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크라이언트 백작, 다니엘 크라이언트는 곧바로 공작가에 띄울 편지를 썼다.
요점을 추리자면 ‘딸의 무례를 바로잡기 위해 가문 내에서 교육을 다시 하겠다, 미안하다.’라는 내용의 편지였다.
눈 가리고 아웅에 불과했지만, 이 정도면 다음 행동을 위한 잠깐의 시간 정도는 벌 수 있을 것이다.
오찬을 함께한 부녀는 오래간만에 근황을 나누었다.
“아버지, 엘시어는 어때요?”
“네 동생 말이냐? 말도 마라. 뭔 놈의 애들을 그리 쥐어패고 다니는지 아주 화병이 나겠더구나.”
“후후, 아카데미에서 또 무언가 편지가 날아왔나 보군요.”
아무렇지도 않게 가족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 시간이 엘렌은 너무나도 소중했다.
옛날에는 나이 차 나는 동생이 귀찮기 그지없다고 생각했던 그녀였으나, 지금 아버지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이 순간에는 그 어렸던 동생이 사무치게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엘렌은 다니엘에게 끊임없이 이런저런 근황들을 물어 댔고, 다니엘은 그런 딸의 모습에 올라오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일일이 답을 해 주었다.
그런 식사 자리가 끝나 가고 있을 즈음이었다.
똑똑똑.
바깥에서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의아한 얼굴의 부녀는 서로 눈을 마주쳤다.
“……찾아올 만한 이가 있는 게냐?”
다니엘의 긴장한 물음에 엘렌은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말했다.
“공작, 아니면 황태자. 둘 중 하나겠지요.”
그녀는 짧은 대답만을 남기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무슨 일인가.”
투숙객의 허락이 떨어지자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급사는 제가 가져온 소식을 전했다.
“자신을 케이라 밝히신 신사께서, 이곳에 크라이언트 백께서 계신다면 만나 뵙고자 한다고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 말에 엘렌은 제 아비를 흘끗 보고는 대답했다.
“무례가 되지 않는다면 이리 모시고 싶다 전해라.”
그녀의 말에 급사는 고개를 숙이고는 허겁지겁 내려갔다.
“생각보다 황태자는 성미가 급하군요.”
여느 때 같았으면 다니엘이 주의를 주었을 만한 언행이었다.
하지만 평소와 달리 지금 그는 조용했다.
언젠가 정말로 황태자를 만날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었지만, 그것이 지금 당장일 줄은 그도 몰랐던 것이다.
* * *
정오도 되기 전, 이른 아침의 황궁.
케이든은 결심했다.
“……역시 나가야겠다.”
그는 자리를 벌떡 박차고 일어나 성큼성큼 걸었다.
돌아온 그의 수족, 갈까마귀가 전한 소식은 이러했다.
먼저 엘렌 크렘벨에 대한 조사.
일단 공작저에서는 사용인들의 대거 물갈이가 있었다고 했다.
갈까마귀는 아마 크렘벨 부인의 이혼 요구로 인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이리된 것이 아니겠냐고 추측했다.
케이든 또한 동의했다.
이 시점에 갑자기 사용인들이 물갈이될 이유는 자신이 생각해도 그것뿐이었다.
그리고 다음으로 전한 이야기는 일전의 도박장에 대한 것이었다.
그곳은 들어선 지 약 2년 정도 되었으며, 이미 다수의 피해자가 생긴 곳이라고.
그러나 총수가 누구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고 했다.
케이든은 알았으니 이만 돌아가라며 축객령을 내렸고, 갈까마귀는 그에게 섣불리 움직이지 말 것을 당부했다.
갈까마귀가 사라지고, 혼자 남게 되자 케이든의 화려한 욕설이 시작됐다.
이런 젠장, 제기랄, 빌어먹을…….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그자에게 얼마나 황실이 우습게 보였을지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케이든은 베일 속의 상대가 누구인지 반드시 밝혀내리라 다짐하며 속으로 또다시 욕설을 지껄였다.
그런데 그렇게 한참 씩씩대고 있자니, 정말 묘한 의심이 떠오르는 것이다.
어떻게 작정하고 조사를 시작한 갈까마귀의 눈도 피한 곳을 한낱 아녀자가 알고 있었을까.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어쩌면 정말로 크렘벨이…….’
그렇게 의문은 의문을 낳았다.
도박장, 크렘벨, 크렘벨 부인.
자꾸 생각이 그 사이를 맴돌았고, 그러다 보면 자신은 어느새 그날의 그녀를 계속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물론 원인이 그것 하나만은 아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크렘벨 부인이 그렇게 이상하리만치 다른 사람처럼 변해 버렸는가.
