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 barefaced - 뻔뻔스러운, 낯짝이 두꺼운 (1)
194.
***
영국.
행복한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한창이던 오후 무렵.
한 신문사에 올라온 사진 하나가 큰 이슈를 끌었다.
엘리자베스 여왕과 함께 일가친척들이 성당을 향해 걸어가는 모습이었다.
로열패밀리가 크리스마스를 맞이해 함께 성당을 찾는 건 매년 보는 연례행사.
특별할 것 없는 이 사진이 유독 이슈가 된 건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 번째.
조지 왕세손의 왕실 행사 참가.
이단아, 말썽꾸러기, 영국 왕실의 문젯거리로 치부되던 조지 왕세손의 왕실 행사 참여는 대중들의 큰 관심을 끌었다.
햇수로만 따져도 수십 년 동안 가족 행사를 피했던 조지 학회장이었기에 자연스럽게 세간의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토록 대면을 피했던 할머니와의 분위기마저 좋았기에 각 언론사는 앞다퉈 기사로 다뤘다.
[조지 왕세손, 20년 만의 가족 나들이]
[심경의 변화 있나? 달라진 로열패밀리의 분위기, 그 이유는?]
정확한 이유야 알 수 없었지만 대중들은 안도했다.
비로소 다 모인 가족의 풍경만큼 영국인들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주는 모습도 없었으니까.
조지 학회장의 가족 행사 참여.
그러나 정작 이 사진이 이슈가 된 건 두 번째 이유였다.
바로 엘리자베스 여왕과 손을 잡고 성당으로 걸어가는 어린 손녀의 모습.
지극히 평범한 사진이었지만 사람들의 눈길을 끈 건 바로 어린 손녀가 품에 안고 있는 동화책이었다.
여백이 많은 표지.
서양에선 흔히 보기 힘든 그림체.
엘리자베스 여왕이 직접 고른 선물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사람들의 이목이 낯선 동화책 한 권에 쏠렸다.
특히 동화책을 바라보는 행복한 아이의 표정이 이슈가 되었다.
-얼마나 마음에 들면 성당에 가는데도 품에서 놓질 않는 거지?
-대체 저 책이 뭔데?
몇몇 누리꾼은 사진을 확대해 표지 속 제목을 찾아내기도 했다.
-도둑고양이 네로? 새로 나온 책인가?
˪얼마 전에 부커상을 수상한 한국 작가의 책이야.
˪뮤지컬 「거장의 숨결」의 작가이기도 하지.
-뭐? 저게 권서준 작가 책이라고?
˪맞아. 차기작은 동화라고 하더군.
˪대박. 구매처가 어디야?
˪크리스마스 연휴 기간이라 인터넷으로 사야 할걸?
책의 정체가 권서준 작가의 차기작이라는 소식에 관심이 폭발했다.
베네딕트가 출연 중인 뮤지컬의 작가이자 부커상 수상을 통해 작품성까지 인정받은 천재 작가에 대한 관심은 그야말로 엄청났다.
기사가 이슈가 되고 불과 3시간도 되지 않아 전국 서점가에선 품절 대란이 일어날 정도.
이 소식은 아내와 함께 크리스마스 휴가를 즐기는 올리버 편집장에게도 전달되었다.
-편집장님, 이거 대박입니다. 여기저기서 재고를 확보하고 싶다는 연락이 빗발치고 있어요!
「당신이 머물던 자리에」 작품에 이어 연달아 터진 흥행에 피어슨 출판사의 분위기도 한껏 달아올랐다.
결국 반나절도 되지 않아 서점가에 진열된 책은 모두 동난 상태.
크리스마스 휴가 중임에도 정신없이 쏟아지는 인터넷 주문에 올리버 편집장은 행복한 비명을 질렀다.
이 소식을 들은 피어슨 출판사 존 대표도 서둘러 올리버 편집장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이봐, 올리버 편집장.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휴가 기간엔 절대 업무적인 일을 하지 않은 게 암묵적인 예의였지만 이번만큼은 예외였다.
