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전하.”
“왜 그러나.”
시종장의 잔소리가 터질 것을 직감한 케이든이 퉁명스레 말했다.
“이래 봬도 이 늙은이가 전하의 세 배는 살았습니다. 지혜도 전하의 세 배만큼은 있지요.”
“아직 덜 됐지. 기껏해야 두 배 반이야.”
“어쨌든 전하보다는 많습니다.”
시종장의 뚝심 있는 주장에 케이든이 눈을 흘겼다.
그런데 평소 같으면 적당히 눈을 피했을 시종장이 오늘은 그를 마주 보며 말하는 것이 아닌가.
“전하. 방법을 모르실 때는 주변에 기대서라도 돌파구를 찾는 것이 낫지 않으시겠습니까?”
“……자네는 돌파구를 알까?”
“일단 문제를 들어 봐야지요.”
케이든은 고민했다.
말할까, 말까.
확실히 누군가에게 기대서라도 바른길을 찾아보아야 할 때였다.
그래. 밑져야 본전이지.
“……난 영애가 사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아. 위험 속에는 서슴없이, 방법이 있다면 제 몸이야 상관 않고 시도하려는 그 태도가.”
한 번 말문이 트이자 케이든은 제 속내를 훌훌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래서 화를 내 버렸네. 사는 방식이라는 게 참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란 건 알아. 내가 사과하는 게 깔끔하게 해결하는 방법인 것도 알지. 하지만…… 그리하고 싶지가 않아.”
그는 깊은 한숨과 함께 눈을 감고 의자에 기댔다.
“지금 묵인하면, 저 여자는 분명 또다시 제 목숨을 내놓고 위험천만하게 뛰어다닐 거야. 그렇다고 내가 옳다고 주장할 수도 없어. 그랬다가―”
그가 쉬이 떨어지지 않는지 입술을 한 번 달싹였다.
“그랬다가…… 만약, 내가 쓸모없어졌다며 나를 버리면.”
그러면 언제가 되었든 내 결말은 죽음뿐이겠지.
케이든의 손이 붙잡을 것을 찾는 듯 주먹을 쥐었다.
시종장이 주름이 팬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확신이 없으신 게로군요.”
“애초에 그런 걸 갖고 지낸 날은 없었어.”
그가 퉁명스레 내뱉었다.
“사람의 속도가 어찌 다 같겠습니까. 정 답답하시면 전하께서 영애를 당겨 주시지요. 금방 따라오실 겁니다.”
“……당기라 함은?”
“솔직히 표현하시는 것밖에 더 있겠습니까.”
시종장이 허허 웃자, 케이든이 팽 토라져서는 말했다.
“그냥 솔직히 말하는 것뿐이라면 이미 했네. 아주 진창 화를 내고 왔다니까.”
“아이고. 화만 내셔서 문제가 해결되겠습니까? 전하께서 바라시는 바도 함께 제시를 해 주셔야지요. 화만 내서야 그저 밀어내는 것밖에 더 되겠습니까.”
“…….”
“걱정이 된다, 앞으로는 그런 행동은 삼가 달라, 정 필요하다면 내게 꼭 의논해 달라. 제게는 전하의 말씀이 이리 들렸습니다.”
“……자네가 나이를 헛먹지는 않았군그래.”
“전하의 두 배 반이니 말입니다.”
그리 말하며 미소 짓는 시종장의 얼굴은 정말 믿을 수 없게도, 그의 아버지와 아주 닮아 있었다.
“그럼 크라이언트 영애께 연락을 넣을까요?”
“자네가 말한 대로 하면 내가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을까?”
케이든의 질문에 시종장은 그것참 보기 드문 우문을 들었다는 듯 낄낄 웃으며 말했다.
“거야 전하께서 하시기 나름인 것을, 제게 물으셔서야 쓰겠습니까?”
“이보게, 자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그가 무어라 더 소리칠세라, 시종장은 잽싸게 바깥으로 내뺐다.
