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자, 그럼 도장 찍으세요-52화 (52/128)

<52화>

제법 심각한 기색을 풍기던 누이가 갑자기 제 이름을 부르자 엘시어가 움찔하며 대답했다.

“예, 예?”

“너. 그래서 의사가 뭐라고 했니?”

“어…… 그게.”

결국 그냥 넘어가지 않고 다시 물어보시는구나.

엘시어는 누이의 당황이 그리 길지 않았던 것에 깊이 슬퍼했다.

“조금…… 정양이 필요하다고.”

분명히 화를 내시겠지.

그렇게 몸조심하라 당부했는데 오자마자 사고부터 났으니.

“정양이라면 학교를 쉬면 되는 거니?”

“학교를 쉴 필요까지는 없고…… 몸 쓰는 실전 수업만 나가지 않으면 됩니다.”

“그래. 그래서 그 ‘조금’이 대체 어느 정도라던?”

“그…… 대략 한…… 달?”

엘렌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자 엘시어가 다급하게 외쳤다.

“누, 누님!”

“왜.”

“어디 가십니까?”

“내가 의사에게 직접 묻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그런다만.”

“거짓이 아닙니다. 천만다행히도 어디 부러지거나 한 곳은 없으니, 괜찮아질 때까지 무리하지 않게만 주의하라고…….”

엘시어가 제 상태를 축소해 말하는 게 아닐까 의심하고 있던 엘렌은, 그 말에 비로소 의심을 풀고는 다시 스툴에 주저앉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렇다니 다행이구나.”

“예. 저는 그렇지만…….”

엘시어가 메이가 있는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엘렌은 메이를 향해 물었다.

“영애는 보아하니 머리를 다친 것 같은데. 괜찮나요?”

갑작스레 제게 떨어진 질문에 메이가 화들짝 놀라며 답했다.

“네? 네. 다행히 머리는 큰 문제 없어 보인다고…….”

“그거 정말 다행이네요. 손에도 부목을 댄 것을 보니 다치신 모양인데. 의사가 뭐라던가요?”

“아, 손목은…….”

제 손목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그녀는 붕대가 칭칭 감긴 손을 씁쓸한 얼굴로 바라보다 말했다.

“부러진 자리가 손목이라, 직접 살을 갈라서 뼛조각들을 맞춰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세상에.”

엘렌은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그런데 왜 아직 여기에 있죠? 수술은 늦게 해도 상관없는 건가요?”

“…….”

메이가 대답을 하지 못하자, 엘시어가 대신 나서서 말했다.

“그럴 리가요, 누님.”

“그러면?”

“이곳 의사가 자신은 수술 결과를 책임질 수 없대요. 누님.”

엘시어는 굉장히 분한 표정이었다.

“그 어떤 문제가 생기더라도 자신에게 책임이 없다는 각서를 쓰면, 그때는 수술을 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이런…….”

엘렌이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얼굴을 하자, 메이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일단 아버지께서 오시면 말씀드려 보고 결정을 하면 되겠지요.”

“아, 백작께서 오시길 기다리고 계시는군요.”

“예. 그리고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엘시어를 이런 일에 끌어들이게 되어서 정말…….”

“영애가 죄송할 일이 무에 있나요. 애초에 영애가 해결할 수 있는 범위의 일이 아닌 것을.”

엘렌은 메이가 미안한 기색으로 건네는 말을 단칼에 잘랐다.

“마차 관리에 대해서는 아카데미에 정식으로 항의를 하겠습니다. 그에 관련해서 영애께 연락이 갈지도 모르겠군요.”

“그런 것쯤이야 괜찮습니다.”

“황도의 아카데미는 황실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지요. 내가 그에 대해서는 반드시 제대로 조사해 볼 것을 지시해 두겠습니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케이든이 그들을 도와주겠다며 말을 덧붙였다.

“감사합니다. 전하.”

이전에는 없었던 마차 사고.

하지만 과거가 전과 같지 않으니, 흐름이 바뀌며 없던 일이 생기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런데 하필 메이 소르본의 외출에 따라나섰다가 변을 당했다?

페리윙클의 관여가 있었던 것은 아닐지 의심은 충분히 해 볼 만한 상황이었다.

‘정말이라면 가만두지 않을 일이지.’

감히 주제도 모르는 한낱 애송이가.

“영애께서 쾌차하시길 바랄게요.”

엘렌은 쓱쓱, 크라이언트 저의 주소를 적어 메이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우리 가문 주치의가 외과 수술에는 일가견이 있는 사람입니다. 레이첼 이든이라고, 혹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기면 얼마든지 연락 주세요.”

“아……. 감사합니다.”

그녀가 건네주는 종이를 어색한 동작으로 받아 든 메이는, 그것을 한참 쳐다보다가 엘렌에게 물었다.

“저, 크라이언트 영애.”

“네. 말씀하세요.”

“죄송하지만 혹 크라이언트가 주치의에게 진료를 보게 된다면, 비용 문제는 어찌 될는지…….”

메이는 그런 질문을 해야 하는 자신이 수치스러운 듯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아비에 대한 신뢰가 별로 없군.’

하긴. 지참금과 함께 보내야 할 딸을 수술시켜야 하는 것은 손해 보는 장사라 생각할 만한 인물이지.

엘렌은 그런 그녀의 표정을 보지 못한 척 웃으며 말했다.

“내가 월급 주고 있는 우리 가문 주치의예요. 남한테 비용을 치르게 할 생각은 없어요.”

“그, 그렇다니. 하지만……!”

메이는 그것이 너무 과한 친절이라고 여겼는지 당황해서는 얼굴을 더욱 붉혔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뒤에서 문이 벌컥 열리며 한 남자가 들어왔다.

