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 useless - 쓸모 없는 (6)
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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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교 문고 잠실점.
얼마 전 팀장으로 승진한 서 씨는 신입 직원을 데리고 손수 매대를 정리했다.
옆에서 수십 권의 책을 카트로 나르던 신입이 퉁명스러운 얼굴로 입을 땐다.
“선배, 그림 동화책을 이렇게 많이 진열해요?”
서 팀장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매대 위에 놓인 한 책으로 향한다.
제목 : 도둑고양이 네로
출판사 : 와이즈
지은이 : 권서준
권서준 작가의 차기작이었다.
가만히 바라보던 서 팀장은 다시 책을 정리하며 입을 연다.
“그것도 모자를 수 있어. 지난번엔 200권이 하루 만에 나갔으니까.”
“네? 에이, 말도 안 돼요. 제가 근무한 지 3달이 다 되어 가는데 하루에 30권 나가는 책도 거의 못 봤는걸요?”
신입의 의심.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따지고 보면 서 팀장 본인도 불과 1년 전만 해도 저런 의심을 했었으니까.
‘뭐,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모르지.’
서 팀장은 설득 대신 다른 방법을 택했다.
“쓸데없는 걱정 그만하고, 일단 시키는 대로 진열이나 해. 왜 그런지 이따 보면 알 테니까.”
“하아, 네...”
신입은 입을 댓 발 내민 채 마지못해 권서준 작가의 그림 동화로 매대를 채운다.
그렇게 한 시간 뒤.
오픈 시간이 임박해서야 간신히 진열을 마칠 수 있었다.
“후아...”
신입이 허리를 펴며 숨을 고른다.
“요즘 같은 세상에 누가 그림 동화를 산다고. 애도 아니고...”
매대를 꽉 채운 그림 동화를 보며 신입은 여전히 툴툴댔다.
그런데 그때,
오픈과 동시에 사람들이 밀려든다.
“어, 어...?”
마치 명품 매장에서 오픈 런을 하는 사람처럼 밀려드는 손님에 신입의 눈이 커진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신입을 향해 묻는다.
“저기요, 권서준 작가 신작 나왔죠?”
“...네? 아, 네.”
“어디예요? 아, 빨리 좀 말해 봐요.”
“아, 저, 저기입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신입이 손가락을 가리키자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간다.
그리고 하나같이 서둘러 책을 품에 안고는 계산대로 향한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신입은 황당한 듯 고객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때,
서 팀장이 슬쩍 다가와 입을 연다.
“무슨 상황이긴 다 예측한 상황이지. 이게 바로 권서준 이펙트라고.”
“...”
보고 있어도 믿기 힘든 현상에 신입은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서 팀장이 다시금 신입의 옆구리를 쿡 찌른다.
“뭐해? 어서 가서 채우지 않고.”
“네? 아, 네...”
그제야 얼 타던 신입이 서둘러 창고로 향한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서 팀장이 미소를 짓는다.
‘권서준 작가가 유명하다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미처 몰랐겠지.’
자신 역시 그랬기에 신입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정말 엄청나군.’
지난번 보다 훨씬 더 빠른 판매 속도.
이대로라면 당일 품절도 가능할 정도였다.
‘아이고, 이럴 때가 아니지.’
서 팀장도 다급히 손님들 틈을 파고들어 책 한 권을 집어 든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소중한 딸내미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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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에 대한 반응과 평가는 엄청났다.
불과 일주일 만에 베스트셀러 순위의 최상단을 차지했다.
발 빠른 평론가들은 벌써부터 주제 의식과 작품에 대해 평가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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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고양이 네로」가 전하고 싶은 얘기는 무엇일까.]
문학작품에서 권선징악은 매우 중요한 주제이다. 그 때문에 아이들이 읽는 동화책의 경우 사회 교훈적인 주제를 담는 게 좋은 작품으로 평가받아 온 게 사실. 그러나 우리의 삶에서 권선징악이나 인과응보 같은 결과가 제대로 이뤄지는 걸 보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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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적으로 단순히 교훈적인 주제를 전달하는 작품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현실과의 괴리감을 느끼게 한다. 그 때문에 최근엔 좋은 문학 작품에 대한 기준도 달라지고 있다. 권서준 작가의 작품은 바로 그 기준에 닿아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답을 제시하는 대신 그저 생각할 거리를 담담하게 던져 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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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서준 작가는 어린 고양이의 가슴 아픈 여정을 통해 인간과 사회가 얼마나 복잡한지 보여준다. 선악을 가르는 단순한 대립을 넘어서 그 안에 담겨 있는 개인의 상처를 강조한다. 이는 정답을 내기 어려운 우리의 삶과 닮아있어 많은 고민을 던져준다. 그래서일까. 마지막 책장을 넘기고 나면 꽤 긴 시간 동안 생각에 잠긴다. 속 시원한 답은 없지만 우리가 마주해야 할 모순적인 세상 속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게 만든다. 그리고 어쩌면 그 고민이야말로 이 작품이 갖는 가치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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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를 읽던 정영만 회장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른다.