* * *
똑똑.
가벼운 노크 소리와 함께 케이든이 기다리던 이가 도착했다.
숙이는 고개를 따라 연한 빛의 실타래가 흘러내렸다.
“전하를 뵙습니다.”
휠체어에 앉은 탓에 평소보다 훌쩍 내려간 눈높이.
그 시각적 차이에 그녀가 환자라는 사실이 피부에 와 닿은 케이든은, 엘렌의 앞에 다리를 구부리고 앉으며 물었다.
“그간…… 잘 지냈습니까?”
“신경 써 주신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아픈 곳은?”
“괜찮습니다.”
엘렌의 대답은 담백했다.
그 담담한 목소리에, 케이든의 가슴 한구석에서 사르르 이상한 울렁임이 일었다.
언제나 이렇게 괜찮다고만 해 왔을 것이다.
가장 가까워야 할 남편이 저를 그리 대하니, 하물며 남에 불과한 자신이 저를 걱정하고 있었을 줄은 몰랐을 것이다.
‘……이 생각을 어떻게 이해시켜야 할까.’
언제나 필요한 장기짝으로 있을 테니, 사실 믿음 정도는 어찌 되어도 상관없다 말하는 네게.
“전하.”
엘렌의 나긋한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닿았다.
“영애. 미안하지만 내가 먼저 말할 수 있게 해 주겠습니까?”
그녀가 무어라 선고를 하기 전에 솔직한 속내를 전해야 했다.
케이든이 비장한 얼굴로 묻자, 엘렌은 조금 어리둥절한 낯으로 그러라 했다.
그가 한 번 심호흡을 한 뒤 입을 열었다.
“먼저…… 미안합니다.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아픈 사람에게 그리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는데.”
케이든이 고개를 숙이며 시선을 내리자, 엘렌이 조금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닙니다. 제가 전하의 의중을 너무 몰라 드렸던 것도 사실인 것을요. 외려 제가 사과드려야 할 일이지요.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그런 방식을 선호한다는 게 잘못은 아니지요. 다만…….”
말을 늘이던 케이든의 시선이 잠시 허공을 헤맸다.
그러나 곧 무언가를 결심했는지, 그는 그녀의 정면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우린 이제 동업자입니다. 서로에 대한 무한한 신뢰는 없을지라도, 같은 이해관계를 공유하고 있는.”
“…….”
“사실 진즉 이렇게 말을 전하고 싶었는데. 어찌 전해야 할지 몰라서 그간 피했습니다. 미안합니다.”
“그랬군요.”
차분하게 나온 엘렌의 대답은 마치 그의 말을 수긍하는 듯했다.
하지만 지나치게 가라앉은 어조에, 왠지 불안해진 케이든은 빠르게 말을 이었다.
“기다리게 한 것은 정말 미안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영애가 조금 더 자신을 아끼길 바란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쿵. 쿵.
들릴 리 없는 심장 소리가 귓가를 어지럽혔다.
“……가능하면, 동업자와의 이해관계를 믿고 조금 더 나은 방법을 찾아 주었으면 합니다.”
조금 더 나은 방법?
그의 말을 듣던 엘렌은 의문이 들었다.
“전하께선 어찌하여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제 방법이 효율적이지 못하다 여기십니까?”
엘렌이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는 듯 묻자, 케이든은 그녀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잠시간 침묵하던 그는, 이윽고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난 길리언과 같은 사람이 아니고 그러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대는 능력이 있고 중요하며, 충분히 존중받아야 하는 사람이지요. 그러니 그만큼 안전해야 합니다. 난 더 이상 내 사람들을 잃고 싶지 않습니다.”
뜸을 들였던 만큼 아슬아슬 넘실거리던 말들이 그에게서 흘러나왔다.
“그대의 방식이 틀리다는 게 아닙니다. 분명 내 방식보다는 효율적이겠지요. 하지만 가능하다면 그대가 안전하길 바라는 내 방식도 고려해 달라는…… 그런 부탁인 겁니다.”