그것 또한 그에게 묘한 찝찝함을 남겼다.
제 부군을 쫓던 소녀인 줄만 알았더니 단 몇 달 사이에 대담하기 짝이 없는 도박사가 되어 왔다.
이렇게나 이상하고 신경이 쓰이니, 당최 그날 이후로 머릿속에서 그 여자가 떠나질 않는 것이다.
그런고로 케이든은 생각했다.
어차피 당장에 확인된 것은 없고, 단서를 가진 사람은 지척에 있다.
그렇다면 직접 가서 추궁할밖에.
케이든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그의 뒤를 따르던 시종장이 통곡하며 말했다.
“아이고 전하! 폐하께서 아신다면 분명 진노하실 겁니다! 진짜로 제 목이 떨어진다니까요!”
“부황께서 그 정도로 인정머리 없으신 분은 아니시네. 자네는 어서 가 코엔하임 경이나 불러오지.”
코엔하임은 그의 외조모의 가문으로, 그에게 있어서는 현재 쓸 수 있는 최선의 패였다.
“그냥 공식적으로 출궁하시지요!”
“안 돼. 그런 성격의 일이 아니다.”
케이든은 그렇게 제 용건만 내뱉고는 또 냉큼 황궁 탈출에 나섰다.
불쑥 찾아온 시종장에게 끌려 나와 걸어가는 내내 신세 한탄을 들어야 했던 코엔하임 경은, 곧바로 입이 무거운 제 친우인 체셔에게 연통을 넣었다.
물론 그것은 체셔 경에게는 때 아닌 호출일 뿐이었으므로, 잔뜩 심통이 난 그는 오자마자 코엔하임 경을 향해 온갖 욕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랬던 체셔 경은 변복을 한 채 황궁 밖에 나와 있는 황태자를 보자마자 입을 닥쳤다.
“제발 돌아가시지요.”
기사들의 청은 간곡했으나, 황태자의 고막은 그 면상만큼이나 두꺼웠다.
즉, 듣지 않았다.
“크라이언트가 이곳에 있다면 내가 만나 보고자 한다고 전해라.”
그렇게 그는 오늘도 당당하게 무단 외출을 감행했다.
* * *
두 기사와 시종장을 비롯하여 모든 황성 경비들의 목숨 줄을 쥐고 있는 황태자의 발걸음이 도달한 곳은 한 여인의 앞이었다.
조용한 방 안.
그 침묵을 깨고 엘렌이 물었다.
“제게 용무라니. 무슨 일이신지요?”
그러자 황태자가 크라이언트 백작과 제 호위 기사들이 있는 곳을 눈짓하며 물었다.
“여기서 말해도 됩니까?”
“전 괜찮습니다.”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나를 도와 일해 볼 생각이 없습니까?”
그 뚝 떨어진 소리가 조용한 가운데를 맴돌았다.
소파에 앉아 있는 부녀를 지나, 맞은편에 어깨를 부딪치며 나란히 서 있는 덩치 큰 기사 둘 사이로.
햇빛 아래에서 유독 청명하게 빛나는 푸른 눈동자와 엘렌의 눈이 마주쳤다.
“그러니까, 전하. 제가 지금 들은 것이…….”
“나를 도와 내 곁에서 일해 볼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예상치 못한 물음에, 엘렌은 이 상황을 두고 좋아해야 할지 싫어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졌다.
그녀는 일단 질문을 던졌다.
“그 ‘일’이란 것은 정확히 무엇을 두고 하신 말씀이신지요?”
“별것 아닙니다. 그저 지난번처럼 그대가 아는 정보들을 내게 풀어 주었으면 하는 것이지요.”
잘그락, 엘렌이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울렸다.
“그런 정보…… 그대는 분명히 또 가지고 있을 텐데. 그렇지요?”
그녀가 대답하지 않아도 황태자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엘렌은 대답 대신 물었다.
“정보라. 전하께서는 저를 믿으실 수 있으신 모양입니다.”
“그대가 보여 주는 것이 어떤 의도를 가진 정보든 간에, 난 그런 불법이 성도에서 자행되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신뢰와 별개로 제가 필요하다는 말씀으로 이해했습니다. 제가 틀렸는지요?”
“틀리지 않았습니다. 다만…….”
피식. 그의 잇새에서 가볍게 바람이 샜다.
평소 그가 보이던 친절함과는 거리가 먼 웃음이었다.
“그렇다면 나도 묻지요.”
조금 거칠어 보이는 입술이 떨어졌다.
