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분주했던 태자궁의 오후가 지나 마침내 약속한 시간이 되었다.
케이든은 직접 그녀를 에스코트하기 위해 일부러 정문까지 마중을 나갔다.
먼 곳에서부터 천천히 오던 크라이언트가의 마차가 태자궁의 정문에 멈춰 섰다.
케이든은 마차의 문 앞으로 다가갔다.
마부가 마부석에서 내려 마차의 문을 열자, 케이든은 엘렌에게 눈웃음과 함께 인사를 건넸다.
“시간에 딱 맞춰 왔군요. 오느라 고생했습니다.”
케이든이 제 손을 내밀고, 엘렌은 그의 손을 잡고 내리며 말했다.
“이리 급박하게 연락드리게 되어 죄송합니다. 전하.”
“괜찮습니다. 그렇게 급박하게 초대장을 보낸 쪽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니까.”
그의 대답에 엘렌은 의외라는 듯 살짝 커진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알고 계셨군요? 설마 전하께까지도 초대장이 갔나요?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오지는 않았지요. 그냥 내가 소식에 밝은 거지.”
엘렌이 새삼스럽다는 어조로 감탄을 흘렸다.
“역시 계승권이 있는 황족은 다들 나름의 복심을 갖추고 있다는 걸까요.”
“뭐, 그런 셈이지요. 어쨌든 어서 들어갑시다. 나도 슬슬 속이 허한 참이니까.”
케이든은 그녀를 미리 준비해 둔 후원의 만찬장으로 안내했다.
어슴푸레 져 가는 해, 명장이 만든 등 속에 일렁이는 주홍빛 촛불, 그 빛을 반사하는 은식기들.
태자궁 후원에 마련된 만찬장은 제법 아름답다 할 만했다.
“어머, 예뻐라. 태자궁의 시종장이 실력이 좋군요.”
“그가 실력이 좋은 것도 있지만 내가 신경을 쓴 것도 있지요.”
케이든이 은근슬쩍 제 공을 끼워 넣자, 엘렌은 실없이 웃으며 그를 나무랐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그리 인사치레를 하시는지요?”
케이든이 눈치를 보며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트라이아의 자선 파티. 꼭 갈 필요가 있습니까?”
“예?”
“나는 그대의 신분이 안정되기까지 조금 더 시간을 두었으면 좋겠습니다. 너무 섣불리 각축장에 발을 들이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 돼요.”
그러자 엘렌이 별소릴 다 한다는 듯 웃었다.
“그 각축장이야말로 제 무대죠, 전하.”
“그대가 그리 녹록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나도 잘 알지만…….”
“아시면서 그러십니까.”
“하지만 다들 그대에게 눈독을 들일 것 아닙니까.”
케이든이 조금 억울하다는 듯 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 적진에 왜 굳이 일부러 들어갑니까. 적당히 피할 수 있는 것은 피하면 좋지 않습니까.”
“전하. 저도 다른 이들을 눈독 들이러 가는 거랍니다. 일단 이번 목표는 아발란쉬 후작에게 자연스럽게 접근하는 것이지요.”
“아발란쉬는 분명 따로 방책이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굳이 온 기회를 차 버릴 필요도 없잖아요?”
“…….”
그 말에는 할 말이 없었는지 케이든의 입이 잠시 다물렸다.
그의 눈동자가 오른쪽 밑과 왼쪽 밑을 한 번씩 훑었다.
“그러면.”
“……?”
“나도 같이 갑시다. 내가 파트너로 참석하지요.”
“오, 전하.”
맙소사. 엘렌은 관자놀이를 짚었다.
“안 됩니다. 전하께서 같이 가신다면 어마어마한 경계심을 사게 될 거예요.”
“그만큼 해코지당할 위험은 덜지 않습니까.”
“대신 전하께서 함께 노출되시겠지요!”
엘렌이 답답해서는 작게 소리쳤다.
