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먼저 제가 떠난 이후로 회장의 정리는 어떻게 되었는지, 조사는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를 말씀해 주시면 좋겠군요.”
“아. 그렇지요. 일전의 총기 발포 사건에 사용된 화약과 카트리지, 총까지 모두 발견했습니다.”
케이든은 엘렌에게 휘말려 얼떨결에 보고를 시작했다.
“물론 범인은 무사히 도망쳤는데…… 후우. 다시 생각해도 정말, 정말 무모했습니다. 내가 범인을 놓치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지를 생각하면…….”
“후후, 그건 감사드립니다. 그래도 그만큼 자작극과는 멀어 보일 테니, 전하께서는 보다 안전해지실 겁니다.”
엘렌이 부드럽게 웃으며 상황을 넘기자, 케이든은 더 이상 말하길 포기하고는 보고를 이었다.
“됐습니다. 어쨌든 여기서 수집한 증거들의 분석 결과, 당연하게도 일단 화약은 황실에서 허가한 물품이 아니었습니다. 배합률이 달라 곧바로 들통이 났고, 그것이 이전에 분석을 맡겼던 것과 같은 조합이라는 것까지 결과를 내놓은 상태입니다.”
케이든은 책상으로 걸어가 쌓여 있는 보고서들을 뒤적였다.
“카트리지와 총의 경우 제작 방식을 보고 유추해야 하는지라, 황실 내의 전문가만으로 조사를 진행하기가 어려워 타 영지들의 협력을 구해 놓은 상태입니다.”
“저희 영지에도 보내셨나요?”
“그렇지요. 일단 포트가와…… 아, 여기 있군요.”
그가 종이 더미 사이에서 한 묶음으로 처리되어 있는 서류 뭉치를 빼냈다.
“당분간 화약 제조 시설 자체는 멈추더라도, 제조해 둔 화약을 모두 폐기 처분할 생각은 못할 겁니다. 길리언이 반란을 준비하고 있다면 황실의 감시를 벗어난 화약이 반드시 필요할 테니.”
“이제부터는 정말 정보력 싸움이 되겠군요.”
“그런 셈이지요.”
한 번 눈으로 스윽 서류를 훑은 엘렌은 그것을 잘 갈무리해 넣으며 말했다.
“저는 이 사건을 근거로 해 이혼을 재차 요구할 생각입니다.”
“암살의 배후로 크렘벨을 확실히 지목할 생각입니까?”
“예. 그러니 여기에서 황실의 역할이 중요해집니다.”
“내가 무엇을 하면 됩니까?”
“황실에서는 중간에 적당히 중재하는 척 끼어들어 주시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반역에 관한 확증을 얻기 전까지는 공후 회의 때문에라도 크렘벨을 쳐 낼 수 없으니까요.”
“그건……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저 또한 그랬을 테니까요. 어쨌든 그러니 황실에서는, 크렘벨에게 우호적인 제스처를 확실히 취하는 동시에 이혼을 추진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래서야 크렘벨을 약화시킨다는 계획은…….”
“맞습니다. 크라이언트를 빼앗는 대신 다른 걸 쥐여 줘서야 이 행동이 의미가 없죠. 그러니 이렇게 하는 겁니다.”
엘렌이 생각만 해도 즐겁다는 듯 활짝 웃어 보였다.
“아주 재미있는 방법이 있답니다.”
길게 이어진 엘렌의 이야기를 들은 케이든이 얼떨떨한 얼굴로 말했다.
“과연 그대이기에 낼 수 있는 안이라고는 생각하지만…… 그게 정말입니까?”
“제가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하긴. 그대는 말을 안 해서 문제지 거짓을 말한 적은 없지요.”
“어머, 생각보다 전하께서는 지나간 일을 오래 담아 두시는 편이셨군요.”
엘렌이 싱긋 웃으며 대꾸하자, 케이든이 눈을 흘겼다.
“오래 기억에 남을 만큼 큰일들이라서 그렇습니다.”
“조금 더 담대한 군주가 되어 주시길. 어쨌든 이 문제는 전하께서 알아서 해 주시리라 믿겠습니다.”
엘렌이 당부하자, 그는 깊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말했다.
“……그래야지 별수 있습니까. 이제는 정말 용건이 끝났으면 이만 들어가서 쉬지요. 아직 그대는 회복이 필요합니다.”
“아니요. 아직 남았답니다.”