“메이!”

그는 메이 소르본의 친부, 소르본 백작이었다.

가장 늦게 도착한 백작은 들어오자마자 메이의 상태를 살폈다.

“이게 무슨 일이냐. 어디 다친 곳은 없는 게냐?”

그녀의 이곳저곳을 살피던 그는, 이윽고 그녀의 머리카락에 가려져 있던 이마의 붕대와 왼쪽 손목의 부목을 발견하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상처가 제법 되는구나. 의사는 뭐라던?”

“……수술이 필요하다고 해요. 아버지.”

“수술? 칼을 댄다고? 그러면 흉 없이 잘 낫는다고 하던?”

“그건 물어보진 않았지만…….”

메이는 무어라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흉이 남고 안 남고 따위가 문제가 아니었다.

당장 의사는 본인이 장담할 수 없는 수술이라는데, 무사히 왼손을 살릴 수 있을지 없을지부터가 문제였던 것이다.

그녀가 말을 잇지 못하자 대강 좋지 않은 상황임을 눈치챈 백작이 혀를 차며 말했다.

“큰일이구나. 이래서야 너를 어찌 결혼을 시킨단 말이냐.”

“…….”

대화를 듣고 있던 케이든이 계속 멀뚱히 듣고 있기가 신경이 쓰였는지 큼, 헛기침을 했다.

그 소리에 뒤를 돌아본 백작은 비로소 제 뒤에 황태자가 있었음을 알아채고는 넙죽 엎드렸다.

“아이고! 전하를 뵙습니다.”

케이든은 그를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되었습니다. 그보다 영애의 상태가 썩 좋지 않은 듯한데.”

“어찌하겠습니까. 일단 되는 대로 치료는 해 봐야지요.”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난 백작이 메이가 누워 있는 침상을 보았다.

“그러면 우선 의사부터 불러 이야기를 들어 봅시다.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돕도록 하겠으니.”

“감사합니다, 전하.”

그리고 그렇게 갑작스레 불려온 의사는 아무런 예고 없이, 황태자 앞에서 브리핑을 하게 되었다.

“결과에 대해 어떠한 책임도 지우지 않는다는 각서를 쓴다면 수술을 해 준다고 했다고.”

케이든이 묻자, 그는 잔뜩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낯으로 입을 열었다.

“수술을 시도하라 명하시면 시도해 드릴 수는 있지만, 저, 저는 이런 환자를 다뤄 본 경험이 없습니다. 이런 골절의 경우, 조금 더 숙련된 자에게 맡기는 것이 좋습니다.”

이마 한쪽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힌 채로 대답하는 그를, 케이든은 조금 미안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렇군. 갑작스레 이리 불러 미안하네. 그러니까 최선을 다해 시도하겠지만 결과는 능력 바깥의 일이라는 말인가?”

“예. 저는 수도에 있으면서 뼈에 관련된 외상 환자를 수술해 본 일이 없습니다. 이런 건 보통 종군 의사나 평민들을 진료하는 의사가 더 잘 알 겁니다.”

의사의 자세한 설명에 메이와 소르본 백작의 얼굴이 시시각각 굳어졌다.

“그렇군. 알겠네.”

“그럼 그런 의사가 어디 있는지는 추천을 해 줄 수 있나?”

소르본 백작이 다급히 끼어들며 물었다.

“그런 의사라 하시면?”

“현재 진료가 가능한 의사 말이네. 자네가 할 수 없다면 수술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도 소개시켜 주게.”

“글쎄요…….”

의사는 말을 얼버무렸다.

찾고자 하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들 중 현재 당장 수술이 가능할 정도로 가까이에 있는, 그것도 귀족들을 상대해도 될 정도의 최소한의 사회적 지위와 예절을 배운 이가 드물 뿐이었다.

의사는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폴 발렌틴 경을 찾아가십시오.”

“추천할 만한 의사가 그 하나뿐입니까?”

엘렌이 묻자, 그는 애매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그건 아닙니다만…… 그것이 조금.”

엘렌은 그런 그의 망설임을 놓치지 않고 재촉했다.

“발렌틴 경께서 무어라 하실지는 모르는 일이니, 최소한의 대안 하나 정도는 더 말씀해 주시지요.”

“그래. 걸리는 점이 무엇이든 내가 판단하겠네. 그러니 그냥 말해 주게.”

두 사람이 나서서 재촉하자 의사는 어쩔 수 없다는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레이첼 이든이라고, 한 사람이 더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이 친구는 평민의 진료도 보는 사람입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때, 메이가 그 이름이 귀에 익었는지 엘렌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 레이첼 이든이라면 크라이언트의……?”

“네. 저희 가문 주치의죠.”

“이든이 가문의 주치의라면……! 혹 크라이언트 영애십니까?”

굉장히 곤란한 낯으로 서 있던 의사가 갑자기 반색을 하며 그녀를 향해 말했다.

“네? 네. 그렇습니다만.”

“아이고,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이든 부부 밑에서 레이첼과 함께 수학한 그레닉 앨먼이라고 합니다.”

그는 엘렌에게 다가가 악수를 청했다.

“언뜻 이든이 크라이언트의 주치의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그 소문을 이렇게 확인하게 되는군요.”

엘렌은 그 손을 맞잡아 악수를 나누었다.

“아이가 검을 배우니 주치의가 외과에도 능해야겠더라고요. 그런데 그녀에 대한 소문이 워낙에 자자해서요.”

“그래도 그것을 영애께서 알아주실 줄이야. 그 친구도 드디어 앞날이 폈군요.”

앨먼이 마치 제 일처럼 기뻐하며 활짝 웃었다.

그런데 그때 소르본 백작이 탐탁지 않은 얼굴로 끼어들었다.

“그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