“아.”
엘렌이 짧은 감탄사를 뱉었다.
그녀는 그제야 깨달았다.
그러게.
언제부터 나는 길리언 때문에 내 안전까지도 내던지는 사람이 됐지?
‘……내 사랑하는 사람들이 행복해지길 바라서 시작한 일이었는데.’
일은 분명 성공적이었다.
그런데 황태자는 별로 만족스러워하는 것 같지가 않았다.
‘그건, 이게 틀린 방법이었다는 이야기지.’
자신은 언제나 증명해 왔어야 했다.
항상 논하는 것은 결과뿐이었다.
더 빠르고, 더 좋은 결과.
그것을 위해 그는, 그리고 저는 자신이 깎여 나가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틀렸던 거다.
결과뿐만 아니라 거기에 이르기까지 있었던 모든 선택, 과정들이 전부 틀렸던 거다.
오래 써 온 바늘이 부러진 것으로도 마음이 허한 것이 사람이다.
체스판 위의 장기짝이라 한들, 남의 것보다는 내 것이 더 아픈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니 아마 아버지와 엘, 그리고 스위니와 테드, 제가 사랑하는 모든 이 또한 황태자와 같거나 그보다 더한 정도의 슬픔과 무력감을 느꼈을 것이다.
자신을 던져 길리언을 없애고 그 앞에 평탄한 미래를 깔아 준들, 함께하지 않는다면 어떤 식으로든 슬픔이 남기 마련이니.
‘……이래서야 길리언 하나를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지던 그 시절의 나와 달라진 것이 없어.’
화르르 타오르는 불꽃이 순식간에 사그라지는 것처럼, 엘렌이 조용해졌다.
그녀는 결론을 내렸다.
이건, 앞으로 그와 함께하며 자신이 배워 가야 할 또 다른 숙제라고.
“……사실, 조금 당혹스럽긴 했습니다. 전하께서 화를 내실 줄은 정말 생각도 못했던지라.”
엘렌은 조금 어색한 얼굴로 제 입가를 매만지며 말했다.
여과 없이 진심을 드러내려니 평소처럼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유지하기가 영 쉽지 않았다.
“하지만 전하께서 그리 말씀해 주셔서, 저는 기뻤습니다. 비록 전하께서 제 예상을 벗어났을지라도.”
양손으로 다른 도형을 그리는 일처럼, 거짓된 표정과 진실한 말이 함께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분명 그랬다.
얼떨떨하고 당혹스러웠지만, 누군가가 본인의 이익보다 자신의 안전을 더욱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은 기쁜 일이었다.
“전하의 방법과 제 방법은 확실히 다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잘 조율해 나간다면, 우리는 충분히 좋은 동료가 될 수 있겠지요.”
엘렌은 그 말과 함께 진심으로 활짝 웃어 보였다.
봄을 녹여 낸 듯 화사하게 피어나는 생기와 그동안 단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미소.
그것은 지나치게 눈부셨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일을 벌이기 전 반드시 먼저 전하께 의논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함께 더 좋은 방법을 찾아보죠.”
그러자 케이든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빈말로도 하지 않겠다는 소리는 않는 것이 참 그대답습니다.”
그것도 어떤 의미로는 참 대단하다며, 케이든이 혀를 내둘렀다.
무거웠던 분위기가 한결 가벼워지자 엘렌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걱정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썩 기분이 괜찮은 일이었던지라.”
“그래요. 서로 미안한 이야기는 그만합시다. 내가 그대의 계획이 어그러지지 않도록 잘 보조하면 그만이니.”
“잘 생각하셨습니다.”
자신만만하게 웃어 보이는 엘렌의 낯이 걱정했던 것보다는 밝아, 케이든이 한시름을 놓았을 때였다.
“그러면 이제 그간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좀 나눠 볼까요?”
“이야기라 하면……?”
이야기할 게 아직 남았다고?
케이든이 의아하게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