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트라이아가의 자선 파티.
보통의 자선 파티는 다소 검소하게 이루어지는 편이었으나, 이번에 트라이아가에서 주최하는 것은 달랐다.
사교 시즌의 연회와 견주어도 손색없는 화려함을 자랑하는 파티장과 사전에 협의라도 된 듯 하나같이 사치스럽기 그지없는 드레스 코드.
그 사이로 오늘 파티의 호스트인 트라이아 공작 부부가 분주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전하. 일찍 오셨군요.”
들어오는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던 공작이 들어오던 크레센트를 발견하고는 외쳤다.
“크라이언트는? 입장했나?”
“아직입니다.”
“그렇군.”
공작은 부인에게 응대를 잠시 맡기고는 크레센트와 함께 자리를 옮겼다.
“잠깐 저쪽으로 가실까요.”
“자리까지 옮기며 할 말이 있나?”
그는 사람들에게서 충분히 멀어진 것을 확인하고는 입을 열었다.
“황태자의 구휼 이야기는 들으셨습니까?”
“아, 그것 말이지.”
크레센트가 피식 웃었다.
“어제 들었지. 내 형이 웬일로 제대로 된 일을 하나 했어.”
“그게 크라이언트가 벌인 일이라는 것도 알고 계십니까?”
“대강 추측만 하고 있었는데, 말하는 것을 보니 확실한가 보군.”
“예. 알아보니 식량의 출처는 벨레니오스였습니다. 해당 영지에서는 이런 기후 변화를 예측하지 못하고 판매를 결정한 듯했습니다.”
“타국일지도 모른단 생각은 했지만, 벨레니오스라. 이렇다 할 접점도 없던 곳인데 의외로군.”
크레센트가 손으로 턱을 매만지며 큭큭 웃었다.
“더 탐이 나는데. 역시 오늘 직접 오길 잘했어.”
“직접 오길 잘하셨다니요. 오늘은 관찰만 하러 오신 것이 아니었습니까?”
“아. 처음엔 그랬는데.”
그는 싸늘한 눈동자를 들어 올리며 웃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변했어. 오늘 확실히 나서야겠다.”
“무언가 생각해 두신 바라도 있으십니까?”
“우리에겐 클라우디스가 있잖아.”
황자의 경쾌한 말에 공작이 뒤에 서 있던 클라우디스를 흘끗 쳐다보았다.
얼굴을 있는 대로 구기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고 있는지 퍽 애매한 표정이었다.
“어쨌든, 그러니 잘 유도해 봐. 우리 앞길이 산 위 비탈길이 되느냐, 평평한 포장도로가 되느냐의 기로가 될 테니.”
공작은 이 이야기를 부인에게도 전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호스트가 먼저 맞이하고 있으면 나는 나중에 가서 눈도장을 찍지.”
“예, 전하.”
“마침 저기 오는군. 나중에 보지.”
멀찍이 입구에서 들어오는 엘렌을 발견한 크레센트는, 그녀를 자연스레 맞이할 수 있는 길목으로 향했다.
* * *
“출장은 달갑지 않지만, 그래도 오늘만큼은 전하 밑에 있어서 다행이다 싶네.”
테리어드가 마차에서 내리는 엘렌의 손을 잡아 주며 말했다.
“너, 원래는 혼자 오려고 했었다며?”
“그게 제일 나은 건 사실이잖아요, 테드.”
그녀가 가볍게 툭 하고 바닥에 착지하자, 테리어드는 그녀의 드레스 자락이 어디에 끼이거나 한 곳은 없는지 뒤를 훑어보며 말했다.
“정확히는 가장 효율적인 거겠지. 네 신변에 가장 나은 건 지금의 이 방법이야.”
“그 주인에 그 신하로군요. 테드도 걱정이 과해요.”
“네가 안전에 불감한 거야.”
엘렌의 차림새까지 꼼꼼히 점검한 테리어드는 팔을 내밀었다.
“들어가자.”
테리어드와 함께 회장에 도착한 엘렌은 주변부터 한 바퀴 스윽 둘러보았다.
“마이어스 백작 부인이로군. 나한테까지는 초대장이 오질 않아 긴가민가했는데, 그냥 나를 빼놓은 거였어.”