그리고 그 입에서 나온 말은, 그녀의 예상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어차피 이게 목적이었잖아.”
“……!”
“내가 틀렸습니까, 영애?”
태연하게 핵심을 찔러 들어오는 그의 말에, 엘렌은 아주 조금 진심으로 놀라고 말았다.
이렇게 갑자기 치고 들어오다니.
“그대가 필요해 찾았다. 그대도 내가 필요해 그리한 게 아니었나? 나를 움직여서 하고 싶은 게 있었잖아. 그렇지?”
황태자가 느른하게 웃으며 물었다.
이런 사람이 그 길리언에게는 뒤를 내주고 죽음을 맞이했다고?
그녀가 알던 황태자는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항상 엷은 미소를 띤 낯을 하고 있던 이.
언제나 겉돌던 그녀를, 장난스럽게 대하며 제 가족이라 해 주었던 사람.
하지만 어쩌면 그간 자신이 알고 있었던 이는 눈앞의 남자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엘렌은 생각했다.
“그럼 이렇게 된 것 바로 본론을 이야기하지.”
그가 아주 명료하게, 마치 쐐기를 박아 넣듯 말했다.
“그대가 내게 원하는 게 있겠지. 주겠다. 대신 그대가 내게 주어야 할 것은…….”
다정한 온기를 띠고 있다 생각했던 눈동자가, 적을 가늠하는 날카로운 예기를 품고 그녀를 옭아매었다.
“바로, 그대야.”
“……예?”
엘렌은 당황했다.
나를? 나를 달라고? 무슨 소리지?
“생각해 봤는데, 내가 이 나라의 황태자인 이상 내게는 선택지가 없더군. 눈앞에 굴러다니는 단서를 멀쩡히 내팽개쳐 두기엔 너무 아깝지 않나.”
“그러니까, 저를 감시하에 두시겠다는……?”
“어감은 나쁘지만 그리 이해해도 틀리진 않지.”
케이든은 그녀의 말을 부정하지도 않고 태연히 말했다.
‘이것 봐라, 항상 순한 얼굴로 웃고만 다니더니…….’
그게 다 가면이었다 이거지.
정말 의외의 면모가 있었다.
한편으로는 기가 차기도 했다.
“성격이 제가 그간 알아 온 것과는 많이…… 다르십니다.”
“그건 내가 그대에게 하고 싶은 말이야. 그리고 그 정도 과단성조차 갖추지 못하면 이 나이 먹도록 이 자리에 못 앉아 있지. 그래서 함께할 건가, 말 건가?”
케이든은 제 마음이 이미 확고하다는 뜻을 온몸으로 내비치고 있었다.
엘렌은 잠시 고민했다.
‘정말 지금 내게 무언가를 추궁할 생각은 없는 건가?’
그가 궁금해할 만한 것들은 많았다.
이를테면 그녀는 대체 어떻게 그런 은밀한 비밀을 알았는지.
혹은 그녀가 하는 말이 진짜일지, 진짜라면 이혼을 결심한 이유는 무엇인지.
왜 제게 그 모든 것을 알려 주었는지.
황족이라면 보통 돌다리를 두들겨 보다 못해 남더러 먼저 건너게 한 뒤에야 비로소 제 한 발자국을 떼는 법이다.
그러나 지금 이 남자는 그럴 생각 따위가 전혀 없는 듯했다.
동공이 선명한 눈동자가 엘렌을 향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전하, 제 요구 사항은 한 가지입니다.”
“말하지.”
“저와 제 가족의 안위를 보장해 주십시오.”
“당연한 것을 말하는군.”
“그리고 크렘벨과의 이혼을 도와주십시오.”
“그것 말인데, 그리 결심한 이유가 있나?”
“직접 보셨을 텐데요.”
엘렌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저는 그래야만 가문의 안위가 보장된다고 판단한 거랍니다. 그러니 저는 전하께서 필요로 하시는 자금과 정보의 지원을 얼마든지 해 드리겠습니다.”
“그래……. 이혼은 그렇다 치고. 그보다 내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나 보군. 난 분명 대가는 그대라고 말했는데.”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물론 전하께서도―”
“아니, 그게 아니라.”
그는 가볍게 손을 내젓더니 말했다.
“난 그대에게 혼인을 제안한 거야.”
“……예?”
“전하!”
그의 뒤에 서 있던 체셔 경이 놀라 소리쳤다.
눈을 홉뜬 것은 코엔하임 경과 크라이언트 백작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의 말을 제대로 이해했던 자는, 말을 뱉은 장본인인 그뿐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