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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도장 찍으세요-7화 (7/128)

<7화>

“영애. 마음에 둔 영식이나 이후 재혼에 대한 로망이 있나?”

“……그런 건 없습니다. 저와 가문을 위해 살아갈 생각입니다.”

엘렌은 다른 여지를 남기지 않기 위해 확실히 대답했다.

혼인이라니.

이혼의 수단으로 또 다른 구속이 될지도 모르는 혼인을 이용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케이든은 그녀가 그리 말할 줄 알았다는 듯, 당황은커녕 준비된 말을 뱉는 연사처럼 낯빛 하나 바꾸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아이가 필요한 황후의 좌는 어렵지만, 후궁쯤이야 문제없지. 혼인만큼 확실한 연결 고리도 없지 않나. 그러니 길리언도 그리했던 것이겠지만.”

“…….”

“잘 생각해. 그대는 공작 부인에서 백작 영애로 신분이 내려가며 겪을 일을 겪지 않아도 되지. 그대가 궁 밖에서 지내고 싶다고 한다면 그 또한 얼마든지 가능하다. 무엇보다 충신의 여식과 황가의 일원에 대한 보호는 차원이 다를 수밖에 없지.”

긴 설득.

언젠가 명예와 자신을 맞바꾸었던, 열여섯의 소녀가 저를 설득하기 위해 했던 생각들.

엘렌의 머릿속으로 옛 기억들이 스쳤다.

“그대가 냉정하게 생각한다면 영애, 이것이 서로에게 해가 되기보다 더 크게 득이 될 제안임을 알 수 있을 거다.”

말을 꺼내는 케이든은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흡사 그녀가 받아들일 것이라 확신하고 있는 것처럼 비춰질 정도였다.

확실히 서로의 필요에는 아주 잘 맞아 떨어지는 제안이었다.

다만 엘렌 스스로 심리적 거부감을 조금 느끼는 내용이라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일 뿐.

“……그래요, 혼인 또한 계약의 일종.”

그녀는 언제나 짓던 관성적인 미소를 입가에 띠었다.

“좋습니다. 거래가 성립되었으니 만족하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전하.”

사라진 시간 속에서 수도 없이 쌓아 올렸던, 깊은 인내를 담은 미소.

그 미소를 본 케이든의 얼굴이 미묘하게 굳었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찰나로, 그도 이내 마주 웃으며 말했다.

“좋습니다, 영애. 나도 최선을 다하지요.”

* * *

처음 엘렌이 그 호텔에서 황태자를 마주쳤을 때 떠올렸던 생각은, ‘이 사람을 이용할 수 있겠구나’였다.

그는 다정하고 순하며, 백성들을 진심으로 위할 줄 아는 사람이니까.

그러나 그렇기에 최후의 순간 친우이자 충신이라 믿었던 사촌에게 배신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 관계 사이에 자신이 들어간다면 어떻게 될까?

길리언과 황태자 사이에 의심을 피워 내고, 그들 사이를 갈라 그 자리에 자신이 들어간다면.

이 시점의 길리언은 그녀에게 반역에 관한 그 어떤 것도 알려 주지 않은 상태였다.

크라이언트가 필요했지만, 그녀가 모든 것을 알고도 자신을 등지지 않을 것이라고는 확신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굳이 누명을 씌워 처형을 시킨 것을 보면, 아마 직접적으로 반역을 도운 이후로도.

어쨌든 그런 이유로, 그녀가 무슨 짓을 해도 길리언은 제 밑천이 어디서 털리고 있는 것인지 짐작조차 못할 가능성이 컸다.

고로 황태자가 많은 것을 해 줄 필요는 없었다.

그저 그녀의 말에 따라 움직여 줄 정도면 된다.

그러니 처음은 의심으로 충분했다.

의심은 원인을 찾게 만들 것이고, 곧 그녀의 조력을 필요로 하게 만들 것이다.