“정확히는 태자 전하의 사람들은 빼놓은 거겠지요.”
“아발란쉬 후작은 안 보이는데.”
“네. 아직 오지 않은 모양이에요. 참석을 하지 않을 위인은 아니고…… 조금 늦게 얼굴을 비출 생각인가 보네요.”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엘렌이 입장하자, 파티의 호스트인 공작 부인이 그녀를 발견하고는 외쳤다.
“크라이언트 영애!”
“트라이아 부인.”
그녀의 외침에 주변의 시선이 엘렌이 서 있는 입구로 몰렸다.
엘렌의 차림과 파트너를 훑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그래 봤자 흠결 따위, 찾을 수도 없겠지만.’
엘렌은 그 시선들을 유유히 받아쳤다.
공작 부인은 종종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와 줘서 고마워요. 체셔 경께서도 오셨군요.”
“안녕하십니까, 트라이아 공작 부인. 초대받지 못한 자리에 발을 들이게 되어 이거 참…… 조금 민망하군요.”
“행사를 급히 기획하느라 미처 신경 쓰지 못해 미안해요. 하지만 이렇게 자리를 빛내러 와 주셨으니, 제가 감사를 드리지요.”
그러자 테리어드의 얼굴이 팍 찌그러졌다.
신경을 못 쓴 게 아니라 안 쓴 거겠지.
그가 하는 생각이 그대로 얼굴에 보였던 탓에, 엘렌은 서둘러 끼어들어 말했다.
“부인, 아니에요. 이리 뜻깊은 자리를 만드는 것이 어디 보통 일이던가요.”
엘렌이 쑥스러운 듯 웃으며 그녀를 감싸자, 공작 부인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영애는 이전에 약속한 바가 있어서 가장 먼저 챙겼지요. 난 한 번 말한 것을 지키기를 좋아한답니다.”
“어머. 벌써 몇 주는 되어 가는 일인데. 그걸 기억하고 이리 불러 주시다니 너무 감사한걸요.”
“아니에요. 부디 내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군요.”
그렇게 인사치레를 나누는데, 멀찍이서 다른 손님들을 응대하고 있던 공작이 그들이 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다가오기 시작했다.
묵직한 발소리에 뒤를 돌아본 공작 부인은, 공작이 다가오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의 팔을 잡아 자신의 옆으로 끌고 와서는 말했다.
“내 남편이에요. 얼굴은 본 적 있죠?”
갑작스레 끌려온 공작은 제 붙잡힌 팔을 내려다봤다가, 헛기침을 한 번 한 뒤 입을 열었다.
“큼. 흠.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영애의 데뷔탕트 이후 처음이로군. 재밌게 즐기다 가게. 물론 체셔 경도.”
“예. 감사합니다. 공작 각하.”
“……배려 감사드립니다. 공작.”
호스트 역할을 바꾸기로 한 모양인지, 트라이아 부인은 공작에게 눈짓을 남긴 뒤 엘렌에게 팔짱을 끼며 그녀를 이끌었다.
“영애. 그럼 우린 가 볼까요? 후원함은 이쪽이랍니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엘렌의 퇴로를 막으며 파티장의 한가운데로 향했다.
아발란쉬가 보이지 않았던 탓에 행보를 정하지 못했던 탓이었다.
‘생각보다 노골적이네.’
이러다가 휩쓸려서 순 귀족파 인물들만 만나다 갈 수도 있겠는데.
얼떨결에 선수를 빼앗긴 테리어드가 다급하게 그들의 뒤를 쫓아왔다.
“영애. 후원금은 어찌 충분히 준비하셨나요?”
“그럼요. 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성의로 준비했답니다.”
엘렌은 자신이 들고 있는 클러치를 가볍게 들어 보이며 미소 지었다.
“그렇군요. 그 마음을 모두가 알면 영애를 더욱 높이 사지 않을 수가 없을 거예요.”
기대해도 좋답니다. 공작 부인이 후후 웃으며 말했다.
“그럼 올라가 볼까요?”
단숨에 단상까지 다다른 공작 부인은 엘렌을 이끌고 낮은 계단을 올랐다.