“녀석, 역시 해낼 줄 알았어.”
처음엔 그림 동화를 쓴다고 해서 걱정한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쓸모없는 걱정이었군.’
흐뭇하게 웃던 정 회장은 자연스럽게 얼마 전 권서준과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소설은 소설로 잡아야죠. 진실은 승리하는 법이니까요.’
정 회장은 가만히 권서준의 말을 되뇐다. 그럴수록 든든한 생각이 들었다.
‘녀석이라면 노벨문학상도 결코 꿈은 아니야.’
영어 28개.
프랑스어 14개
독일어 14개
스페인어 11
스웨덴어 7개
일본어 2개,
중국어 2개
안타깝게도 현재 노벨 문학상 언어별 수상자 중 한국어는 없는 상황.
물론 지금 당장은 힘들었다.
‘노벨문학상은 작가에게 주는 상이지, 특정 작품에 주는 상이 아니니까.’
수상 작가의 문학적 업적을 논하는 과정에서 언급되는 작품들이 있긴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작가의 삶에 주는 작품이었다.
당연하게도 나이 어린 작가에겐 기회가 닿기 어려웠다.
‘그러나 언젠가 그날이 오지 않을까?’
꽤나 오래 걸릴 수 있는 소원.
그저 눈을 감기 전 그 모습을 직접 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
아침부터 하늘에선 눈이 내린다.
몇 년 만에 찾아온 화이트 크리스마스.
“와우, 눈이 오니까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확 사네.”
장현웅이 들뜬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본다.
“왜? 데이트라도 있어?”
“야, 일할 시간도 없는데 데이트는 무슨. 나는 언제 솔로 크리스마스를 벗어나 보나...”
애잔한 장현웅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질 뻔했다.
나는 간신히 웃음을 참으며 온 세상을 하얗게 뒤덮은 눈을 바라봤다.
자연스럽게 차기작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진다.
내가 선택한 장르는 SF.
자료 조사는 이미 충분한 상황이었다.
배경은 서기 2930년.
안드로메다 성운의 식민지에서 펼쳐지는 한 인간의 수용소 탈출기였다.
이야기의 얼개는 거의 완성된 상태.
내용과 주제를 관통할 제목만 정한다면 바로 집필에 들어갈 예정이었다.
‘제목은 뭐로 할까?’
지이잉.
며칠째 이어지는 고민이 깊어질 때쯤 휴대폰이 울린다.
정영만 회장이 보낸 메시지였다.
[기쁜 날인데, 술 한잔 해야지.]
눈 내리는 크리스마스 날에 정 회장과의 술자리라.
뭐 나쁘진 않았다.
***
두 시간 뒤.
정 회장 댁에 도착하자마자 술자리가 시작되었다.
기분이 한껏 오른 정 회장과의 술자리는 술 2병을 비워낼 때까지 이어졌다.
“대단하다. 대단해. 매번 사람을 놀라게 하다니.”
정 회장은 이번 그림 동화의 선전에 크게 기뻐했다.
“운이 좋았죠. 감사합니다.”
“녀석, 이럴 땐 좀 기뻐하는 티를 내도 돼. 능구렁이 같아서는.”
말과 달리 눈빛에선 살가움이 느껴진다.
한껏 취기가 오르자 정 회장은 자연스럽게 우리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처음 송 교수가 네 얘기를 할 때가 떠오르는구나. 한국에 드디어 천재 작가가 나타났다고, 셰익스피어가 환생한 것 같다고 했었지.”
정원을 바라보는 정 회장은 그때를 떠올리며 상념에 잠긴다.
“처음엔 믿을 수 없었다. 간절히 바랐지만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송 교수의 얘기니까 귀담아들을 수밖에 없었지. 그래서 네 첫 연극도 관람하게 된 거고.”
문득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오늘 극단 김 대표와 함께했던 작품.
“근데 그 대단한 작품이 한낱 수업 과제였다니, 충격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지.”
정 회장은 그때를 회상하며 웃고 있었다.
“너도 알다시피 셰익스피어 정말이지 위대한 작가야. 유럽의 낭만파 문호들도 셰익스피어의 작품 앞에선 자신의 초라함만 확인할 뿐이었으니까. 이후의 작가들에게 끼친 영향만 봐도 그렇고.”
정 회장은 손을 뻗어 액자에 담긴 긴 문구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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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라면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알 수밖에 없고 그의 작품들을 공부하지 않을 수 없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공부하면 그가 얼마나 인간 본성을 높고, 깊은 차원에서 사용했는지 깨닫게 된다. 그래서 그 이후 등장한 작가들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남아있지 않다. 셰익스피어는 우리에게 은쟁반에 담긴 황금사과를 담아 주었다. 우리도 그의 작품을 연구함으로써 은쟁반을 물려받을 순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은쟁반에 담을 수 있는 건 고작 감자뿐이니, 이 얼마나 고약한 일인가.