“아직도 남았습니까?”
“예. 이게 마지막입니다.”
그녀의 말에 케이든이 무언가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이야기하지요.”
“전하. 제 방 배정에 아주 큰 문제가 있었음은 자각하고 계십니까?”
“아.”
그는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감탄사를 뱉더니, 곧 굉장히 미안하다는 낯으로 말했다.
“미안합니다. 역시 오랫동안 쓰지 않던 방이라 불편하지요. 내 당장 이야기해 두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처음에 내 방이 가장 크고 넓어 이야기를 꺼내기는 했는데, 다들 한사코―”
“아니요, 아니요. 그게 아닙니다.”
그가 하는 말을 듣고 있던 엘렌이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부정했다.
“아닙니까?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이 있다면 편히 이야기해도 됩니다. 지금 바로―”
“아닙니다, 전하. 그게 아니에요.”
자신이 하려는 말의 근처조차 가지 못하는 그를 보며 엘렌은 제 머리를 짚었다.
“……그 방이 대대로 태자비들께서 태자궁에 묵으실 때 쓰셨던 방이었다 들었습니다.”
“그렇지요.”
“전하.”
엘렌은 그가 더는 헛소리를 할 수 없도록 곧장 말을 이었다.
“제가 반지까지는 그러려니 했습니다. 그건 드러내지 않으면 그만인, 우리끼리 나눈 약속의 징표에 불과하니까요.”
“확실히…… 그건 공개 여부를 그대에게 결정하라 건넨 게 맞습니다.”
“예. 감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엔 아닙니다. 태자비의 방이라니요? 생전 여자를 들이는 법이 없던 황태자가 처음으로, 그것도 하필 태자비의 방을 골라 들인 게 유부녀라니. 심지어 그 유부녀는 황태자의 종수입니다, 전하.”
“종수이기 때문에 괜찮은 겁니다.”
“전하. 그들은 분명히 전하의 여성 취향이나 도덕관념을 두고―”
“머리에 똥이 차지 않은 이상은 제 종형제 부부를 아끼는 황태자라 할 겁니다.”
“그 똥 찬 놈들이 태반인 게 이곳입니다! 게다가 회장에서 길리언과는 대립각을 세우셨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똥 찬 놈들은 내가 그대를 그저 그렇게 대했다면 어찌 저리 매정하냐며 인륜이 없다 깎아내렸을 놈들이고!”
엘렌의 소리가 높아지자 케이든도 똑같이 목소리를 높여 소리쳤다.
“…….”
그 말에 엘렌은 할 말을 잃었다.
‘어떤 태도를 취했어도 그들은 자신을 헐뜯었을 것이다’.
확실히 그 말은 일리가 있었다. 그들은 충분히 그럴 법한 작자들이었다.
“영애, 그대는 확실히 유능합니다. 정보와 정보 사이에서 다른 정보를 읽어 내는 능력은 정말 발군이지요.”
그는 커다란 손바닥으로 제 눈가를 가리며 한숨을 쉬었다.
“사람들과의 대화를 이끌어 가는 능력도 그렇습니다. 정신을 차려 보면 나도 휘둘리고 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요. 하지만 적어도 저 똥 찬 놈들의 심리는, 그대보다는 내가 더 잘 알 겁니다. 난 태어나는 순간부터 저런 것들하고 싸워 왔으니까!”
말하다 보니 다시금 감정이 끓어올랐는지 그의 목소리가 다시 조금 높아졌다.
“그리고 그런 놈들의 입방아가 무서워서 내 사람을 홀대하는 건, 적어도 내 방식은 아닙니다.”
아.
손가락 끝까지 긴장감이 배어 있던 엘렌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자신은 또 길리언과 같은 방식으로 일을 판단하고 있었다.
“아니면…… 혹시 그런 이야기가 그대에게 향할까, 그것이 걱정됩니까?”
엘렌이 한참 동안 대답하지 않자 케이든이 조심스러운 어조로 물어 왔다.
“그들은 언제나 누군가의 험담을 합니다. 아마 그대의 요구대로 하면, 그대는 남편에게도, 그 친우에게마저도 외면받는 이라 구설수에 올랐겠지요. 하지만 확실히 소문의 성질이 다른 것은 맞습니다. 나는 어차피 들을 말들이면 몸이라도 편한 게 낫다 생각한 거지만, 영애가 생각하기에―”
“……아니요. 제가 전하의 방식을 이제야 조금 이해한 것 같습니다.”