상기된 존 대표의 목소리에 올리버 편집장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간다.
“보고 받으신 대로입니다. 인쇄소를 총가동하고 있는데도 물량이 부족한 상태입니다.”
-하아. 정말 말이 안 나오는군. 권 작가가 우리한테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인가?
올리버 편집장이 미소를 짓더니 이내 말을 잇는다.
“그런 셈이죠. 이대로라면 새로운 신화를 쓸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오만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근거 있는 자신감이었다.
‘마침 크리스마스와 연말 시즌까지 이어져 판매량이 폭발하고 있으니까.’
행복함을 만끽하던 올리버 편집장은 존 대표와의 통화가 끝나자마자 다시 휴대폰을 들었다.
이 기쁨을 제일 먼저 나눌 사람이 떠오른 탓이었다.
***
-작가님의 작품이 크리스마스 판매 1위입니다! 전 장르 통틀어 1위라고요.
들뜬 올리버 편집장의 목소리가 들린다.
행복한 크리스마스.
내 입장에선 이보다 좋은 희소식은 없었다.
“다행이네요. 로열패밀리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이 있는 대중들 덕분이죠. 영국 언론 덕에 뜻하지 않은 마케팅 효과를 봤네요.”
-맞습니다. 다만 그것만으로는 이 열풍을 설명하기 힘들죠. 작가님의 작품이 완성도가 없었다면 이렇게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키진 못했을 테니까요.
올리버 편집장의 목소리에서 넘치는 행복감이 느껴진다.
하긴 편집장 입장에선 본인이 선택한 작품이 잘 되는 것만큼 보람된 일도 없을 테니까.
-정말, 감사합니다. 작가님.
내 작품이 잘 됐는데 오히려 감사가 돌아온다.
“아닙니다. 솔직히 2개국 동시 출판은 올리버 편집장님이 추진해주신 거잖아요. 자체 인쇄소까지 가동하면서 시일을 맞춰주셨고요.”
올리버 편집장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면 이렇게 빠른 진행을 하기란 어려웠다.
“매번 큰 도움을 받는군요.”
-하, 참. 이거 제가 절을 해야 하는데 절을 받는군요. 더 열심히 하라는 의미로 알겠습니다. 아, 한국도 지금 크리스마스 연휴죠?
“네, 맞습니다.”
-쉬셔야 할 텐데 제가 방해했는지 모르겠네요. 근데 너무 기뻐서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방해라니요. 그럴 리가요. 제 입장에선 가장 큰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기분인걸요.”
내 말에 미소 짓고 있을 올리버 편집장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아무튼 더 이상 시간을 뺏는 건 무례겠죠? 행복한 연휴 되시고, 늦었지만 메리 크리스마스입니다.
전화를 끊고 나는 잠시 창밖을 바라봤다.
그래.
오늘이 크리스마스였지.
더할 나위 없이 기분 좋은 크리스마스.
나는 문득 즐거운 인사를 전해야 할 한 사람이 떠올랐다.
‘조금 늦었지만 그래도 괜찮겠지?’
나는 작은 선물과 함께 카드 한 장을 꺼냈다.
기뻐할 상대를 생각하니 벌써부터 미소가 지어진다.
***
늦은 밤.
LA에 위치한 스튜디오.
한창 후반 연출 작업 중이던 크리스토퍼 올란 감독이 지친 표정으로 얼굴을 감싼다.
‘하아. 왜 이렇게 아쉬운 거지?’
심오하고 깊은 권서준 작가의 대본.
그 세계를 다 담으려고 하니 자꾸만 힘이 들어가고 톤이 맞지 않았다.
‘놓치고 싶지 않은데, 자꾸만 의미와 주제가 퇴색되는 기분이야...’
벌써 며칠째 반복되는 고민에 올란 감독은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어? 감독님 아직 계셨어요?”
늦은 시간에 스튜디오에 들어오는 정은미 피디가 보인다.