그렇게 한두 번 필요에 의해 찾다 보면, 호감도는 어떨지 몰라도 의지하는 것은 금방이다.

호감과 신뢰는 별개이니.

‘……물론 이렇게 사람이 달라져서 올 줄은 몰랐지만.’

아주 과감하고 공격적인, 그야말로 다른 사람이 되어서 왔다.

그래도 명색이 황권 다툼에서 살아남았던 황자이니만큼 분명히 숨겨 둔 한 수 정도는 있을 법했는데.

자신이 그를 너무 과소평가했다.

‘뭐, 그래도 예상과 달랐다 뿐이지 나쁘진 않아. 여러모로 훨씬 수월해지겠지.’

어쨌든 무사히 그와 한배를 탔으니, 그것으로 되었다.

“계약이 성사되었으니, 이제는 제가 선금을 치러야 할 차례로군요.”

엘렌은 그가 흥미를 보일 정도로 수상한, 그러나 일이 잘못되어도 길리언에게 바로 보고가 올라가지는 않을 소소한 시설들을 머릿속으로 추려 보았다.

그러자 그녀가 정보를 선별 중이라는 것을 눈치챘는지, 케이든이 은근슬쩍 그녀에게 협상을 걸어왔다.

“가능하다면 그 선금, 최대한 많은 정보로 치렀으면 하는데. 어떻습니까?”

“어머, 전하. 저도 밑천이라는 게 있어야지요.”

구렁이 담 넘듯 나온 케이든의 말에 엘렌이 싱긋 웃으며 받아쳤다.

“그나저나 전하. 제게는 편히 말씀하시지요. 한 번 그런 모습을 뵙고 나니 적응이 어렵습니다.”

“아, 너무 익숙해지면 그건 그것대로 곤란해서. 여우들을 속여 넘기려면 항상 포장이 진짜 내 거죽인 것처럼 두르고 살아야 하니.”

그가 슬쩍 웃는 눈으로 제 뺨을 톡톡 두드렸다.

저 얼굴로 저리 얄밉게 보이는 것도 가능하구나.

엘렌은 기왕 포장을 덮어쓰는 김에 입에 담는 내용도 조금쯤은 포장을 함이 어떨는지, 라고 되받아쳐 주고 싶은 것을 참았다.

“먼저…… 황제 직할령인 이곳 수도 이스타잔에서는, 어스름의 만찬이라는 가게를 찾아보세요. 그곳에서부터 시작하시면 또 다른 것이 잡히실 겁니다.”

“어스름의 만찬?”

그녀가 꺼낼 말에 집중하고 있던 케이든이 제가 들은 상호를 곧장 되뇌며 말꼬리를 올렸다.

“예. 저번에 제가 모셨던 곳과 비슷한 곳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후 무슨 조사를 어떻게 하실 것인지에 대해서는 제 입김이 닿지 않는 것이 좋겠지요.”

눈이 마주치자 케이든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음, 그래요. 구황 작물을 미리 사 두시는 게 좋을 겁니다. 아, 물 저장 상태도 확인하시는 것이 좋을 테고요. 가능하다면 병충해에 대처할 수 있는 인력까지 확보할 수 있으면 좋겠군요.”

“구황 작물과 물이라? 가뭄이라도 예상하시나 봅니다, 영애는.”

그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아무래도 듣기에 좋지 않은 이야기라 그런 듯했다.

“예. 아직은 3월이니 아직 체감하지 못하셨을 수도 있겠지만, 올해는 평년에 비해 날이 건조하고 덥습니다. 겨울이 비교적 견딜 만하지 않으셨습니까? 아니면 봄이 빨리 찾아온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거나.”

그의 경험을 묻는 엘렌의 말에, 케이든은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확실히…… 지난겨울은 그리 혹독하지 않았지요. 올해는 날이 빨리 풀렸다는 것 역시 체감하고 있습니다.”

