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영애가 왜 입을 다물고 있었어야 했을지, 각하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페리윙클이 무엇을 믿고 그리 활개 치고 다녔는지 또한 말이지요.”
“……그래서?”
“영애의 미래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녀가 작위를 받을 수 있다면 그것이 최상의 결말입니다. 만약 영애가 소르본가의 사람으로만 남는다면, 페리윙클은 결정권자인 소르본 백작과 적당한 합의를 본 뒤 또 희희낙락 살아가겠지요.”
“…….”
“그리고 그런 선례를 남긴 영애는 앞으로도 노골적인 괴롭힘에 입을 다물어야 하며, 심지어 가문에서 버려진 이라는 꼬리표가 붙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정말 영애를 그리 두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그것은 후작 역시 반박할 수가 없는 부분이었다. 그는 딱히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입을 다물었다.
“백작 영애 살해 시도와 후작가의 후계자 살해 시도. 어떤 경우에 페리윙클의 죄가 더욱 무거워지리라 생각하십니까.”
“……옳은 말이오. 나도 알고 있소. 하지만 그게 대체 가능은 한 소리요?”
“물론이지요. 각하까지 합류하시면 벌써 표가 네 장이군요.”
엘렌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작은 모험이지, 대격변이 아닙니다. 어떤 조건을 얼마나 달든 첫 물꼬만 트면 됩니다.”
“……어찌 되었든 메이는 통과시킬 자신이 있다는 건가. 하지만 그리 말처럼 쉽지는 않을 거요.”
“물론 그렇겠지요. 하지만 지레 되지 않을 일이라며 꼬리를 말 일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충분히 승산이 있어요.”
싱긋 웃는 것이 마치 미래를 보고 오기라도 한 듯 확신에 가득 찬 모습이었다.
“황제파의 표 세 장을 움직여 드리지요. 보증은 여기 태자 전하께서 서실 겁니다.”
“……마치 홀리기라도 한 것 같군.”
후작이 얼떨떨한 낯으로 말했다.
“일단 오늘의 일은 정말 고맙소. 내 그대의 은혜를 잊지 않을 것이오. 하지만 이 문제는, 내게는 조금 시간이 필요하오.”
“물론입니다. 소르본 영애는 한동안 더 저희 크라이언트 저에 머물 예정이니, 언제든 찾아오셔도 좋습니다.”
“그래야지.”
그리 말한 후작은 그대로 몸을 돌려 상석에 자리한 케이든을 향해서도 감사의 말을 건넸다.
“전하. 오늘 이리 도움 주신 일을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도움이라면 무엇이든 말씀해 주십시오.”
“그리 말해 주어 고맙네.”
케이든이 손을 내밀어 후작의 손을 잡자, 후작은 그의 손을 힘주어 꽉 잡았다.
* * *
맴― 맴―
매미 우는 소리가 시끄러운 여름.
템트 운하, 넘실거리는 물이 빛을 반사해 은빛으로 반짝였다.
사람들은 분주히 항구에 정박 중인 배들 사이를 오가고 있었다.
정박 중인 배를 살피던 남자가 말했다.
“이거 수위가 너무 낮은데? 나갈 때 괜찮을까 모르겠어.”
“그러니 적당히 싣게. 다들 힘들다, 힘들다 하는 시기에 이만큼이나 곡식이 나갈 수 있는 게 어딘가.”
“그건 그렇지. 어, 저기 디디네. 어이, 디디!”
남자들은 대화를 나누다 근처를 지나가던 청년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 소리를 들은 단델리온, 그러니까 모리스와 테리어드의 아카데미 동기이자 공무원인 그는 얼굴을 팍 찌푸리고는 말했다.
“디디라니. 차라리 그럴 바엔 이름으로 불러 주세요.”
“그건 네가 싫다고 했잖아.”
“그게 더 싫습니다.”
단델리온이 톡 쏘아붙이자, 남자들은 알겠다며 왁자하게 웃고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말했다.