“이 시간에 정 피디가 무슨 일이에요? 퇴근한 거 아니었어요?”
“아, 한국에선 야근이 흔한 일이거든요. 마침 잠도 안 오고, 책도 읽을 겸 해서 왔어요.”
그 말에 올란 감독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정 피디가 들고 있는 책으로 향한다.
“그게 뭐죠?”
“아, 이거요? 권 작가님 차기작이요. 어렵게 구했거든요.”
권서준 작가의 차기작이라는 말에 올란 감독의 관심이 흐른다.
“근데, 소설이 아니네요?”
표지를 보자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네, 이번엔 그림 동화를 쓰셨더라고요.”
“그림, 동화요?”
정 피디가 고개를 끄덕인다.
“네, 전 이미 한 번 봤는데, 감독님도 한번 보시겠어요?”
정 피디가 자연스럽게 책을 내민다.
마치 동양화 느낌을 내는 그림 동화였다.
“...”
그림 동화라.
조금은 생뚱맞은 장르였다.
그러나 저자가 권서준 작가이기에 올란 감독은 책을 받아들였다.
이내 천천히 책장을 넘긴다.
그런데 시작부터 흡입력이 장난 아니었다.
‘이건...’
단순하고 직설적인 이야기.
고작 부모를 잃고 방황하는 어린 고양이 한 마리가 주인공인 그림 동화였다.
‘동화라서 그럴까? 쉬워. 그런데 이 느낌은 뭐지?’
간결해서 오히려 묘한 여운이 남는다.
선도, 색도, 내용마저 단순했는데 그래서 더 생각이 많아진다.
‘이상하군. 내가 왜 이토록 도둑고양이에게 감정이입이 되는 걸까?’
어린애들이 대상인 동화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고 있었다.
“하아...”
짙은 여운에 올란 감독은 몇 번이나 뒷장을 확인했다.
“어떠신가요?”
정 피디가 묻는다.
“...표정을 보니 이미 내가 할 대답을 알고 있는 거 같은데요?”
올란 감독의 말에 정 피디가 미소를 짓는다.
“정말 엄청난 사람 아닌가요?”
올란 감독은 고개를 끄덕였다.
반론의 여지가 없었다.
“네, 정말 엄청나네요. 처음엔 이야기가 단순하다 싶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네로를 응원하게 되네요. 뭔가 신기한 기분이에요.”
솔직한 감상이었다.
“한편으로는 이 단순한 동화가 어떻게 이런 감동을 전달할 수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요.”
피식 웃던 정 피디가 입을 연다.
“어쩌면 동화이기 때문이죠.”
“...네?”
올란 감독이 되묻자 정 피디가 말을 잇는다.
“이 이야기가 진지한 소설이었다면 이렇게 깊이 와 닿지 않았을 거예요. 동화라서 우리의 마음을 더 쉽게 무장해제 시킨 거죠.”
“...”
순간 올란 감독의 입이 벌어진다.
‘그래. 그거였어...’
가끔 작품성 짙은 영화보다 가볍게 즐기는 애니메이션 속에서 삶의 진리를 발견하고 감동할 때가 있었다.
동심(童心).
사전적 의미로는 어린아이의 마음.
그러나 실상 어른이 되어도 자연스럽게 가슴 한구석에 남는 게 바로 동심이었다.
‘우리가 히어로 영화, 박진감 넘치는 모험 영화에 열광하는 것도 그 때문이지.’
순간,
머릿속에 귀한 영감이 떠오른다.
‘그래. 지나치게 주제 의식을 드러낼 필요는 없어. 오히려 쉽고 간단하게 전하는 거야...’
며칠째 이어진 자신의 고민은 쓸모없는 걱정이었다.
그저 어린아이에게 들려주는 동화처럼 쉽고 간단한 이야기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걸 빛내줄 연출력이 자신에겐 있었다.
‘그래. 이거야...’
안개 속을 거니는 것처럼 혼탁한 머릿속이 단 번에 깨끗해지는 기분.