깨달은 이상 그를 더는 불편하게 만들 필요가 없었다.
“분명 저에 대한 이야기도 함께 나올 것이라고는 생각합니다. 줄을 갈아탄 여자라고들 떠들어 대겠죠.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니 별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 물론 그 건방진 행동에 대한 보복은 할 테지만요.”
“그것참 대단한 담력입니다.”
“이 정도 담력이 없으면 이 나이에 이런 자리에 못 있습니다.”
“지금 나 따라 한 겁니까?”
“글쎄요.”
엘렌이 가볍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대에게 미칠 화가 두려워서라면 지금이라도 당장 요구하는 곳으로 방을 바꿔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계속 그곳에 머무는 게 좋겠습니다.”
“그러겠습니다. 제가 아직 이런 것에 익숙지 않군요.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원래 알아 가는 과정이란 그런 것이라고, 옛날에 모후께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렇군요.”
“나는 그보다, 영애가 정말 괜찮아서 그리 대답한 것인지가 신경이 쓰입니다.”
“물론이지요. 이제 할 말은 하고 살기로 했답니다. 게다가 적당한 빌미를 주는 건 나중에 좋은 명분으로 돌아오는 일이 많아서요. 오히려 기대가 되는군요.”
엘렌은 그리 말하며 활짝 웃었다.
* * *
엘시어는 걱정에 한숨을 쉬었다.
누이는 잘 있을까.
오늘도 아카데미 기숙사에 있는 그의 우편함에는 쓸데없는 소식만이 가득했다.
기다리고 있는 것은 누이에 관한 소식인데, 그에 대해서는 모두 약속이나 한 듯이 그저 조용하기만 했다.
소년은 올라오는 조바심에 괜히 방 안을 서성였다.
‘아니야. 이런 때일수록 정신을 더욱 차려야 해.’
어차피 자신이 이곳에서 걱정이나 한다고 해결되는 일은 없었다.
엘시어는 누이와 약속한 바를 지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오늘도 학내 공원으로 향했다.
아침 일곱 시, 여자 기숙사 근처의 공원.
그곳에는 체력을 단련하겠다는 명목으로 나와 있는 한 여학생이 있었다.
“오늘도 왔네?”
“여기가 사람도 없고 조용해서 좋더라고.”
“후우. 나 같으면 귀찮아서 여기까지 안 올걸. 남학생 기숙사 쪽이 더 크고 좋잖아.”
한숨과 함께 대답한 그녀의 이름은 메이 소르본.
엘렌이 알아볼 것을 당부한 사건의 당사자다.
메이는 다리를 풀고 있는 중이었다.
엘시어도 근처로 가 자리를 잡았다.
“그나저나 부지런하네. 올 때마다 먼저 와 있어.”
“나오긴 네가 더 빨리 나왔을걸? 나야 코앞이니 일찍 도착했을 뿐이지.”
자연스레 자리를 잡는 모습만 보면 그들은 마치 서로 오래 알아 온 친구 사이 같았다.
하지만 제대로 통성명을 한 지는 이제 고작 일주일.
각자 나름 유명세를 타던 이들이었던 탓에, 서로 갖고 있던 미묘한 내적 친밀감이 크게 작용했다.
메이가 먼저 스트레칭을 끝냈다.
그녀가 자리를 뜨려는 것을 알아챈 엘시어가 말했다.
“잠시만.”
허리를 숙이고 있던 엘시어가 벌떡 일어났다.
메이가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자, 엘시어는 서둘러 손목과 발목을 한 번 털어 주고는 슬며시 웃어 보였다.
“혼자 뛰면 재미가 없잖아. 가자.”
그는 혹시 딴소리가 나올세라 서둘러 발걸음을 떼었다.
탁, 탁, 탁, 탁.
고요한 새벽의 공원에 두 사람의 규칙적인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적당히 힘이 실린 발걸음이 만드는 경쾌한 리듬.
땅을 박차는 걸음은 가벼웠고, 새벽의 공기는 시원했다.
“엘시어.”
“왜?”
엘시어의 반문에 메이는 잠시 망설였다.
몇 번 입술을 달싹이던 그녀는 곧 마음을 먹었는지 입을 열었다.
“……나와 같이 있는 모습을 되도록 보이지 않는 편이 좋을 거야.”
그 조용한 공간을 가르고, 담담한 목소리가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