“이전의 기록들을 찾아보세요. 이런 해는 흉년이 들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용수의 부족과 감당할 수 없는 병충해의 위험이 높고, 저는 그 가능성을 아주 높게 치고 있지요.”

케이든이 턱을 괴고 있던 손가락으로 제 관자놀이를 몇 번 툭툭 치더니, 그의 뒤에 서 있던 코엔하임 경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은 그녀의 눈치를 보며 무언가를 속닥이다, 이야기가 정리되었는지 다시 각자의 자리로 돌아왔다.

“우선 그대의 지식에는 가능하다면 박수라도 쳐 주고 싶은데…… 일단 그대의 말이 맞다 쳐 보겠습니다. 하지만 그 예산은 어디서 빼 온단 말입니까? 애초에 그런 큰 사업을 이렇게 갑작스레 진행시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케이든이 조금 난처해하며 의논 결과를 읊었다.

그러나 정작 그런 그의 말을 들은 엘렌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별 감흥 없는 얼굴로 한마디를 툭 뱉었다.

“그런 것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니, 한 영지도 아니고 제국 전체에서 지원 사업을 벌이려면…….”

“전하.”

엘렌이 푹 한숨을 쉬며 그를 불렀다.

케이든도 하던 말을 멈추고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차마 뭐라고 하지는 못하겠는데 무척 답답하다는 낯이었다.

“그러니 크라이언트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크라이언트와 제국 단위의 지원 사업이…….”

“그러니까, 제국 단위로, 크라이언트가.”

그리고 그쯤 되어서야 비로소 그녀의 말을 제대로 인식한 케이든은, 입을 서서히 벌리더니 종내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말했다.

“그대가…… 도와주겠다고?”

“이제야 바로 들으셨습니다.”

엘렌은 대견하다는 듯 작게 짝짝 박수를 쳤다.

그러고는 아까 그가 한 것과 똑같이 제 뺨을 톡톡 두드려 보이며 말했다.

“그리고 포장은 가능하면 예쁘게 하시지요.”

그러자 순식간에 케이든의 얼굴이 벌게졌다.

그것이 당황인지 민망함인지는 모를 일이었지만, 어쨌든 한 방 먹인 것 같다는 생각에 엘렌은 내심 만족해서는 옆으로 고개를 돌려 말했다.

“그러니 아버지. 딸을 믿고 한 번만 투자해 보세요. 사용한 금액은 최대한 메워 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음…… 빠르면 이번 사교 시즌 안에요.”

다니엘은 그런 두 사람을 반쯤 멍한 상태로 보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는 대답했다.

“응? 아, 그래. 그리하마. 구체적인 것은 나중에 마저 이야기하자꾸나.”

그는 이 상황이 아직 얼떨떨한지 연신 제 뺨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전하. 전하께서는 엘렌의 말을 의심 마시고 편히 말씀하시지요. 전하의 면전입니다. 제가 어찌 감히 허튼소리로 입을 놀리겠습니까.”

그리고 이 상황이 얼떨떨하긴 마찬가지였던 모양인지, 붉어진 얼굴을 뒤늦게 수습한 케이든이 한두 번 헛기침을 하고는 대답했다.

“고맙습니다, 크라이언트 백. 오늘 영애를 찾아온 내 선택이 아주 적절했던 듯싶군요.”

“미욱한 제게서 이런 딸이 나왔다는 데 항상 감사하며 살고 있지요.”

다니엘이 딸 자랑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말하자 케이든이 피식 웃었다.

“전하께서는 아둔한 분이 아니시니까요. 언제가 되었든 저희는 손을 잡게 되었을 겁니다.”

그러나 이어 나온 엘렌의 말에 그녀를 떨떠름하게 쳐다보다, 무어라 말을 잇기를 포기했는지 조용히 대화를 정리했다.

“……부디 우리의 거래가 성공적이길 바랍니다.”

“저 또한 그리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엘렌은 진심으로 바랐다.

부디 성공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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