어느덧 팔부 능선을 넘어간 편집 작업.
작품을 보다 빛나게 만들 영감이 더해지자 마음이 설레기 시작한다.
“이번 책도 엄청나게 잘 될 거 같은데요?”
“기사를 보니 한국하고 영국에선 이미 난리가 났더라고요.”
정 피디의 말에 올란 감독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우리도 얼른 보여드려야겠네요.”
권서준 작가에게 당당히 보여줄 수 있는 결과물.
그 결과물을 위해 올란 감독이 다시금 모니터로 시선을 옮긴다.
그 어느 때보다 자신 있었다.
***
늦은 밤.
정신없이 스케줄을 마친 신하율이 주차장에 도착한다.
‘후...’
바쁜 스케줄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크리스마스가 다 지나가 있었다.
“하암, 오늘 고생했다. 푹 쉬고, 내일 8시에 태우러 올게.”
성도윤 팀장이 긴 하품을 하며 말한다.
막 차에서 내리려던 신하율이 성 팀장을 바라보며 묻는다.
“참, 팀장님. 그 책 구했어요?”
“책?”
“이번에 나온 권 작가님 신작 말이에요.”
서점에 들를 시간도 없이 바쁜 스케줄에, 인터넷 주문은 이미 매진된 상태라 특별히 성 팀장에게 부탁한 상태였다.
“아, 그거? 당연하지. 내가 막내한테 시켰거든. 잠시만.”
성 팀장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들어 후배 매니저에게 전화를 건다.
“어, 막내야. 그래, 내가 그때 말한 책 구해놨지?”
그런데 갑자기 성 팀장의 표정이 굳는다.
“뭐, 뭐? 절판? 아니 그럴 거 같아서 미리 말해 놨잖아!”
휴대폰 너머로 죄송하다는 사과가 들려온다. 당황한 성 팀장은 신하율엘게 미안한지 오히려 더 크게 막내를 혼낸다.
“몇 번이나 말했잖아. 이 자식아, 그렇게 일하면 어쩌자는 거야?”
지켜보던 신하율이 고개를 젓는다.
“후... 그만 하세요. 괜찮아요...”
“어? 아, 그래도...”
“고생하셨어요. 전 좀 쉴게요...”
신하율이 애써 웃으며 엘리베이터에 오른다.
버튼을 누르자 엘리베이터가 올라간다.
위이잉.
적막감이 신하율을 휘감는다.
화려한 무대와 조명이 꺼지고 나면 찾아오는 쓸쓸함.
인기를 얻고, 스케줄이 바쁠수록 그 허무감은 더 커지기만 했다.
문득 권서준의 일과가 궁금해진다.
‘...작가님은 뭐하시려나?’
휴대폰을 몇 번이나 만지작거리던 신하율은 이내 한숨과 함께 내려놓는다.
너무 늦은 시간인 탓이었다.
“후...”
지친 몸을 이끌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린다.
무의식적으로 비밀번호를 누르고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무심코 문고리에 걸린 쇼핑백 하나가 보인다.
“이게 뭐지?”
팬이 두고 간 선물인가 싶지만 아직 노출된 적이 없는 숙소.
신하율은 조심스럽게 안을 들여다본다.
“어? 이, 이건...”
놀랍게도 안엔 권서준 작가의 신작이 들어있었다. 자신이 그토록 기다리던 그림 동화가.
서둘러 펼쳐보니 친필 사인이 보인다.
단번에 누가 보낸 선물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함께 담긴 카드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메리 크리스마스]
손바닥만 한 작은 카드엔 일곱 글자가 전부였다.
그러나 우울하기만 했던 크리스마스가 행복해지기엔 충분한 분량이었다.
‘권 작가님...’
몸을 휘감던 허무감은 어느새 사라진다.
적막하던 주변 공기가 갑자기 생기를 띄며 분주해지는 기분.
‘조금이라도 빨리 보고 싶어...’
신하율은 서둘러 책을 안고 집 안으로 들어간다.
마치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설레는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