그녀는 가벼운 손뼉과 함께 사람들의 주의를 끌었다.
“여러분!”
짝짝!
홀에 울리는 박수 소리에, 무리 지어 이야기 나누고 있던 사람들이 그들이 있는 곳을 돌아보았다.
“제가 특별히 초대한 손님이에요. 크라이언트가에서도 오늘의 행사에 뜻을 더해 주기 위해 오셨답니다. 다들 박수로 맞아 주세요.”
호스트가 주도하는 환호에 사람들은 눈치를 보며 박수를 쳤다.
“그럼 후원금을.”
공작 부인의 신호에 엘렌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며 들고 온 클러치를 열었다.
클러치 속에서 작은 책을 꺼낸 그녀는, 그 위에 무어라 끼적인 뒤 종이를 한 장 툭 찢어 냈다.
그것을 후원함 앞을 지키고 있던 이에게 건네자,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공작 부인이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오늘 이곳에 참석해 주신 여러분들께서는 백성의 어려움에 선행을 베풀 줄 아는 진정한 위정자들이십니다. 여러분들의 후원금은 꼭 의미 있는 일에, 모두를 위해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금액을 공개해 볼까요?”
호스트의 말에 수표를 받아 든 이가 금액을 확인하고는 쩌렁하게 외쳤다.
“크라이언트가의 후원금은, 일, 십, 백, 천, 만, 십만, 백만! 총 삼백만 골드입니다!”
삼백만 골드?
삼백만 골드라고?
사람들의 턱이 일제히 빠지기라도 한 듯 사위가 고요해졌다.
트라이아 부인이 놀란 눈으로 손을 들어 입가를 가렸다.
“세상에. 태자 전하와 함께 백성들의 구휼에도 나서셨다고 들었는데. 정말 대단하군요!”
언뜻 보기엔 순수한 감탄 같은 말이었다.
하지만 방금 그녀가 언급한 이야기는 엘렌이 한 일을 자신이 이미 알고 있음을 어필하는 말이었다.
게다가 그 사실을 굳이 외부에 밝힘으로써 그녀의 몸값을 대신 올려 주겠다는, 일종의 호의를 베풀고 있다는 신호인 것이다.
‘저기까지 벌써 알아내고 이렇게 무대를 꾸며 준 건가.’
엘렌은 예상보다 공작가의 태도가 노골적이었던 이유가 이것이었음을 직감했다.
그녀는 기품 있게 두 손을 다소곳이 모으고 말했다.
“아니에요. 저는 황제 폐하의 은혜로 새 삶을 얻은 것이나 다름없고, 그것을 한낱 금전으로 갚는 것에 불과하답니다. 모든 것은 황제 폐하의 은덕이시지요.”
“어쩜 겸손하기까지. 크라이언트가의 후원금, 꼭 의미 있는 곳에 쓰도록 할게요.”
공작 부인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야말로 헉 소리 나는 금액에 대부분은 혀를 내둘렀고, 몇몇은 저것이 진짜 크라이언트가의 수표인지 수표에 찍힌 도장을 확인해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니냐며 수군거렸다.
하지만 막대한 재력을 다시금 눈앞에서 확인하고 만 사람들은 은근히 수군대기만 할 뿐, 그녀의 앞에서 의혹을 제기하지는 못했다.
묘하게 주눅이 든 사람들은 뒤늦게 저희끼리만 웅성대기 시작했고, 공작 부인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외쳤다.
“그럼, 다들 잔을.”
그녀가 말하자 파티장을 분주하게 채워 놓고 있던 사용인들이 서둘러 술을 날랐다.
다른 이들의 잔이 모두 채워지고, 사람들이 하나둘씩 잔을 들어 올리자 공작 부인이 건배사를 읊었다.
“이스타지오의 영광을 위하여.”
잔들이 일시에 높이 들리고, 준비된 악단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공작 부인은 엘렌에게 가까이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 호의가 잘 전달되었길 바라요.”
“……그럼요. 감사합니다, 부인.”
재미있네. 당분간은 좀 친하게 지내볼까.
엘렌은 잔을 기울이며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