“그나저나 너 이번에 집을 새로 샀다며? 광장에 가까운 제법 괜찮은 집이라던데. 어디에 투자해서 성공한 거야?”
“그래. 우리도 같이 좀 끌어다오. 수익의 1할을 네게 분배해 주마, 응?”
남자들이 은근한 목소리로 제법 살갑게 붙어 왔다.
“남의 돈은 무서워서 안 굴립니다.”
“거참. 야박한 친구구먼.”
“예. 이렇게 야박하게 모아야 대성하거든요.”
단델리온은 어림없다는 듯 칼같이 잘라 내며 산더미처럼 쌓인 곡식들을 가리켰다.
“저따위가 저렇게 태자 전하처럼 막 퍼 주다간 내일쯤엔 굶고 말 겁니다.”
“아, 확실히 이런 일은 내 살면서 처음이긴 하지.”
남자들은 인부들이 나르고 있는 곡식 더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대체 얼마나 가져야 저만큼을 선뜻 내놓을 수 있는 건지, 나 같은 범부는 짐작도 못 하지.”
“얼마만큼 갖고 있든 안 내놓는 사람은 안 내놓죠.”
“그것도 그렇지.”
그러자 그들의 말을 듣고 있던 남자가 크, 하는 감탄사와 함께 말했다.
“돈도 많아, 학식도 깊어, 덕도 높아. 우리 제국이 좋긴 좋아. 전하 같은 분은 또 없을 거라고.”
그가 호들갑을 떨자, 제 동료를 보고 있던 남자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러게. 앞으로의 치세가 이렇게만 가면 좋을 텐데 말이야.”
“들었나? 저기 옆 부서의 콜맨 말이야. 본가 부모님 걱정을 그렇게 하더니 포트령이라 다행히 이번에 식량 지원이 들어갔다고 하더라고.”
“포트령이면 제일 처음 배가 들어갔던 곳 아닌가? 다행이네.”
“그렇지. 나도 가족은 모두 수도에 살고 있어서 그다지 걱정이 없고 말이야.”
“나도 그렇네. 이곳이 정착이 어려워서 그렇지, 정착만 하면 천국이긴 해. 특히 이번 대에는 더더욱 말이야.”
이야기를 듣던 단델리온이 말했다.
“그럼 이야기들 나누시고, 저는 갑니다.”
그가 손 인사와 함께 자리를 뜨자, 남자들도 간단한 인사와 함께 외쳤다.
“그래! 다음에 보자고!”
그들은 앞으로의 무사 평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다시 곡식을 실은 배로 향했다.
“부디 앞으로도 이렇게만 갔으면…….”
* * *
“이렇게만 흘러가서는 안 돼.”
크레센트가 신경질적으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이봐, 클라우디스. 정말 지금 항구에서 나가는 곡식이 전부 형님의 이름으로 나가는 거라고?”
“예. 그렇다고 하더군요.”
“말도 안 돼. 어떻게 저런 게 가능하단 말이야.”
크레센트는 담배를 한 모금 세게 빨아들이고는 한숨을 후, 뱉었다.
“크라이언트가 생각보다 많은 양을 기부한 모양입니다.”
“그러니 크라이언트만 빼 오면 될 일 아니야! 영애는 뭐 다른 말 없었나?”
“어제는 동생의 사고로 정신이 없는 듯했습니다.”
“정신이 없는 것 같으면 네가 일깨워 줬어야지!”
결국 별다른 성과가 없다는 말을 듣게 된 크레센트는 벌컥 짜증을 냈다.
그는 재차 담배를 한 모금 깊게 들이켜고는 말했다.
“후우. 형님 앞에서 일부러 보란 듯이 사냥 약속을 잡아 놨는데 이렇게 물거품이 되는군.”
“죄송합니다.”
클라우디스가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그녀의 상황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겠지. 좋아, 좋게 생각하자고.”
크레센트는 소파에 털썩 앉았다.