-괴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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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낭만주의 작가 괴테.
독일 문학의 최고봉으로 우리에겐 작품 「파우스트」로 친숙한 작가였다.
“그 유명한 괴테 역시 셰익스피어 앞에선 한낱 범인(凡人)에 지나지 않았어. 그런데.”
잠시 말을 멈춘 정 회장이 진지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연다.
“우린 그 가능성을 네 작품에서 본 거야. 아니, 그 이상의 가능성을 보고 있지.”
정 회장의 눈빛은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후배를 향한 기대감이 가득했다.
“그래서 궁금하구나. 다음 차기작은 무엇을 생각하는지.”
선배의 진솔한 궁금증이었다.
물론 숨길 이유는 없었기에 나는 사실대로 말했다.
“SF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SF?”
되묻는 말투에서 당황한 기색이 느껴진다.
이해할 수 있는 반응이었다.
‘SF 장르에 대한 인식이 그러니까.’
그러나 이내 정 회장의 눈빛이 진지해진다. 달라진 눈빛에서 나를 향한 신뢰가 느껴진다.
“그래. 다 생각이 있겠지.”
술 한 잔을 비워낸 정 회장이 잠시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내 다시 나를 바라본다.
“네가 어떤 차기작을 준비하는지 모르지만, 믿고 기다리마.”
정 회장은 의심을 애써 밀어내고 나를 향한 기대를 보여준다.
물론 충분히 부응할 수 있는 기대였다.
왜냐고?
내가 바로 셰익스피어니까.
아니,
그 시절보다 더 업그레이드된 어게인 셰익스피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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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로 돌아온 나는 정 회장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제목이 정해진다.
제목은 「황금 사과」.
정 회장이 보여준 괴테의 말에서 영감을 얻어 제목으로 정했다.
‘내가 전해주고 싶은 게 바로 황금 사과니까.’
나만이 전할 수 있는 얘기가 있었다.
물론 쉬운 건 아니었다.
그러나 아는데 하지 않는 것, 보이는 데 모른 척하는 건 작가의 태도가 아니었다.
보이고, 들리고, 느껴지는 것을 전하는 것. 때론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느껴지지 않는 것조차 실존하는 듯 전달해야 하는 이야기꾼.
그게 바로 작가니까.
나는 본격적인 집필을 위해 컴퓨터를 켰다.
그때,
외출 중 도착한 메일 한 통이 눈에 띈다.
메일 속엔 크리스마스카드 이미지와 오늘 영국에서 벌어진 크리스마스 행사 사진이 담겨 있었다.
샌드링엄 하우스를 나와 성당으로 향하는 로열패밀리의 모습.
엘리자베스 여왕과 왕세자 부처, 그리고 왕세손 부부 및 직계 가족들이 담긴 사진이었다.
그런데 붉은 의상에 챙이 넓은 모자를 쓴 엘리자베스 여왕이 오늘따라 유난히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사진을 유심히 보던 나는 그 이유를 곧 알 수 있었다.
바로 여왕의 옆에 자리한 한 사람의 얼굴 때문이었다.
바로 조지 학회장이었다.
내 눈은 자연스럽게 메일을 보낸 이로 향한다.
발신자 역시 조지 학회장이었다.
나는 뒤늦게 카드 내용을 확인했다.
[고맙습니다. 작가님. 행복한 크리스마스 되시길 바랍니다.]
더없이 짧은 내용.
무엇이 고마운지, 왜 고마운지, 많은 것들이 생략되었지만 나는 단번에 조지 학회장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잘 됐어.’
나는 뿌듯한 마음에 가만히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내가 건넨 선물이 돌고 돌아 내게로 돌아왔다.
내가 창조한 세상이 나의 삶을 넘어 누군가의 삶을 변화시켰다는 사실이 뿌듯했다.
‘이 맛에 글 쓰는 거지.’
먹먹하게 밀려오는 기쁨이 크리스마스의 늦은 밤을 수놓았다.
지이잉.
그리고 그때,
또 한 통의 전화가 울린다.
오랜만에 걸려 온 올리버 편집장의 연락이었다.
“안녕하세요. 편집장님. 오랜만입니다.”
-네, 작가님. 메리 크리스마스입니다!
영국에서 연거푸 날아온 인사에 기분이 업된다.
“네, 메리 크리스마스입니다. 근데 이 시간에 무슨 일이시죠?”
내가 묻자 올리버 편집장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현지 반응을 전해드리려고요. 지금 작가님의 작품 때문에 이곳은 아주 난리가 났거든요!
지구 반대편에서 날아온 희소식.
크리스마스의 마무리를 장식하는 귀한 선물이었다.