“나 같은 불청객이 오리라고 그네들이 예상이나 했을까. 외려 초대받은 영애가 더 문제 아닙니까.”
“보자마자 신나서 무슨 짓을 할지 어찌 압니까. 정 그러시면 따로 참석하시지요. 전 절대 함께 갈 생각이 없으니까요.”
“나한테는 초대장이 안 왔는데?”
“그 신분으로 밀고 들어가면 누가 막겠습니까.”
“그야 그렇지만…….”
그는 무의식적으로 긍정하다, 그녀의 페이스에 말려들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외쳤다.
“아니, 영애는 은근히 막무가내적인 기질이 있습니다?”
“그게 더 효과적일 때도 있으니까요. 어쨌든 안 되는 건 안 됩니다.”
“젠장.”
결국 케이든은 낮게 욕을 읊조렸다.
“전하께서는 전하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신경 쓰셔야지요. 오늘 같은 태도는 전하께 좋지 않습니다.”
“내 안위에 필요한 귀한 사람을 귀히 취급하는 겁니다. 그대가 앞으로의 일의 핵심이 될 자임을 나라고 모를 것 같습니까?”
그는 답답하다는 듯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 퉁명스레 말했다.
“좋아. 그렇다면 파트너로 체셔 경은 어떻습니까? 어릴 적부터 친분이 있는 사이 아닙니까.”
“전하. 가능하면 혼자 가는 게 가장―”
“내가 안 되는 이유는 알겠고, 그래서 체셔 경으로 타협했습니다. 일부러 파트너도 없이 갈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애먼 것들만 좋아하게.”
엘렌은 그의 참견이 슬슬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내 목덜미 근처에 매달려 있는 묵직한 무게에,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이 반지를 생각하면 저런 태도도 이상하지 않지.
“……알겠어요. 테드에게 물어볼게요.”
그녀가 마지못해 답하자, 그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듯 재깍 입을 열었다.
“아니, 임무로 보낼 거니까 안 물어봐도 됩니다. 가라면 가야지.”
“세상에. 이런 악덕이.”
“그러라고 녹봉 받는 겁니다. 무리한 요구도 아니고 근처 잠시 출장 보내는 건데.”
“어련하시겠습니까.”
케이든의 당당한 태도에 엘렌은 고개를 저었다.
* * *
“바로크 후작이 찾아왔다고.”
제 외조부의 방문 소식에 크레센트가 인상을 확 찌푸렸다.
“이유는 뭐라지?”
“저라고 알겠습니까.”
“……네가 가서 응대해.”
크레센트는 듣기만 해도 혐오스럽다는 듯 잔뜩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
“저보다 외손자를 더욱 아끼시는 분 아닙니까.”
“끔찍하군.”
“직접 오실 정도면 무언가 일이 있는 거겠지요. 정말 제가 혼자 갑니까?”
“……하, 뭘 기대하고 오는 건지.”
그가 짜증스럽게 숨을 내뱉었다.
“뭐 하지? 어서 가지 않고.”
원래도 고압적인 편이었지만, 지금의 크레센트는 제대로 짜증이 났는지 아주 신경질적이었다.
클라우디스는 제 사촌의 뒤를 따르며 혀를 찼다.
황자도 퍽 피곤하겠군.
크레센트는 제 내면의 신경질이 일절 드러나지 않는 가볍고 유려한 걸음새로 응접실을 향했다.
그가 오길 기다리고 있던 바로크 후작이 일어서며 인사를 올렸다.
“전하. 갑자기 찾아뵈어 죄송합니다.”
“됐고. 무슨 일이지?”
크레센트는 들어오자마자 자리에 앉지도 않고 용건부터 물었다.
그 탓에 후작 또한 앉지 못한 채 서서 보고를 이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깊이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문제가 생겼습니다. 아무래도 이번 크렘벨 이혼 건이 너무 쉬이 종결되었다 했더니, 크라이언트와 황태자 간에 모종의 거래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거래라면?”