“이렇게 된 거 조금 멀리 보는 것도 좋겠지. 크라이언트만 얻으면 확실한 자금줄을 잡는 것이니, 지금 허비한 시간보다 후에 훨씬 많은 시간을 얻을 수 있을 거야.”
조금은 속을 가라앉힌 듯한 그의 말에 클라우디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그때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 그가 입을 열었다.
“아, 그런데 길리언 크렘벨이 찾아왔었습니다.”
“누구를. 너를?”
“아니요. 크라이언트 영애를 말입니다.”
그러자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였는지, 크레센트는 소파에 한껏 기대 누워 있던 몸을 앞으로 당겨 앉았다.
“그건 꽤 흥미가 생기는군. 무슨 일로 갔었지?”
“목적까지 듣지는 못했으나 크라이언트 영애는 더 이상 상대하고 싶지 않아 하는 느낌이었고, 크렘벨 공은 그런 그녀에게 무언가를 따지고 있는 듯했습니다.”
“무언가를 따진다고?”
“예. 그래도 자신은 전남편이라며 그가 소리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의 말을 들은 크레센트가 웃음을 터뜨렸다.
“큭큭, 전남편이면 그냥 전남편이지, 그래도 제가 전남편이라는 건 또 무슨 소리야.”
“무언가 모욕적인 언사를 들은 것이 아닌가 추측합니다.”
“뭐, 그렇겠지. 내 생각엔 그게 또 파고들 만한 여지가 될 것 같은데. 어찌 생각하나?”
“네. 크라이언트는 확실히 크렘벨을 적대하는 중입니다. 그러나 같은 황제파에 속해 있기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같습니다.”
“내 그늘 밑으로 들어오면 크렘벨쯤이야, 얼마든지 냉대해도 좋지.”
크레센트는 툭툭, 담뱃재를 재떨이에 털어 넣었다.
“좋아. 당장에 며칠 일정의 사냥이 무리라면 잠깐 얼굴만 비추는 정도로도 괜찮은 작은 파티 같은 걸 열어 봐. 누구 적당한 사람 없나?”
“찾아서 보고해 드리겠습니다.”
“딱히 이렇다 할 사람이 없으면 그냥 네 혼약자 찾기 파티라도 열어. 알겠나?”
“전하. 그래서는 영애가 오지 않을 겁니다.”
“그럼 가능할 만한 사람을 만들어서라도 데려와야지.”
태연자약하게 명령하는 크레센트의 낯에, 클라우디스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예, 알겠습니다.”
* * *
두툼한 서류철들을 들고 온 모리스가 황태자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
“전하. 치안대에서 올라온 보고서입니다.”
“이리 줘.”
케이든은 묵직한 보고서 하나를 받아 들었다.
“마부들에 대한 탐문 보고서군.”
“예. 그리고 황실 감찰부의 총기 사건 조사에 대한 중간 보고서도 올라온 바 있습니다. 함께 보시겠습니까?”
모리스가 자신이 들고 있는 것들을 들어 보이며 물었다.
“어차피 다 내가 봐야 하는 것들이잖아. 지금 줘.”
“예.”
그는 케이든에게 제가 들고 있던 것들을 건넸다.
“일단 사고 이틀 전까지의 증언은 확보했다고 합니다. 그때까지 마차에서는 별다른 이상 징후가 보이지 않았고, 확인하지 못한 이틀 사이에 마차가 그 지경이 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하더군요.”
“그 이틀이 문제로군.”
케이든이 팔랑, 종이를 넘겼다.
“예. 그에 대해서는 학생 일부를 대상으로 탐문을 마친 상태지만, 이렇다 할 것이 없어 보고서 작성 시점 이후로는 범위를 늘려서 조사를 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그래…….”
보고서를 훑으며 모리스의 말이 사실임을 확인한 케이든은, 읽고 있던 책자를 탁 덮고는 말했다.
“한동안 지켜보다가, 만일 치안대가 전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맨다면 페리윙클과 관련된 이야기를 슬쩍 풀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