자기 찾아와 미안합니다. 사고 관련해 전해 줄 이야기가 있어서.”

케이든이 흘끗 아래를 내려다보고는 말했다.

“영제의 문병 겸 직접 들렀습니다. 이런 광경을 보게 될 줄은 몰랐지만.”

케이든의 시선에 얼굴이 시뻘게진 플란넬 백작은 급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저, 전하를 뵙습니다.”

“오랜만에 봅니다, 플란넬 백작.”

“예. 전하. 그런데 저는 전하를 두고도 제가 최선이라 한 것이 아니옵고…….”

“나는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 그건 그것대로 모욕적인데.”

그러자 백작의 낯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그러자 그를 수행하기 위해 따라왔었던 모리스가 보다 못해 나섰다.

“전하.”

“왜. 내가 틀린 말을 한 것은 아니지 않나.”

“신하를 지나치게 곤란하게 만드는 언사는 폐하께서 좋아하시지 않을 겁니다.”

“틀렸어. 부황께서는 그런 것을 아주 좋아하시지.”

케이든이 빈정대며 말하자 모리스가 소리쳤다.

“전하!”

“아, 그래, 그래. 알겠다고. 곤란한 언사는 하지 않겠어.”

케이든은 제 양손을 올려 흔들고는 자리를 피해 소파에 앉았다.

그러자 일단 이 상황을 빨리 정리하고 싶었던 엘렌이 말했다.

“백. 오늘 방문해 주신 것은 감사했습니다.”

“아…… 아닙니다.”

“하지만 전 아직 다음 혼인에 대해 깊이 고민해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섣부른 결정으로 백작께 누를 끼칠까 염려가 됩니다.”

“괜찮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라도 저를 두고 한번 생각해 보시면 될 일이지요. 저를 선택하시는 게 분명 최선이실 겁니다.”

그러자 멀찍이 앉아 있던 케이든이 중얼거렸다.

“영애가 자네 정도에서 만족할 수 있다면 말이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지만, 모두가 충분히 들을 수 있을 정도의 목소리였다.

백작이 움찔거리자, 모리스가 한숨과 함께 다시 케이든을 제지했다.

“전하.”

“왜. 영애가 나를 보다가 눈이 높아지는 것까지는 내가 어쩔 수 없지 않나.”

그걸 말하는 게 아니지 않느냐는 말이 모리스의 목 끝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더는 제 주군을 지적할 수 없었던 그는, 그냥 여기서는 입을 다무는 것을 택했다.

그걸 지켜보던 엘렌은 결국 자신이 이 사태를 수습해야 함을 받아들이고는 한숨과 함께 말했다.

“백작. 오늘 주신 말씀에 대해서는 추후에 정중한 서신으로 대답을 드리겠습니다.”

“……예. 오늘 귀한 손께서 오시는 줄도 모르고 제가 때를 잘못 맞추었습니다.”

백작은 자리에서 터덜터덜 일어나서는 케이든에게 꾸벅 허리를 숙였다.

“전하.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래. 조심히 들어가게.”

“전하. 저도 배웅만 하고 돌아오겠습니다.”

“그러시지요.”

케이든은 결국 저택을 나서는 백작의 뒷모습을 보고는 실실 웃었다.

“만족하십니까.”

“그럼.”

그런 그를 물끄러미 보던 모리스는 생각했다.

아무래도 제 친구의 짝사랑은 영 그른 모양이라고.

그렇게 한참을 웃던 케이든은 배웅을 마치고 발걸음을 돌리는 엘렌이 보이자, 서둘러 표정을 가다듬었다.

“전하. 많이 기다리셨는지요?”

서둘러 돌아온 엘렌이 묻자, 케이든은 한결 개운해진 얼굴로 말했다.

“아닙니다. 이제 제 본론을 전달할 수 있겠군요.”

그는 품에서 제가 가져온 문서를 꺼내 들어 그녀에게 건넸다.

“치안대에서, 영애의 고발을 뒷받침해 줄 증언들을 확보했습니다.”

“뒷받침할 증언들이라면?”

“그 마차 사고는, 사고 전날 누군가의 인위적인 조작이 가해지지 않는 이상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는 이야기지요.”

엘렌은 그가 건넨 종이를 받아 들어 한 번 훑어보고는, 제가 들고 다니는 메모지에 옮겨 적었다.

“이틀 전까지는 멀쩡했고, 마차가 그만큼 파손되려면 그사이에 무언가 인위적 조작이 가해졌어야만 한다……. 좋아요. 요긴하게 쓰겠군요.”

그녀의 중얼거림을 들은 케이든이 물었다.

“영애가 말입니까? 어디에?”

“글쎄요. 적당한 협박과 회유에?”

엘렌은 제가 적은 메모지를 갈무리하며 싱긋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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