“황태자의 이름으로 엄청난 양의 곡식 지원이 시작됐습니다.”
크레센트는 와락 얼굴을 구겼다.
“곡식이라. 그런 건 언제 어디서 구한 거지?”
“아직 알아보는 중입니다.”
“그렇군.”
그는 앞에 놓인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소파에 기대 고개를 젖힌 그는 손바닥으로 제 눈가를 덮었다.
“……그래도 다행 아닌가. 가뭄으로 나라가 휘청이는가 했더니, 어떻게 살아날 구석은 나오는군.”
“전하. 그것은 조금 틀립니다.”
바로크 후작의 부정에 크레센트가 손을 내리며 고개를 들었다.
“무엇이 틀리다는 거지?”
“지원은 어디까지나 세율을 황제의 초기 요구만큼 낮춘 곳에 한정되었습니다.”
“뭐?”
“조세 부담을 조금이나마 덜어 주기 위해 협조적인 영지들을 우선적으로 구제해 준다고 했다고 합니다.”
“사실상 제 사람들만 챙기겠다는 거군. 영악해.”
크레센트가 하, 하는 소리와 함께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덕분에 영지민들의 원성과 동요가 상당하다고 합니다. 몇몇 영지는 앞으로 어떻게 될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고도.”
“그 자금이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왔을 리는 없고……. 이혼이 성립되자마자 시작되는 지원이라니, 확실히 크라이언트가 뒷배였겠군.”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 대답에 크레센트는 싸늘한 눈빛으로 제 외조부를 노려보았다.
“조금 더 빨리 정보를 얻었다면 크라이언트와 손을 잡는 것은 우리가 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송구합니다. 하지만 크렘벨로 인해 그들의 결속이 느슨해진 것은 사실이니…….”
“그러니 노력해야지 않겠습니까, 후작.”
“…….”
크레센트의 지적에 후작은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말했다.
“그래서 그녀의 혼처로 클라우디스를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흠. 새 혼처라.”
“조부님?”
뒤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클라우디스가 당황해 반문했다.
“나쁘지 않지.”
“전하.”
클라우디스가 급히 크레센트를 불렀지만, 그는 대답 대신 말을 이어 갔다.
“이따 저녁의 자선 파티. 클라우디스를 데려가지.”
“예. 알겠습니다.”
“용건이 끝났으면 난 가 보겠어.”
“들어가십시오.”
후작은 제 외손자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고, 크레센트는 곧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클라우디스는 제 사촌이자 주군인 크레센트의 뒤를 급히 쫓아 나갔다.
“전하. 전 아직 결혼 생각이―”
“어차피 너나 나나 그런 거 따지면서 결혼 못 해. 뻔히 알면서 그러는군.”
“전하께서 조부님의 편을 들어 주실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요.”
“후작의 편이 아니라 내게 이득이 되는 방향을 고른 거지.”
“전하.”
클라우디스가 빠른 걸음으로 크레센트의 바로 옆까지 쫓아가며 그를 불렀다.
크레센트가 별일이라는 듯 그를 흘낏 보며 말했다.
“나이 좀 먹고부터는 이러는 일 없더니. 어지간히 급하긴 한가 보지?”
“급할 뿐입니까. 제 혼사가 이렇게 갑작스레 결정되다니요.”
“원래 인생이 생각한 대로 흘러가진 않아. 생각한 대로만 됐으면 벌써 내 이복형제는 이 세상을 떴겠군.”
“……오, 제발. 크레센트.”
“친구 놀이 할 때는 지났어, 바로크 경.”
기어오르는 것을 봐주는 것은 한 번뿐이라는 듯, 크레센트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결정 사항이다. 일부러 어깃장을 놨다간 저 천한 후작의 타깃이 누가 될지, 그거나 잘 생각해 보라고.”
클라우디스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예.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